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운서 1,000 대 1 [박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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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운서 1,000 대 1

2016.08.29


올해도 어김 없이 2,000명이 넘는 지원자가 몰려 들었습니다. 공채 아나운서 두 명을 뽑을 예정인데 2,000명이 넘는 지원자가몰렸으니 1,000대 1이 넘는 경쟁률입니다. 심사위원이 2개 조로 나뉘어 1차 카메라테스트를 하는 데 꼬박 이틀이 걸렸습니다. 지원자에게 주어진 시간은 40초 안팎이지만 2,000명에게 40초씩 할애하면 쉬지 않고 심사를 해도 22시간이 넘게 듭니다. 2개 조가 심사를 하니 조마다 11시간이 넘는 강행군이 이어진 셈입니다. 하지만 ‘인사가 만사’라는 말이 있듯 아나운서 신입사원을 선발하는 일은 방송사의 미래를 결정하는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또한 선발되는 인원을 제외하면 탈락한 절대다수의 사람은 지원자에서 시청자의 신분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아나운서 공채에 임하는 현직 아나운서인 심사위원은 말과 행동을 무척 조심하게 됩니다.

십여 년 전부터 아나운서 공채 시험의 심사를 종종 해왔는데 올해 심사에서 유독 지원자들에게서 많이 보이는 특징이 있었습니다. 바로 여성 지원자의 90%가 베이지색 구두를 신었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아나운서를 준비하는 사설 학원에서 조언을 얻은 것 같은데, 사실 베이지색 구두는 다리가 길어 보이는 효과가 있긴 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굽입니다. 나막신처럼 앞 굽이 7~8센티미터는 족히 되어보이고 뒷굽은 15센티미터가 넘어 보이는 구두를 신은 지원자가 의외로 많았습니다. 이런 구두를 신은 지원자가 카메라테스트를 받기 위해서 뒤뚱거리며 걸어 들어오는 모습을 보면 측은한 마음이 생깁니다. 자신의 키를 커 보이게 노력하는 것은 지원자의 자유입니다만 과도한 욕심으로 자세가 흐트러지고 걸음걸이가 불편해진다면 얻는 것보다는 잃는 것이 많습니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이런 지원자가 한 둘 늘어나면서 다른 지원자들까지 선의의 피해를 보고 싶지 않은 마음에 과도한 하이힐을 신게 만듭니다. 이러한 경향은 남자 지원자들에게도 공통적으로 나타납니다. 대부분의 남자 지원자들 역시 키 높이 구두를 신고 옵니다. 하지만 심사위원석에 앉아 있으면 키높이 구두의 높이가 몇 센티미터인지 까지도 가늠할 수 있습니다.

여성의 경우 앞 머리 세팅을 위해 집게로 고정을 해 놓는 경우가 있는데, 대여섯명쯤 되는 지원자가 그 집게를 그대로 꼽고 카메라테스트를 보러 들어왔습니다. 아마도 긴장돼서 집게를 꼽아 놓고 있다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겠지요. ‘아, 저걸 알려줘야 할까?’ ‘아냐, 알려주면 오히려 더 긴장해서 시험을 망칠 수도 있을 거야’ 순간 많은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습니다. 아마 그 지원자들은 테스트를 마친 후 자신의 실수를 깨닫는 순간 무척 낙심했을 겁니다. 그리고 “내가 만약 탈락한다면 집게 때문 일거야.” 라고 한탄했을 겁니다. 결론을 미리 말하자면 머리에 꽂은 집게로 인해 당락이 결정되지는 않습니다. 물론 방송을 하는 사람은 신중해야 합니다. 뉴스 앵커가 앞 머리에 집게를 꼽고 방송을 하는 경우를 본 적은 없을 겁니다. 하지만 카메라테스트를 하러 온 지원자에게까지 실전과 똑같은 기준을 적용하지는 않습니다. 머리집게와 당락은 상관관계가 거의 없습니다.

모든 입사 시험이 마찬가지겠지만 아나운서 시험은 유독 ‘~카더라’라는 확인되지 않은 이야기들이 많이 생산되는 것 같습니다. 필자와 같이 심사를 했던 후배 아나운서가 인터넷에 올라 있는 이번 카메라테스트의 후기를 보여주었습니다. 후기들을 읽어보니 세상에 회자되는 속칭 ‘~카더라’는 이야기들이 생산되는 원리가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 “제가 보니까 심사위원들께서 종이에 뭔가를 적으시는데 제가 원고를 읽고 나니 X표를 하셨어요. 저는 떨어진 거겠죠?”, “심사위원들께서 어떤 분은 O표를 주셨고 어떤 분은 X표를 주셨어요.” 이런 내용의 이야기들에 댓글이 달리면서 정확하지 않은 이야기들이 확대 재생산되고 있었습니다.

카메라테스트를 하면서 심사위원들의 행동을 유심히 살필 수 있는 여유는 특별한 재능이긴 합니다만 생각이 너무 앞서서 할 필요가 없는 걱정을 미리하는 경우도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시험을 보는 입장에서는 자신이 어떻게 평가되는지 모르는 것이 당연하고 심사위원의 손에 쥐어진 평가표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모르는 것도 당연합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평가표에는 S, A, B, C 의 등급이 나뉘어져 있습니다. 어떤 분은 자신이 판단한 지원자의 등급을 동그라미로 체크를 하고 어떤 분은 엑스 표시로 체크를 했을 겁니다. 따라서 엑스로 체크했다고 떨어지는 것도 동그라미로 체크했다고 붙는 것도 아닙니다. 동그라미가 됐든 엑스표가 됐든 S나 A, 또는 B에 체크가 되어야 합격입니다.

