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연금보험은 무사할까"
고령화ㆍ저금리 보험산업에 직격탄
알리안츠 등 외국계 생보사 탈출 러시
생보 750조원 자산은 ‘제2 안전망’
# 결혼 직후인 1992년 초 지인 권유로 교보생명의 ‘21세기 장수연금보험’에 가입했다.
당시 나이 30세. 아주 까마득한 미래인 만 55세부터 연금을 주는 상품이니 ‘그때가 오기는 하는 걸까’ 싶어 마뜩지 않았다. 그래도 지인 도와주는 셈치고 월 5만1,600원씩 10년간 총 619만원을 부었다.
출처 tiran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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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은 쏜살같이 흘러 1년4개월 뒤면 어느덧 만 55세. 2018년 초부터 죽을 때까지 매년 150만원의 연금이 나온다. 만 75세부터는 간호연금 150만원이 더해진다. 만일 95세까지 산다면 총 수령액은 9,000만원. 톡톡히 남는 장사다.
# 1980년대 한국경제는 두 자릿수 성장률을 보였고 노태우정부(1988~92년)에서도 연평균 8.6% 성장했다. 스펙 없이도 취직이 잘 됐고 결혼하면 고민 없이 애를 낳던 시절이었다. 1992, 93년 임신한 두 아이를 위해 교육보험에 차례로 가입했다. 당시 1년 만기 정기예금 금리는 13%선. 목돈 1,000만원을 은행에 맡기면 3년 뒤 1,500만원을 돌려줬다. 그러니 확정금리 연 7.5%로 설계된 교육보험이 성에 찰 리 없었지만 지인의 권유를 뿌리치진 못했다. 둘째에게 들어간 보험료는 월 13만5,000원씩 15년간 총 2,430만원. 그간 학자금으로 매년 40만~480만원을 받았고 내후년엔 1,400만원의 자립지원금도 나온다. 총 수령액 4,080만원.
생명보험은 판매 시점의 시장금리를 반영한 보험료를 받고 먼 미래에 확정된 보험금을 주는 장기 금융상품이다.
대개 판매 시점부터 10~30년이 지나야 보험금을 지급하므로 생존기간과 금리 흐름을 제대로 예측하는 게 중요하다. 장수연금에 가입한 92년 30세 남성의 기대여명(앞으로 더 생존할 것으로 예상되는 기간)은 43년. 그런데 통계청 생명표를 보니, 지난해 53세 남성 기대여명은 29년이다. 장수연금 설계 당시 예측에 비해 10년가량 더 사는 셈이다. 수명연장 속도로 볼 때 실제 생존기간은 더 늘어날 것이다.
1%대 저금리도 20여년 전에는 상상하기 어려웠다. 80년대 초 17~19%였던 1년 만기 정기예금 금리가 90년대 중반 8~10%로 반토막 나더니 지금은 1.3~1.6% 수준이다. 국내 생보사의 보험료 적립금 444조원 중 역(逆)마진이 생기는 확정금리형 상품은 197조원으로 45%나 된다.
생보사들이 연금보험 설계 때는 장수 리스크를, 교육보험은 금리 리스크를 간과한 셈이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저출산 고령화와 장기 불황에 따른 초저금리를 누가 예상할 수 있었으랴. 금리가 낮으면 보험사의 투자운용수익률도 떨어진다. 더욱이 경기 침체가 지속되면서 기존보험 해지는 늘어나고 신규 계약은 계속 줄고 있다. 보험금을 굴려서 버는 돈은 해마다 줄어드는데 가입자에게 줘야 할 이자는 비싸니 수익성이 좋을 리 없다. 요즘 생보사 주가가 연일 역대 최저치를 경신하는 이유다.
우리나라는 공적 시혜제도의 전통이 극히 취약하다. 복지에 대한 시민의식이 낮아 국가가 사회적 위험에서 국민을 보호하는 보편적 서비스를 실행하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사회적 합의기반을 언제 만들어 낼 수 있을지도 기약이 없다. 이런 가운데 보유계약 4,463만 건에 총자산 750조원 규모인 국내 생명보험은 가계 생활안정과 노후복지에 중추 역할을 해 온 제2의 사회안전망이다. 한국은 2040년 OECD에서 가장 늙은 국가가 된다. 생보업계 체력이 더 고갈되기 전에 정책당국이 세심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그나저나 죽을 때까지 장수연금을 무사히 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고재학 논설위원 goindol@hankookilbo.com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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