전문가들, 우리 사회를 배신하다 [고영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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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들, 우리 사회를 배신하다

2016.10.10


#1 백남기 농민의 사망 원인을 표시한 진단서를 놓고 사회가 시끄럽습니다. 서울대 의대 학생 성명서, 전국 의대 학생 성명서, 그리고 서울대 의대 동문의 목소리가 뒤이었습니다. 이에 구성된 서울대병원 조사위원회도 ‘외인사’라 했고, 대한의사협회도 나섰지만 담당 의사만 ‘병사’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습니다. 담당의사에게 진단서를 작성할 권한이 있다는 것으로 무제한 재량과 권능을 인정해야 합니까? 또, 같은 분야 전문가 대부분이 아니라 할 때, 담당의사의 권능으로 ‘병사’라고 기록했다고 하여 사실로 확정해야 합니까? 더구나 서울대병원은 외상 치료비를 11차례나 건강보험 신청한 사실도 있었더군요. 온 나라의 관심을 끌었기에 이런 사실이 드러났습니다만, 드러나지 않고 묻힌 것도 제법 있을 것 같습니다.

#2 옥시 가습기 살균제 사건에서 독성 실험연구를 맡은 사람은 독성분야에서 최고 권위자였다고 합니다. 옥시는 그에게 시험 결과의 일부를 일부러 빼도록 요구했고, 그는 요청에 맞게 엉터리로 보고서를 썼습니다. 옥시의 소송대리인은 보고서가 엉터리임을 알면서 그것을 참조하여 변론했습니다. 연구자는 실형을 받았습니다. 소송대리인은 자기 역할은 정당했다고 주장하는 것 같습니다. 변호사법에 ‘변호사는 기본 인권을 옹호하고 사회정의를 실현함을 사명으로 직무를 수행해야 한다.’고 했으면서 사실을 왜곡해 가면서 의뢰인이 이기게 변론하는 것, 이게 올바른가요?

#3 변리사법 8조(소송대리인인 될 자격)가 ‘변리사는 특허에 관한 사항에 소송대리인이 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음에도, ‘특허침해사건’에서 변리사에게 소송대리를 허용하지 않은 것이 위헌임을 확인해 달라는 헌법소원사건(2010헌마740)에서, 2012년 8월에 헌법재판소(당시 이강국 헌법재판소장)는 위헌이 아니라고 결정했습니다. 누가 읽더라도 소송대리권을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고, 법원도 저 규정에 따라 서울행정법원, 서울고등법원에서 변리사를 소송대리인을 표시한 판결을 낸 적이 있고, 여러 가처분신청사건에서도 변리사를 대리인으로 인정한 사례가 있었습니다. 이런 판례를 언급하지 않고 모두 무시하고, 합리적으로 설명하지 못하면서 변리사의 소송대리권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위 헌법재판소 결정을 두고, 헌법학자 두 사람이 잘못을 지적하는 논문 두 편을 헌법학회 학술지에 싣기도 했습니다. 다음 헌법소원심판에서는 헌법재판소가 올바르게 결정할까요?

전문분야의 일은 일반인이 알기 어렵습니다. 일반인이 알기 어렵기에 전문분야입니다. 그런 분야는 전문가가 해결하도록 전문가제도를 운용합니다. 일반인은 그 분야 전문가가 실력과 양심을 바탕으로 진실을 얘기할 것이라 믿습니다. 전문가가 거짓으로 처리하더라도 일반인이 밝히기는 참 어렵습니다.
 
전문가제도는 사회의 신뢰도를 높이는 제도입니다. 전문분야의 신뢰도는 우리 사회의 경쟁력과 직결됩니다. 징검다리를 건널 때, 저 징검돌이 안전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섣불리 발을 디딜 수 없습니다. 모든 징검돌이 안전한지 일일이 확인할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 사회에 비용을 요구합니다. 전문가제도는 징검돌의 안전성을 확인하는 구실을 합니다.
 
앞으로 사건에 연루된 당사자는 의사의 진단서나 소견서를 믿어도 될까요? 의사의 진단과 치료방법을 믿어도 될까요? 사건에 휘말린 당사자는 학자의 연구보고서나 소견서를 믿어야 할까요? 우리 국민은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사심 없이 공정하게 판단했다고 믿어도 될까요?
 
믿었던 도끼가 우리 사회의 발등을 찍는다면, 끔찍합니다. 우리 사회 바탕을 허무는 짓입니다. 의도를 갖고 잘못을 저지르면 안 됩니다. 전문가도 사람인 이상 자기도 모르는 사이 실수할 수 있습니다. 서울대 의대생의 성명서에서 ‘전문가란 오류를 범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오류를 범했을 때 그것을 바로잡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말, 그렇습니다. 전문가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게 스스로를 가다듬어야 합니다. 설령 잘못됐다면 잘못을 확인한 순간 바로잡는 것, 전문가만이 할 수 있습니다. 전문가가 그렇게 행동할 때 전문가의 신뢰도는 높아집니다. 전문가가 우리 사회에 던진 배신, 전문가가 스스로 해소하여 믿음을 회복하길 기대합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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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고영회(高永會)

진주고(1977), 서울대 건축학과 졸업(1981), 변리사, 기술사(건축시공, 건축기계설비). (전)대한기술사회 회장, (전)과실연 수도권 대표, (전)대한변리사회 회장, 세종과학포럼 상임대표 mymail@patinfo.com

게스트칼럼 / 노경아

아재는 변신 중


“공부를 카페에서 했다고? 주변의 대화 소리, 음악 소리, 자동차 소리… 그 산만한 곳에서. 집중이 되니? 공부는 독서실에서 해야지!”
“조용하면 딴생각이 들어 오히려 공부가 안 돼요. 옛날 옛적에 엄마가 했던 공부 방식만을 강요하지 마세요. ‘카공족’이 뭔지도 모르죠? 그러니까 엄마는 꼰대 아닌 척하는 진짜 꼰대라고요 꼰대!”

