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섭, 백년의 신화’ 전(展)을 보고 [정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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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 백년의 신화’ 전(展)을 보고

2016.07.22


얼마 전 덕수궁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이중섭 특별전을 보고 나서 이중섭 작품들이 주는 감동에 더하여, 전시에서 나름대로 보고 느낀 것을 적어볼 생각을 했습니다. 막상 글을 쓰려고 보니 미술 전문가도 아닌 사람이 국민적으로 큰 주목을 받는 전시에 관해 글을 쓴다는 게 무모할 뿐더러 결국엔 허망한 이야기가 되고 말 것 같다는 생각에 단념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당시에 떠올랐던 전시에 대한 상념들이 쉽사리 머릿속을 떠나지 않아서 일단 정리를 해보기로 했습니다. 너무나 유명한 화가에 대해 비전문가가 쓰는 글이니 전문가의 입장에서는 가관이라고 할지도 모른다는 각오를 하고서입니다.

첫째, 이중섭 탄생 100주년을 맞는 기획전인 만큼 전시 내용이 풍부하고 구성이 훌륭하여 관람객의 한 사람으로서 전시 주최자(국립현대미술관, 조선일보, 서귀포 이중섭미술관)에게 감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서귀포 시민으로서 지역 미술관이 이 큰 행사에 한몫을 했다는 데에도 뿌듯함을 느낍니다. 이전에도 여러 차례 이중섭 전시가 있었지만 국가의 대표적인 미술기관이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이중섭 전시를 개최한다는 것 또한 의미가 적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계의 권위자들이 힘을 모아 상당 기간 준비하였음을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근래에 고갱이나 모딜리아니 등 세계적인 화가들의 전시가 우리나라에서 열려 우리의 예술적 향수(享受)를 풍요롭게 해준 것도 고맙지만 국립현대미술관측이 우리 근현대의 뛰어난 화가들을 집중적으로 조명함으로써 우리 예술가들을 더 잘 알 수 있도록 노력해오고 있는 것에 더욱 찬사를 보내고자 합니다.

둘째로, 화가에 대한 평가에 관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화가를 평가하기 위해서는 일단 작품이 많아야 하는데 이중섭은 작품을 많이 남기지 않았다고 지적하면서 그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에 대해 다소 유보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중섭의 작품 대부분이 그가 원산을 떠나 남한으로 내려와서 1956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5년 여의 기간에 그린 것으로서 수백 점이 되는 이 작품들의 양이 적다고는 할 수 없으며 더욱이 예술의 세계에서 작품의 양이 그 작가를 평가하는 기준이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억압과 분단, 그리고 전쟁의 비극에 놓였던 이중섭의 시대가 그렇지만 당시 화가 개인이 처한 상황도 열악하기 그지없었습니다. 그로서는 지낼 곳이 불안하고 굶주림을 해결하기도 어려웠으며 화구와 재료도 절대 부족한 형편이었습니다. 그나마 단란하던 가족을 떠나보내야 했던 비극적인 상황에서 오로지 예술에 대한 열정과 가족에 대한 사랑만으로 삶을 지탱했던 사람이었기에 그런 감동적인 작품들이 나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르토메우 마리(Bartomeu Mari) 국립현대미술관 관장도 이중섭이 “한국전쟁 중 그리고 전쟁 직후의 가난하고 짧았던 생애 동안 이토록 왕성한 작품 활동을 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라 하고 있습니다.

셋째로, 이중섭 특유의 은지화에 관한 것입니다. 은지화는 300여 점을 그렸다고 알려져 있지만 전시에는 수십 점만 출품되었습니다. 조명을 비롯한 전시 기법 때문인지 은지화 하나하나가 마치 은판(銀板) 위에 새긴 듯하였습니다. 저는 막연히, 이중섭이 그림 그릴 재료가 없어 담뱃갑 속의 은박지에다가 못이나 송곳 같은 것으로 드로잉을 한 것으로 생각했었습니다. 그게 아니라 이중섭은 일찍부터 청자의 상감(象嵌)기법을 연상케 하는 은지화 그림을 고안, 제작해 왔다고 하며 나중에 이 은지화들을 바탕으로 벽화를 그리고 싶어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만일 그가 더 오래 살아서 그처럼 벽화에 대한 꿈을 이루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은지화의 주제인 가족과  아이들에 대한 사랑과 함께, 게, 물고기, 새, 나비, 꽃, 복숭아 등 친근한 동식물들로 이루어진 거대한 벽화! 그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어떠한 벽화보다도 더 인간적이어서 우리의 삶에 많은 시사를 줄 수 있었을 것이라 상상해봅니다.

넷째로, 가족과 다시 만날 수 없다는 절망에 무너지고 종내에는 병고에 시달리면서 생을 마감할 즈음에 그린 그의 작품들이 새롭게 눈에 띄었습니다. '황소'나 '흰 소' 그림들이 주는 힘, 분노, 열정 등과는 반대로 약하고 슬퍼 보이는 '회색 소'도 그렇고  ‘서귀포의 환상’이나 ‘길 떠나는 가족’에서 보는 환희와는 달리 암울하기만 한 ‘돌아오지 않는 강’ 연작들도 그렇습니다. 생전에 그의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후견인과도 같은 시인 구상은 이중섭에 대해 “나는 이토록 삶과 예술이 일체되는 예술가를 본 적이 없다”고 했다는데 이중섭의 모든 작품이 곧 그의 인간, 그의 삶을 나타냈다면 생의 마지막에 그린 이런 작품들도 예외가 아니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끝으로 이번 전시에 관해 한 가지 덧붙인다면, 왜 전시 제목이 ‘이중섭, 백년의 신화’인가 하는 것입니다. 전시도록에서 그 설명을 찾고자 했으나 어디에도 이에 관한 언급은 없었습니다. 극도로 어렵고 힘든 시절의 삶과 사랑을 절절하게 녹여낸 이중섭의 예술과 그의 파란만장한 삶을 ‘신화’로 표현함은 받아들이고도 남지만 ‘100년의 신화’는 논리적이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그 100년이 생전 40년과 사후 60년을 합한 것일진대, 이중섭의 신화에 어떤 시기를 정할 수도 없으려니와 그 신화가 딱히 100년에 한정될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전시도록 머리말의 영문본은 전시 제목을 '한국의 거장 이중섭 탄생 100주년(The 100th Anniversary of Korean Modern Master: Lee Jung-Seob)이라 해서 자연스러운데 왜 ‘신화’라는 말을 그 자리에 넣어 어색한 느낌이 들게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차라리 ‘이중섭의 신화: 탄생 100주년 기념 특별전’이라 했으면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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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정달호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후 줄곧 외교관으로 일했으며 주 파나마, 이집트대사를 역임했다. 은퇴 후 제주에 일자리를 얻는 바람에 절로 귀촌을 하게 되었고, 현재 제주평화연구원 객원연구위원으로 있으면서 한라산 자락에 텃밭과 꽃나무들을 가꾸며 자연의 품에서 생활의 즐거움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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