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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투표는 만능 열쇠인가
2016.07.14
제20대 국회가 출범하고 한 달 반 정도가 지나면서 새삼 선거의 가치와 효용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여야 정당의 움직임을 살펴보면 벌써부터 잘못됐다고 여겨지는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의원 특권 내려놓기 공약이 흐지부지될 조짐인데다 자격 미달인 의원들도 서서히 정체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해 볼 도리가 마땅치 않습니다. 선거가 유권자들에게 멍에를 씌운 것이나 다름없습니다.투표 제도가 민주주의 최고의 발명품이라고 하지만 유권자들이 반드시 사회 전체의 이익과 미래를 내다보고 한 표를 행사하지는 않는다는 것이 취약점입니다. 설령 국가적으로 손실이 끼쳐진다고 해도 당장 자신에게 이익이 된다면 선뜻 찬성하게 되는 투표 행태를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후보가 누구인지 잘 모르면서 기표한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 총선을 치르고 텔레비전 개표 방송을 지켜보면서 ‘유권자의 승리’라며 환호했던 도취감이 슬며시 부끄러워지기도 합니다.우리만의 얘기가 아닙니다. 최근 브렉시트(Brexit) 결정 이후 펼쳐지는 영국 사회의 모습을 바라보면서도 비슷한 의문이 생겨납니다. “선거나 투표가 과연 최선일까”라는 질문입니다. 국가와 국민에게 부정적인 결과로 나타날 것으로 판단되는 경우에도 투표를 실시해야 하며, 또 그 결과를 수용해야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투표로 국민의 대표자를 뽑고 국가가 나아갈 방향을 정하는 민주주의 체제에서 미련하고도 쓸데없는 질문이라고 하겠습니다.하지만 국민투표에 의해 유럽연합(EU) 탈퇴가 결정되고부터 영국에 불어닥치는 이상 기류는 바깥에서 바라보기에도 불안하기만 합니다. 파운드화 급락으로 경제가 혼란에 빠졌고, 스코틀랜드가 다시 독립 추진 움직임을 나타내는 등 내분 현상까지 불거지는 양상입니다. 내각 교체에까지 이르렀습니다. EU 탈퇴가 영국의 오랜 염원이었다고 해도 그런 부작용까지 내다보지는 못했을 겁니다. 새로 등장한 메이 총리가 수습을 잘 하느냐의 여부는 또 다른 문제입니다브렉시트 찬반 재투표를 실시하자는 청원이 400만명을 넘어선 데서도 투표 결과가 잘못됐다는 영국 국민들 스스로의 낭패감을 읽을 수 있습니다. 독일이나 프랑스도 영국의 유럽연합 잔류에 더 이상 미련이 없다는 듯 “어서 빨리 이삿짐을 빼라”며 성화가 대단합니다. 투표가 한두 사람의 생각보다는 여러 사람의 의견을 모아 집단사회의 공동이익을 이뤄나가는 방법이지만 이처럼 예기치 못한 ‘투표의 역설’이 존재하기 마련입니다.며칠 전 실시된 일본 참의원 선거 결과에 대해서도 비슷한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집권 자민당과 더불어 개헌을 주장하는 여권 정당들이 나란히 승리를 거둠으로써 평화헌법을 개정할 수 있는 문턱에 이르렀다는 점 때문입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가 주장해 왔다시피 군대 보유와 무력행사를 금지하고 있는 현행 헌법 9조 조항이 개정된다면 일본은 다시 재무장을 통해 ‘전쟁할 수 있는 나라’로 탈바꿈하게 되는 것입니다.물론 일본 유권자들이 전쟁을 원하기 때문에 아베 총리의 손을 들어준 것은 아닐 것입니다. 불확실한 세계경제 여건에서 지금의 아베노믹스 외에 다른 대안이 없다는 생각에서 초래된 결과라는 분석이 유력합니다. 헌법 개정에 대해서는 오히려 부정적인 의견이 많다는 얘기도 전해집니다만 결과적으로 개헌을 밀어붙일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된 것이 현실입니다. 브렉시트가 사전 예상과 달리 그대로 통과됐다는 점에서 일본에서도 막상 개헌안이 발의된다면 여론이 어떻게 움직일지 장담하기가 어렵습니다.국민들이 선동에 능한 정치인에게 휘둘리기 쉽다는 점도 투표의 또 다른 문제점입니다. 유권자들이 아무리 나름대로 판단력을 지니고 있다 해도 감정과 본능에 호소하는 화려한 언변에 무너지는 것이 순식간입니다. 미국 대통령 선거에 나선 트럼프가 일반의 예상을 비웃듯이 공화당 후보로 선출된 것도 도발적인 기질에 힘입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최근 성인들에게 월 2,500 스위스프랑(약 300만 원)의 기본소득을 보장하는 방안을 국민투표에서 부결시킨 스위스 국민들의 민도가 높이 평가받는 이유입니다.다시 눈길을 국내로 돌려본다면 미사일 방어체계인 사드(THAAD) 배치 논란이 새로 불거지면서 국민투표를 실시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제기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국민적 갈등이 불거졌다고 해서 모든 문제를 투표로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결국 국민투표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올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정치 지도자들의 리더십이 먼저입니다. 서로의 입장에 따라 엇갈리기 쉬운 각계 의견을 설득하면서 하나로 모아가는 역할입니다.영국의 브렉시트 국민투표가 정치인들의 넘치는 공명심에 의해 실시됐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갈등을 조정한 것이 아니라 되레 키운 것입니다. 설사 그 결과가 유럽연합 잔류로 결정됐다고 해도 분열상이 노출됐을 가능성은 다분합니다. 국민투표가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만능 열쇠는 아닙니다. 브렉시트 결정 이후 혼란을 겪는 영국에서만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똑같이 해당되는 일입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이 칼럼을 필자와 자유칼럼그룹의 동의 없이 상업적 매체에 전재하거나, 영리적 목적으로 이용할 수 없습니다.
필자소개
허영섭
이데일리 논설실장. 전경련 근무. 경향신문과 한국일보에서 논설위원 역임. 미국 인디애나대학 저널리즘스쿨 방문연구원. '일본, 조선총독부를 세우다, '대만, 어디에 있는가', '영원한 도전자 정주영'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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