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독립기구서 갈등조정 주도… "막혔던 공항고속철 길 뚫어"
[신공항 후폭풍]국책 사업 추진 방식 바꾸자
“정부도,
국책연구기관도 믿을 수 없다.
‘공정한’ 외국 기관에 판단을 맡기자.”
10년을 끌어온 영남권 신공항 문제가 사실상의 ‘김해신공항’으로 일단락됐지만 여전히 씁쓸한 뒷맛을 남기고 있다.
출처 CNDP
https://www.debatpublic.f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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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적으로 외국 민간기관인 파리공항공단엔지니어링(ADPi)이 대한민국 국책사업을 결정해준 꼴이 됐기 때문이다.
이는 구체적인 검토 없이 표심만 노리고 선심성 공약을 남발한 정치권, 국책사업을 ‘선물’로 생각하고 유치에 목맨 지방자치단체, ‘대선 공약’이라는 이유로 일단 밀어붙이거나 갈등조정 기능을 포기한 정부가 만든 합작품이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소모적인 논란이 반복되지 않도록 국책사업을 계획·선정할 때
△충분한 논의를 거치고
△사전에 합의된 룰을 통해 입지를 선정하며
△비용과 혜택을 함께 부담하는 방식으로 국책 사업의 틀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고 강조한다.
충분한 토론을 통한 사업 결정
프랑스는 2002년 샤를 드골 국제공항에 공항고속철도를 건설하는 계획을 둘러싸고 진통을 겪었다. 지역주민과 환경단체 등의 반발로 사업이 무산될 위기에 몰린 것이다. 대안을 찾아내 사업을 살려낸 것은 프랑스의 갈등관리 전담기구인 ‘국가공공토론위원회(CNDP)’였다. 1997년 설립돼 2002년 독립기관으로 승격한 CNDP는 원자력발전, 고속도로, 철도, 항만, 공항, 댐 등 대규모 국책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기 위한 공공토론 절차를 진행한다.
CNDP는 2003년 1월 갈등 해결을 위한 개입을 결정하고 8월부터 넉 달간 23번의 공공토론회를 열었다. 지역주민과 환경단체, 전문가, 사업 시행자가 모두 참여해 사업의 부작용을 해결하기 위한 다양한 대안을 논의했다.
논의 결과 사업을 백지화하기보다 논란이 된 일부 구간의 기존 철로를 손질해 사용하는 식의 대안을 찾아내 2005년부터 고속철도 사업을 추진하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갈등도 풀고 예산도 당초 6억6000만 유로(약 8600억 원)에서 2억 유로(약 2600억 원)로 줄일 수 있었다. 네덜란드에서도 국가 도로사업, 토지이용, 주택건설 등과 같은 사업을 결정할 때 국가개발보고서(PKB) 작성을 의무화하고, 이 과정에서 시민들을 참여시키고 있다.
박태순 사회갈등연구소장은 “영남권 신공항 사태에서 보듯 국가기관에 대한 신뢰가 없어 외부에서 신뢰를 끌어오는 상황”이라며 “국회 내에 갈등조정위원회를 설치해 국책사업을 충분히 논의한다면 국가 정책 결정의 신뢰성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사전에 룰 정하고 깨끗하게 승복
2008년 경북도청 이전 후보지 선정은 투명한 입지선정을 통해 갈등을 최소화한 사례로 꼽힌다. 2007년 5월 경북 23개 시군의 자치단체장과 의회 의장이 모여 “조례에서 정한 방법과 절차에 따라 공정하게 결정될 수 있도록 협력하고, 결과를 깨끗이 수용한다”고 합의한 뒤 입지선정 절차를 진행했다.
2008년 1월부터 주민설명회 등을 통해 일반적 입지기준, 평가단 구성, 평가방법, 가중치 등에 대해 합의하고 이전 후보지를 공모했다. 평가단은 23개 시군에서 1명씩 추천하고, 나머지 60명은 대구경북과 연고가 없으면서 최근 2년간 지역의 용역·자문 활동을 한 적이 없는 전문가들로 구성했다. 2008년 6월 평가위원들의 현지실사를 통한 평가 결과 안동·예천이 선정됐고, 나머지 10개 시군은 잡음 없이 결과에 승복했다.
전형준 단국대 분쟁해결연구센터 교수는 “영남권 신공항 결정 과정에서 정부가 김해공항 포화 문제 해결, 영남권 항공 수요 충족 중 무엇이 시급한지 정책적 결정을 내린 뒤 평가기준에 대해 합의부터 하고 추진했다면 갈등을 줄일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수혜자가 비용 함께 부담
국책사업의 수혜자가 비용도 함께 부담하고 사후평가까지 해야 무분별한 지역개발 사업을 막을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프랑스는 1980년대부터 국가와 지자체가 주요 국책사업을 추진할 때 사업비를 분담하는 ‘계획계약(contracts de plan)’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항공 바이오 등의 ‘경쟁거점(경쟁력 클러스터)’ 사업이 대표적이다. 2005∼2007년 중앙정부가 4억6900만 유로(약 6100억 원)를 지원했고, 지자체가 2억2800만 유로(약 3000억 원)를 부담했다.
한국도 이를 모델로 2004년 ‘국가균형발전특별법’ 20조에 ‘지역발전투자협약’을 도입했다. 국가와 지자체, 또는 지자체 간 사업을 공동으로 추진하기 위해 사업 내용 및 투자 분담 등이 포함된 협약을 맺을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지만 제대로 활용되지 않고 있다.
박진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는 “현재의 국책사업은 중앙정부가 지방에 선물을 나눠주는 성격이 강하다”며 “선호시설을 받는 지역이 비용의 상당 부분을 부담하도록 해야 선물을 달라는 식의 인식과 태도가 바뀔 것”이라고 말했다.
김재영 기자 redfoot@donga.com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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