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인비의 새벽 선물 [김영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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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비의 새벽 선물

2016.08.25


골프를 끊은 지 꼭 13년이 지나갑니다. 교통이 혼잡한 주말, 수도권 골프장에 가려면 새벽잠을 설치고 밤이 돼서야 돌아왔습니다. 운동하는 시간도 길었지만 오고 가는 데에 진이 빠져 어느 때부터인가 낭비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진짜 필드에서 농작물을 가꾸는 재미에 흠뻑 빠진 탓도 있었을 것입니다.

공들여 마련했던 클럽을 지인에게 넘겨줄 때 광활한 초원에서 황홀한 무지개를 바라보며 모두 게임을 멈추었던 순간이 떠올랐습니다. 얼마 전에 에어콘 배관을 연결하려고 창고를 비우다 보니 아직도 드라이버와 퍼터, 7번 아이언이 하프백 속에서 녹슬고 있었습니다. 이것도 없애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골프를 다시 기억한 것은 한 번도 들어간 적이 없는 사우나의 불구덩이처럼 열기를 쏟아내는 폭서의 나날을 잊게 해준 리우올림픽 덕분입니다. 그간 태극 낭자들이 맹활약하는 LPGA 메이저 대회의 중계를 가끔 보았습니다. 10년 전쯤 한국 낭자들이 맹활약할 때 외국인은 영어 시험을 치르게 하자고 했다가 불발로 끝난 LPGA의 인종차별적인 구상도 떠올랐습니다. 장타가 일품인 미셸 위에게도 기대를 걸었는데 요즘엔 쑥 들어갔더군요.

그날 박인비 선수가 그리는 카리스마 넘치는 담대한 포물선과 롱 퍼팅 플레이에 쏙 빠져서 시청하다가 문득 창밖을 내다보니 불이 켜진 창이 많이 보였습니다. 그가 혹시 실수하지 않을까 조마조마했지만 금메달을 차지하여 한바탕 기뻐한 뒤 손연재 선수 출전을 기다리며 체조를 보다가 그만 잠이 들었습니다.

모든 운동이 그렇지만 골프는 특히 마인드 컨트롤이 잘 돼야 하니까 육체에 못지않은 단련이 필요하죠. 올림픽대회의 세계 정상급 선수들도 주말 골퍼들처럼 짧은 거리의 퍼팅이 실패했을 때는 실망의 빛을 감추지 못했고 성공했을 때는 엷은 웃음이 되살아나 이심전심의 기쁨을 갤러리와 함께 했습니다. 뚜벅뚜벅 걸어가는 박인비는 태극 마크를 달아 힘이 났다고 했죠. 큰일을 해내려고 경기 내내 거의 침묵을 지키는 그의 집중력이 돋보였습니다.

3라운드까지 66, 66, 70타로 11언더파를 기록하며 줄곧 리드를 지킨 박인비 선수가 4라운드의 날에 얼마나 타수를 줄일지 궁금했습니다. 이전 홀들에서 몇 번 공이 컵 주변에 멈춰 서 안타까움이 컸는데 18번 홀은 그의 강심장을 확인해주었습니다. 벙커에 2번이나 빠졌죠. 그러나 박인비는 돌처럼 굳세게 이븐파로 마무리해 16언더파로 116년 만에 부활한 올림픽 골프를 제패했습니다.

승리가 확정되자 박인비는 퍼터를 쥔 두 팔을 들고 만세를 부르며 환히 웃었죠. LPGA 메이저 대회 4개를 석권하고 올림픽까지 우승해 '골든 커리어 그랜드 슬램'을 거둔 그는 밤잠을 잊고 응원한 국민들에게 큰 선물을 했습니다. 오늘의 후배들의 정신적 지주가 된 박세리 골프 국가대표 감독이 눈시울을 적셨습니다. 박 감독은 1998년 7월 우리나라의 외환위기 시절 US여자오픈골프 플레이오프 연장 5라운드 18번 홀에서 발목을 걷어 올리며 물속에 서서 샷을 하는 투혼으로 우승을 차지해 국민의 절망을 잠시 잊게 해주었죠. 박인비는 수상 소감에서 “우승하여 애국가를 듣는 것은 처음이었다. 애국가가 울려 퍼질 때 울컥했다. 애국가는 최고의 노래였다”고 말했습니다. 그가 애국가를 따라 부르는 모습이 감동적이었습니다.

박인비의 새벽은 우리나라 정치권과 꼬락서니가 닮은 집요한 열대야를 잊게 한 시원한 감격이었습니다. 뉴질랜드 교민인 19세의 세계 랭킹 1위 리디아 고가 마지막 홀에서 버디를 기록해 1타 차로 중국의 펑산산을 누르고 은메달을 딴 것도 기뻤습니다. 공동 4위에 오른 양희영의 활약도 돋보였죠.

이렇게 올림픽에선 세계 8위로 국위를 선양했는데 최근 정권의 말기가 다가오면서 저주의 언어 프레임으로 ‘헬 조선’이니 ‘흙 수저론’이니 자조적인 말이 위세를 떨칩니다. 이런 말을 잘도 끌어대는 이상한 정치인들은 유엔 결의에 의한 총선거로 탄생한 대한민국의 건국을 타임머신으로 되돌리고 싶어 하지만 그들의 입으로 결코 깔아뭉갤 수 없을 만큼 우리나라는 경제로나 스포츠로나 매우 컸다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탈북자가 3만명에 육박하고 태영호 주 영국 북한 대사관 공사 같은 고위 인사가 그 대열에 동참하는 현실은 대한민국이 체제와 이념 경쟁에서 북한에 승리했다는 것을 웅변합니다. 그런데 이런 실상을 잊고 지방자치단체도 대북사업을 하게 해달라는 사람들은 국가와 상관없이 개별 플레이를 하고 싶어 합니다. 알량한 국가관과 세계관으로 뭘 하자는 건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과연 세계 각국의 정치인들이 참가하는 올림픽을 연다면 우리나라는 몇 등이나 할까요. 싸우다가 아예 출전조차 못할지도 모르죠. 민생이 최우선이라면서 빨리 만들라고 재촉하고 통과를 약속한 추경 예산안 일자도 무산시켰으니까요. 네티즌들 사이에서는 필리핀의 두테르테 대통령을 수입해야 한다는 소리도 나옵니다. 그만큼 우리 정치가 공동체의 이익에 최선을 다하고 있지 않고 이를 저해하는 행위에 대해 물러 터졌다는 불만의 소리가 큰 것입니다.

시대는 변했습니다. 낡은 투쟁의 행동방식은 그만 접고 미래지향적인 의식의 옷을 빨리 갈아입어야 국제경쟁에서 낙오하지 않을 게 아닌가라고 박인비가 우승한 새벽에 느꼈습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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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김영환

한국일보, 서울경제 근무. 동유럽 민주화 혁명기에 파리특파원. 과학부, 뉴미디어부, 인터넷부 부장등 역임. 우리사회의 개량이 글쓰기의 큰 목표. 편역서 '순교자의 꽃들.현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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