며칠 전 작은아이와 나눈 대화입니다. ‘카공족’은 카페에서 공부하는 사람이랍니다. 시사상식사전에까지 단어가 오를 정도로 카페에서 공부하는 중·고생이 많다고 합니다. 

학창 시절 밤늦도록 도서관 자리를 지켰던(‘수학의 정석’을 베고 잠을 잤을지언정!) 필자로선 ‘카페=공부하는 곳’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아이와 대화를 하며, 세대가 바뀌었으니 공부하는 방식도 변할 수 있지 뭐 하고 생각을 달리했습니다.

그런데 딸은 엄마가 꼰대라는 생각에 변함없답니다. ‘친구 같은 엄마’가 되기 위해 신세대 언어를 살피고, 최신 가요의 제목과 가사를 외우는 등 나름 노력을 했는데, 뒤통수를 맞은 느낌입니다. 아이는 이유를 말합니다. 친구처럼 대해주는 건 잠깐일 뿐, 실상은 명령 훈계 잔소리 등 꼰대짓을 하고 있다고.

꼰대는 ‘늙은이’를 뜻하는 은어로, 학생들 사이에선 ‘선생님’으로 통합니다. 번데기의 영호남 방언인 ‘꼰데기’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유력합니다. 주름이 많은 번데기처럼 피부도, 사고도 쭈글쭈글해진 세대라는 의미인 것 같습니다. 어쩌면 한 시대를 주름잡아, 자신의 경험만 옳다고 우기는 불통(不通)의 세대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런 면에서 꼰대는 아재, 개저씨(개+아저씨) 등과 같은 의미로 쓰입니다. 참 씁쓸한 말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불통의 아이콘, 꼰대를 떠올리게 하던 ‘아재’들이 변신 중입니다. 권위주의를 내려놓고 젊은 세대와 융화하기 위해 ‘개그’를 뻥뻥 터트리고 있습니다. 이른바 ‘아재 개그’입니다. △어민들이 싫어하는 가수는? 배철수 △모든 사람을 일어나게 하는 숫자는? 다섯 △가장 야한 채소는? 버섯 △지방 흡입의 반대말은? 수도권 배출 △할아버지가 좋아하는 돈은? 할머니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왕은? 최저임금, 뭐 이런 식입니다. 하나같이 유치하고 허무한 내용이지만 젊은 세대들은 아재가 던지는 말에 손뼉을 치며 웃고, 따라 하기까지 합니다. 세대 간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기특한’ 개그입니다.

아재들은 개그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패션, 노래, 댄스 등 ‘아재 문화’까지 만들고 있습니다. 아재는 이제 비난의 대상인 ‘개저씨’가 아니라 정감 넘치는 아저씨입니다. 참 환영할 일입니다.

내친김에 아재와 비슷한 아줌마도 좀 살펴볼까요. 예상하신 대로 아줌마는 비칭(卑稱)에 가깝습니다. 그러니 모르는 중년 여성에게 “아줌마”라고 불렀다간 봉변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저는 아줌마가 정답습니다만!). 그렇다고 아무한테나 “여사님”이라는 호칭을 붙여서도 안 됩니다. 아부 잘 떠는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래저래 아주머니란 호칭이 가장 좋습니다. 아주머니, 아줌마 둘 다 지금은 ‘나이 든 여성’을 뜻하지만 원래 고모나 이모 등 부모와 같은 항렬의 여자를 이르는 말이었습니다.
 
국어사전상의 의미로만 따진다면 아재나 아줌마는 듣는 입장에서 매우 거북한 말입니다. 각각 아저씨, 아주머니의 낮춤말로 나와 있기 때문입니다. 강원도나 경상도 등지에선 아저씨, 아주머니를 친근하게 부르는 말로 두루 쓰이는데 말이죠.
 
원래 아재는 아재비, 아저씨와 한뜻으로, 부모와 항렬이 같은 남자를 이릅니다. 또 남남이라도 나이 든 남자를 친근하게 부를 경우 아재라고 합니다. 그러고 보니 쓰임이 참 다양한 말이네요. 최근 국립국어원은 아버지의 결혼한 남동생만 작은아버지라고 했던 것을 결혼하지 않은 남동생도 작은아버지로 부를 수 있다고 유권해석했습니다.
 
이처럼 세상이 바뀌고, 사람들의 생각도 바뀌었으니 국어사전도 새로워질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세상에 어른을 낮춰 부를 말은 없지 싶어서입니다. 저 또한 사랑하는 딸에게 꼰대가 아닌 멘토가 되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필자소개

노경아


경향신문 교열기자·사보편집장, 서울연구원(옛 시정개발연구원) 출판담당 연구원을 거쳐 현재 이투데이 교열팀 차장. 우리말 칼럼인 ‘라온 우리말터’ 연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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