지원자들의 후기에 올라온 이야기 중에 사실과 다른 것 또 하나는, 원고를 읽고 난 후 “카메라 정면을 봐 주세요.” “머리카락을 올려 주세요.” 같은 이야기를 들은 지원자는 합격일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기본적으로 심사위원들은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린 지원자에 대해 호감을 갖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얼굴을 가리는 사람은 자신감이 결여된 사람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인식은 타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카메라테스트는 자신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을 드러내놓고 보여주기를 꺼려하는 사람은 방송을 하는 직업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만, 목소리가 매우 좋거나 자세가 바른 지원자인데 의도적이지 않게 얼굴의 한쪽 면이 머리카락으로 가려진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 봐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리고 카메라 정면을 봐 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한 번에 들어오는 10명의 지원자 중 가장 바깥 쪽에 서있는 지원자의 경우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입니다.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봐야 얼굴의 대칭이 맞는지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종종 원고를 읽은 후에 카메라를 봐 달라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카메라를 통해 평평한 화면으로 얼굴을 보게 되면 평소에는 잘 모르고 지나치는 비대칭적인 모습을 보다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카메라테스트를 할 때, 심사위원들이 지원자를 직접 바라보는 시간보다 
시험장의 좌·우측에 있는 대형 스크린을 바라보는 시간이 훨씬 더 긴 이유 역시 자신의 눈보다 화면이 정확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하도 취업난이 심각해서 1,000대 1의 경쟁률이 그다지 놀랍지 않은 세상이 됐습니다만 해마다 넘치는 지원자들을 보면 ‘방송사의 경영환경이 좋아지고 아나운서의 수요가 늘어나서 매년 대여섯 명씩 아나운서를 선발한다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해마다 선발하지도 않거니와 한 해 걸러 한번 선발하면서 남녀 한 명씩만 선발하는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심사위원들은 모두 지원자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게다가 복장에 대한 규정이 따로 없음에도 90퍼센트 이상의 여성지원자들이 분장과 머리 손질을 하고 아나운서보다도 더 아나운서처럼 옷을 입고 옵니다. 흔히 말하는 신부화장을 하고 시험을 보러 오는데 보통 이렇게 치장을 하려면 한 시간 이상은 공을 들여야 하고 비용도 만만치 않습니다. 의상을 빌리고 분장을 하는 데 드는 비용이 많게는 백만 원 가까이 되는 경우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심사위원들 모두 이런 사정을 알고 있습니다.

필자는 ‘지원자들에게 이렇게 비용의 부담을 주지 말고 흰 티셔츠에 청바지 그리고 노메이크업으로 복장 규정을 통일해서 시험을 치르게 하는 게 어떨까?’라는 생각도 해봤습니다만 입사 테스트에서 복장과 외모를 규제하는 것에 대한 반감 역시 있을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따라서 회사의 입장에서는 지원자의 ‘자율’에 맡기는 것이 더 안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문제는 좀 더 심사숙고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다만, 지원자들이 최선을 다해 준비하고 노력한 만큼 심사위원들도 지원자들에게 예의를 갖추고 그들이 최상의 조건에서 후회없는 테스트를 받을 수 있게 배려해서 지원자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려고 노력하는 것으로 미안한 마음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비록 카메라테스트에 합격할 가능성이 매우 낮은 지원자일지라도 그 지원자가 자기소개를 하고 원고를 읽는 모습을 진지하게 모니터링합니다. 심사위원들에게는 수천 명의 지원자 중 한 명이지만 시험을 보고 있는 그 순간에 각각의 지원자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붓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당락을 떠나 시험을 보는 40초 안팎의 시간이 지원자에게 좋은 경험과 추억이 되어주기를 심사위원들을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최종적으로 999명이 탈락하고 한 명이 선발되기 때문에 탈락하는 999명의 마음을 더 헤아리고 보듬고 싶기 때문입니다.

아나운서 공채 시험을 보고 나면 한동안 시청률이 떨어진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습니다.시험에 떨어진 지원자들이 그 방송사를 외면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1,000명 중에 한명을 뽑으니 999명은 자신이 지원한 방송사에 대한 반감이 생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심사위원들이 지원자 한 분 한 분에게 최선을 다해 응대하였고 매우 공정하게 시간을 할애했다는 점을 헤아려 주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모든 지원자들이 아나운서 시험을 치르는 과정 속에서 자신의 장단점을 파악하고 더 나은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게 되길 희망합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이 칼럼을 필자와 자유칼럼그룹의 동의 없이 상업적 매체에 전재하거나, 영리적 목적으로 이용할 수 없습니다.

필자소개

박상도

SBS 아나운서. 보성고ㆍ 연세대 사회학과 졸. 미 샌프란시스코주립대 언론정보학과 대학원 졸. 
현재 SBS TV 토요일 아침 '모닝와이드'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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