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물리학자’로 왜곡된 청년 이휘소의 진심

카테고리 없음|2016. 9. 19. 15:08


[미래] 박상준의 과거창


1953년 서울대 공대 학보 실린 글

과학과 종교에 대한 사유의 흔적

‘이하 생략’ 뒤엔 어떤 결심 있었나


   ‘노벨물리학상에 가장 근접했던 한국계 과학자’ 이휘소 박사는 1977년에 미국에서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42살 때의 일이다.


생전의 이휘소 박사의 모습. 출처 shineyourlight-shineyourlight.blogspo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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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입자물리학자였지만 우리나라에선 핵물리학자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이 많다. 김진명 작가가 소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에서 그를 비밀리에 핵무기를 개발하다 석연치 않은 죽음을 당한 인물로 왜곡 묘사했기 때문이다. 이휘소의 유족은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했으며 한국 법원은 소설의 내용이 허위라고 판결했다.


이휘소는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에 서울대 공대 화학공학과에 수석으로 입학했다. 그런데 재학 중에 물리학에 흥미를 느껴 물리학과로 전과하려 했지만 학교의 허락을 받지 못했다. 결국 그는 서울대를 중퇴하고 미국으로 떠나 마이애미대학교 물리학과에 편입한다.


그가 물리학에 심취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이휘소는 대학생으로 맞은 첫 겨울방학을 부산에서 보냈다. 당시 서울대는 전시연합대학의 일원으로 부산에 피난 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그는 말벗도 없이 외로운 방학을 독서와 사색으로 충실히 채운 듯하다. 1953년에 나온 서울대 공대 학보 ‘불암산’을 보면 바로 그 시절 18살 대학생 이휘소가 쓴 글이 실려 있다.


1953년 서울대 공대 학보에는 18살 대학생 이휘소가 쓴 글이 있다.  서울SF아카이브 제공


“저에게는 아직 ‘크리스차니티’(그리스도교)의 교의는 이해되지 않습니다. 신자들의 경건한 모습에는 마음을 두들기는 그 무엇이 있었습니다마는 지금으로서는 ‘프로비던스’(신의 섭리)보다는 인간의 이성을 믿고 싶습니다. 일체를 신에게 바쳐서야 인간의 노력은 정지되고 인간은 어떤 것의 노예가 되는 것이 아닐까요. 새벽 안개 속을 흐르는 찬미가의 멜로디에는 마음을 이끄는 아름다움을 느꼈습니다만 저는 이성의 눈을 똑바로 뜨고 나가겠습니다.”


‘K에게’라는 제목의 편지글 형식으로 쓴 짧은 수필은 기독교에 대한 조심스러운 입장을 피력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성의 눈을 뜨고 나가겠다’라는 확고한 기백은 그의 종교관이 무신론 쪽임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듯싶다. 그러나 바로 뒤이어서는 ‘서구 문화에 깃들어 있는 성(聖)의 절대적 존재를 부인하지 못하겠습니다’라는 열린 자세도 보여준다.


그러고서 본격적으로 자연과학에 대한 관심을 고백하기 시작한다.


“자연과학이 참으로 위대한 힘을 가졌음을 새삼스럽게 느꼈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응용만을 위한 <로고스>(Logos)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 열역학적 특성함수란 결코 수가 아닙니다. 그것은 수와는 전혀 동떨어진 존재입니다. 다만 그것이 수에 관한 성질을 갖추고 수학적 “오퍼레이션”(연산)에 대하여 그 의의가 1대1로 대응한다는 것뿐입니다. … 수란 무릇 물리적 양에 대응하는 추상물일 것입니다. 물리적 양으로써는 논리의 발전이 곤란하므로 수학이라는 논리로써 자연현상을 설명하는 것이겠지요.”


이 뒤로 무리수, 복소수 등이 등장하는 내용이 더 이어지는데, 갑자기 중간에 글이 끊기면서 ‘이하 생략’으로 마무리가 되어 있다. 아마 편집자들이 어려운 수학 개념을 부담스러워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 수필은 학보의 한 면을 미처 다 채우지 못하는 짧은 글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세계적인 물리학자가 본격적인 기초과학의 길을 가기로 결심했던, 그 푸르던 젊은 시절을 얼마라도 헤아려보기에는 모자람이 없어 보인다.




이휘소의 유족은 소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에 왜 명예훼손 소송을 걸었을까? 작품에서 그는 미국 몰래 박정희 정권과 함께 핵무기를 개발한다고 나오지만, 사실은 정반대였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휘소는 생전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핵무기는 언젠가 반드시 없어져야 하며, 특히 독재가 행해지고 있는 개발도상국에서의 핵무기 개발은 결코 허용해서는 안 된다.”(제자인 고려대 강주상 교수 증언)

한겨레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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