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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와 애국가에 대한 사랑을
2016.07.25
40년도 넘은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많지 않은 유학생들이 옹기종기 학교 촌에 모여 살던 때, 종강이 되었거나 무슨 날이면 뭉쳐서 '비목 '선구자’같은 노래를 목청껏 부르고 했습니다. 그러다 누군가가 군대 다녀온 이야기를 하면 한국 남자면 누구나 아는 군대생활이지만 여성인 내게도 흥미롭고 어떤 때는 폭소를 하곤 했습니다. 그러다 새벽녘이 되어 지칠 때쯤이면 애국가를 합창하기도 했던 것은 지금도 가슴이 저리는 추억입니다.요즘 시대와 같지 않아 유학 가기가 아주 어려웠습니다. 유학 가려면 문교부 유학시험에 일단 합격해야 했으며 토플 시험을 본 후 외국 대학에서 입학허가를 받더라도, 한국 주재 미국 영사관의 영사와의 인터뷰, 서류 심사, 그리고 재정보증 심사가 통과되기도 쉽지 않았던 것입니다. 가난했던, 대한민국의 위상이 별로였던 시대여서 몇 퍼센트 안에 드는 대한민국의 엘리트들도 미국 유학은 그렇게 어려웠던 것입니다.어느 날 미국 TV를 보고 있는데 갑자기 한국에 대한 뉴스가 등장했습니다. 태극기가 선명하게 스크린에 비치자 앉아 있던 남편이 벌떡 일어나더니 오른손을 왼쪽 가슴에 얹고 경건하게 태극기가 사라질 때까지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러더니 앉아 있던 내게도 빨리 일어서서 태극기에 대한 경례를 안 한다고 야단을 하였습니다. 좀 쑥스럽기도 하였지만 나도 일어나 손을 얹었습니다. 미국에서 대학원을 마치고 박사과정을 하고 있던 남편은 항상 대한민국에 다시 전쟁이 난다면 언제든지 공부를 그만두고 조국의 전선에 서겠다고 내게 공언을 했던 사람입니다.
작년 봄부터 손녀가 이곳에서 나와 함께 잠깐 살았는데 가을이 되자 120년 전에 설립된 이 근처의 가톨릭 초등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토론토에서 떨어진 시골이어서 아주 평화롭고 아름다운 전원에 있는 학교였습니다. 학생 수도 많지 않은 데다 학교 교사들도 무척 친절하여 손녀는 무척 행복한 학교생활을 하였습니다. 물론 나는 아침저녁으로 손녀를 자동차로 등하교시키고 공부 시키느라 고생은 많이 했었지만 손녀의 아름다운 추억을 위해서는 그 고생이 대수롭지 않았던 것입니다.특히 손녀는 학교생활과 이 단지에서 열린 캐나다 데이(캐나다 독립 기념일) 퍼레이드를 즐겼으며 학교 입학 전부터 캐나다 국가를 썩 잘 불렀습니다. 그러다 학교를 다니던 어느 날 손녀가 캐나다 국가를 불어로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캐나다는 영어 불어를 공용어로 쓰기 때문에 학교에서도 영어뿐 아니라 불어 국가를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아이는 학교에 불과 1학년 한 학기 다니는 동안 영어 불어 국가를 능숙하게 부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나는 캐나다에서 학교에 다닌 적이 없어 어떻게 영어뿐 아니라 불어로 된 캐나다 국가를 잘 부르느냐고 손녀에게 물었습니다. 손녀의 대답은 매일 아침 수업이 시작되기 전 교실에서 학생 전체가 기립하여 영어와 불어로 두 번 캐나다 국가를 부른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나는 감탄했습니다. 아침마다 초등학생들이 영어 불어로 두 번이나 국가를 부른다는 것까진 상상을 못했던 일입니다.
지난 7월 1일은 캐나다 데이(캐나다 독립 기념일)였습니다. 55세 이상인 사람만 거주하는 이 단지의 퍼레이드는 즐겁고도 아름답습니다. 단지에 사는 토박이 캐나다 할머니 할아버지의 자손들까지 몰려와 그날 하루를 즐깁니다. 모두 캐나다 국기를 상징하는 빨간 단풍나무색과 하얀색으로 통일된 옷을 입고 단지를 한 바퀴 행진한 후, 클럽 하우스 앞에 모여 점심과 오락을 하고 오래 전해 내려온 캐나다인들의 노래를 부릅니다. 한국으로 말한다면 ‘오빠생각’ 이나 ‘반달’ 같은 노래가 아닌가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두 일어서서 캐나다 국가를 부르고선 그날의 퍼레이드가 막을 내립니다.캐나다인 토박이들은 미국인들의 성조기와 국가에 대한 충성 못지않게 캐나다 국가와 국기에 대한 사랑이 대단합니다. 평상시에도 이런저런 장소에 캐나다 국기가 게양되어 있습니다. 우리 단지 안에도 항상 국기를 달아놓은 집들이 있습니다. 요즘 정착한 이민자들과는 많이 다른 것 같습니다. 나 역시도 캐나다 시민이지만 대한민국에 대한 애착은 끝이 없습니다. 물론 해외 공항에서 캐나다 국적기 ‘에어 캐나다’를 보면 매우 반갑지만 그래도 ‘코리안 에어’를 보는 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캐나다 국적기를 보면 이제 집으로 가는구나, 하는 귀향에 대한 안도감이 있다면 태극기 문양이 있는 한국 국적기를 보면 그만 애잔해집니다. 가슴 한 귀퉁이가 서늘하고 뭉클하기도 합니다. 마치 늙으신 부모를 두고 온 이민자의 슬픔과 같은 색깔일 것입니다.
한국의 초등학교는 매일 열리던 조례는 없어졌고 손녀가 다니던 학교처럼 매일 애국가를 부르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학교 재량에 따라 일주일에 한 번, 한 달에 한 번 부른다는데 매일 부르진 않더라도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부르게 하는 게 바람직하지 않을까요. 국가에 대한 존경과 사랑은 어렸을 때부터 교육시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에 갈 때마다 태극기를 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서울에서건 지방에서건 단 한 번도 태극기를 보지 못했습니다. 심지어는 태극기를 세종로에 설치하자는 의견에 반대한 사람들에 대한 뉴스에 실망했습니다. 세종로에 설치된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의 동상도 중요하지만 지금의 대한한국을 상징하는 태극기가 더욱 중요한 건 아닌지요. 외교사절뿐 아니라 관광객들을 자주 맞게 되는 세종로야말로 태극기가 힘차게 휘날려야만 할 곳이라고 생각합니다.그러나 그보다 더한 것은 어느 여론조사에 한국에서 전쟁이 나면 한국을 떠나겠다는 사람들이 매우 많다는 걸 읽고서는 깜짝 놀랐던 것입니다. 특히 젊은 세대들에게 그런 경향이 많았기에 그들의 조국애가 걱정스러웠습니다. 이민 와서 캐나다 시민이 된 내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모국에 대한 사랑만은 뜨겁습니다. 나만이 아니라 누구든 이민 와서 살면 모두 그럴 것입니다. 8월 15일 광복절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날 하루뿐 아니라 항상 태극기와 애국가에 대한 사랑이 캐나다인 못지않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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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오마리
미국 패션스쿨 졸업, 미국 패션계에 디자이너로 종사.현재 구름따라 떠돌며 구름사진 찍는 나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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