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서 기는 사람도 없구나! [정숭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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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서 기는 사람도 없구나!

2016.08.23


'알아서 하기’와 ‘알아서 기기’는 글자 한 자만의 차이가 아닙니다. 전자는 대부분의 경우 소신과 자율과 창의가 조화된 미덕이지만 후자는 어떤 경우이건 눈치 보기, 비굴, 아첨, 용렬(庸劣)이 지저분하게 섞인 악덕이자 모든 ‘간신’의 특성입니다. 알아서 하는 사람들은 조직원(국민)의 마음을 알고 하는 사람이며, 알아서 기는 사람은 윗사람의 마음만 알면 된다고 믿는 사람이라는 점도 중요한 차이입니다.

그래서 저는 조직을 지휘하는 사람에게 가장 큰 복은 ‘알아서 하는 사람이 많은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아래에서 모든 것, 그야말로 ‘아토즈(AtoZ)’를 해줘 종내에는 할 일이 없어 심심해진 끝에 머리가 이상해질지라도 그런 조직을 거느려 보고자 하는 윗사람은 지금 수도 없이 많다고 봅니다. 알아서 하는 사람이 많은 조직(국가도 당연히 포함되겠지요?)은 발전하는 조직이며, 그런 조직을 이끄는 사람은 행복에 겨워할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대통령도 지금은 그런 걸 원하시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주변에 알아서 하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는 것 같아서이지요. 가정용 전기요금 누진율 문제나 사드(THADD) 후보지 선정 문제처럼 민생 및 국가안보와 직결된 사안이 대통령 한마디에 뒤집어진 게 그 증거일 겁니다.

그런 일은 참 많습니다. “검토하지 않겠다” “전혀 그럴 계획은 없다” 등의 차갑고 완강한 수사(修辭)로 국민들의 간절한 소망을 거대한 장벽처럼 가로막고 섰던 사람들이 대통령 한마디에, 눈빛 한 줄기에 입장을 바꾼 경우가 말입니다. 올 4월 대기업집단 지정 기준을 완화할 때 공정위가 그랬고, 미세먼지 문제에 애꿎은 고등어구이를 식탁에서 끌어내리고, 경유에 세금을 올리는 걸 대책으로 내놓았던 환경부가 그랬습니다. 영남신공항문제, 춘천-속초 간 고속철 건설 추진방식을 놓고도 종전의 계획이나 대책이 휙 뒤집어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정권엔 알아서 하는 사람만 없는 것이 아니라, 알아서 기는 사람도 없는 것 같지 않나요? 위의 모든 사안이 대통령의 의중이 밝혀진 다음에 진행됐으니 말입니다. 알아서 기려면 먼저 대통령의 마음을 알아야 하는데 그분이 말씀이나 눈빛으로 지시(혹은 지시 비슷한 것)를 한 다음에서야 기었으니 알아서 긴 것도 아닌 것 아닌가요? 이런 의문은 ‘그 사람들이 뭐든 아는 것이 있기나 하겠어?’라는 또 다른 의문을 불러오는 걸 막을 수 없습니다.

19세기 영국 빅토리아 여왕 때 두 번이나 총리를 지낸 벤저민 디즈레일리는 ‘알아서 잘 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인도 병합 등 소위 대영제국 - '해가 지지 않는 나라'의 초석을 놓은 그는 여왕의 마음을 얻는 솜씨가 뛰어났다고 합니다. 듣기 좋은 아부와 신사도의 전형이라 할 몸짓과 매너, 그리고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기막힌 언변에 여왕은 언제나 흡족한 마음으로 그의 구상에 윤허(允許)를 내렸다는 거지요. 디즈레일리는 “여왕의 총애를 받는 비결이 뭐냐”는 친구의 질문에 “언제나 그녀를 여성이라고 생각한다네”라고 말했답니다.
 
그의 정적은 윌리엄 글래드스턴이었는데 이 사람도 역사에 나름 길게 기록된 사람이니 ‘알아서 잘 한 사람’이었던 모양입니다. 다만 그는 디즈레일리처럼 여왕을 여성으로 대하지 않았는지 여왕이 이렇게 말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글래드스톤과 밥을 먹고 나면 그 사람이 세상에서 제일 똑똑한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디즈레일리와 밥을 먹고 나면 내가 세상에서 제일 똑똑한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어.” 디즈레일리는 글래드스톤에게 총리 자리를 내주게 되었지만 여왕은 결국 그의 건방짐과 오만에 역정을 내면서 디즈레일리를 다시 총리에 앉혔다고 합니다.

글래드스턴이건 디즈레일리건 우선은 ‘알아서 하는’ 사람이, 밥 함께 먹으며 소신을 창의적으로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들이 대통령 주변에 많으면 좋겠는데, 그런 사람은 물론이고 알아서 기어주는 사람조차 없으니, 간신조차 없으니 …. 대통령이 불쌍하고 그런 대통령을 보고 있는 국민들이 불쌍하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알아서 기기’에 대해서는 콜롬비아의 위대한 작가 마르케스가 1982년 노벨문학상 수상작인 ‘백년의 고독’에서도 표현한 바 있습니다. “그의 명령은 채 시달되기도 전에, 아니 그가 어떤 명령을 내릴까 생각하기도 전에, 이미 수행되었고, 항상 그 명령이 미칠 것이라 생각되던 범위보다 훨씬 더 멀리까지 미치곤 했다.”

바로 다음 줄은 “그는 무한한 권력의 고독 속에서 길을 잘못 들어 방향 감각을 잃어가기 시작했다”입니다. ‘권력자가 방향 감각을 잃으니 사람들도 방향 감각을 잃어버렸다. 따라가고 싶어도 못 따라갔다’는 의미의 문장은 생략된 것 같습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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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정숭호

1978년 한국일보 입사, 사회부 경제부 기자와 여러 부서의 부장, 부국장을 지냈다. 코스카저널 논설주간, 뉴시스 논설고문, 신문윤리위원회 전문위원 등 역임. 매주 목요일 이투데이에 '금주의 키워드' 집필 중. 저서: '목사가 미웠다'(2003년), '트루먼, 진실한 대통령 진정한 리더십'(201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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