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직장’ 지방이전, 이사갈 때 “저 못 갑니다”

카테고리 없음|2016. 6. 16. 21:20


살던 곳 만큼 생활 기반 안돼 있어 불편

한곳에 안주하는 한국 사람들 습성도 한몫


   #한국수력원자력의 차장이었던 A씨는 지난해 초 서울에 있는 대학 교직원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참고자료] 진주혁신도시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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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이들이 부러워하는 공기업을 포기한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A씨는 한수원이 2012년 경북 경주로 이전한 이후 평일은 경주, 주말은 서울을 오가는 생활을 했습니다. 가족과 함께 경주로 이사할 생각도 있었지만, 중학생 딸이 학교를 옮기고 싶어 하지 않았고, 다닐 만한 학원이 마땅치 않았습니다. 서울을 오가며 두 집 살림하는 비용이 꽤 컸습니다. 경주 생활도 엉망이었습니다. 2년 가까이 버티다 결국 지난해 서울에서 일자리를 구하곤 사직서를 냈습니다. 


#경기도 성남에 살던 B씨 가족은 올 초 경남 진주혁신도시로 이사했습니다. 국내 최대 공기업인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B씨의 직장입니다. 지난해 LH 본사가 진주로 이전할 때만 해도 주말부부로 지낼 생각이었습니다. 아내와 유치원·초등학생인 아이들에게 낯선 생활을 요구하기가 미안했거든요.


쉽지 않았습니다. B씨 부부는 “아이들이 어리니 일단 진주에서 살아보자”고 맘을 모았습니다. B씨는 “난 직장 내 인간관계가 있지만, 나 때문에 덜렁 따라온 아내와 아이들은 외롭고 불편한 것 같아 여전히 고민”이라고 토로합니다.


지방으로 간 신(神)의 직장들

공공기관, 즉 공기업은 신의 직장이라고 부를 만큼 부러움 받는 일터죠. 각종 사내 복지나 급여 수준은 좋은데, 민간 기업보다 경쟁은 덜하고 공무원 못지않게 안정적이라는 이유입니다.


요즘은 사정이 많이 다릅니다. 공기업의 복지나 성과급이 지탄의 대상이 되면서 정부는 공공기관 ‘정상화’를 외쳤습니다. 혜택이 상당히 줄었습니다. 성과연봉제도 도입됐습니다.


지방 이전은 치명타였습니다. 정부는 2005년 국가균형발전을 위해 자립형 혁신도시를 건설하기로 하면서 공공기관 이전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공공기관 107곳을 지정해 10개 혁신도시와 세종특별자치시 등 전국 각지로 옮기도록 했지요. 지난해 말까지 모두 87곳의 공기업이 이전을 마쳤습니다. 공기업 직원이야 국가균형발전이라는 정부 정책에 기꺼이 따르겠지만, 가족까지 함께 삶의 터전과 방식을 송두리째 바꾸기가 만만치 않다고 합니다.


5명 중 1명 “못 갑니다”

국회예산정책처는 최근 공공기관 지방이전사업 평가 보고서를 발간했습니다. 보고서에 따르면 정부는 공공기관 이전으로 3만9195명의 직원이 지방으로 옮겨갈 것으로 계획했습니다. 그런데 지난해 말 기준 실제로 기관을 따라 지방에 간 직원 수는 3만2355명으로 계획의 82.6%에 그쳤습니다. 회사를 그만두는 경우가 속출했기 때문입니다.


보고서에 따르면 공공기관 이전 대상 직원 중 22.8%가 최근 3년간 퇴직했습니다. 정년퇴직했거나 해고당한 사람을 제외한 자발적 퇴직자만 그렇습니다. 취업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인 시대에 ‘신의 직장’에서 직원 4∼5명 중 한 명이 스스로 그만두는 일이 벌어진 셈입니다.


배부른 선택이라고만 하긴 어렵습니다. A씨처럼 가족들이 함께 이사하기 힘든 처지가 적지 않습니다. 가족과 함께 이주한 직원들은 26.6%에 불과합니다. 낯선 생활환경이나 교육·문화 여건 등이 아무래도 불편하게 느껴졌죠. 혁신도시라는 곳도 아직 완성되려면 멀었고요. 여건이 다 갖춰지지 않았는데 무조건 가족도 함께 내려가라고 떠밀 수 없는 노릇이지요. B씨는 얼마 전 아이가 아픈데 마땅한 병원을 찾지 못해 고생했습니다. 예산정책처는 “중앙정부와 지자체의 지원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직원이나 가족 동반 이주율이 낮아졌다”고 콕 찍어 지적했습니다.


맞벌이인 경우에는 주말부부가 불가피합니다. 맞벌이를 하는 워킹맘 C씨는 전남 나주혁신도시로 이전한 회사를 따라 홀로 내려갔습니다. 주말마다 남편과 중학생 아들이 있는 서울로 갑니다. 남편의 직장이 서울에 있어 함께 사는 건 불가능했습니다.


팍팍한 서울보단, 언젠가는…

시간이 가면 지방혁신도시의 삶이 나아지리라는 기대도 있습니다. 내년 전주혁신도시로 이전하는 공공기관에 입사한 D씨는 “당분간은 주말부부를 할 계획이지만, 남편도 전주혁신도시로 직장을 옮길 기회를 찾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혁신도시도 점점 좋아지지 않겠어요? 길게 봐도 팍팍한 서울에서 사는 것보다 전주에서 여유 있게 아이를 키우며 사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지방의 청년들에게는 고향에서 일할 만한 일자리가 늘어난 셈이니 그 지역에서 계속 살아갈 이유도 늘어난 셈이지요. 앞서 비슷한 경험을 한 이들의 얘기도 도움이 될 것 같네요. 다름 아닌 세종시에서 근무하는 정부부처 공무원들입니다. 2012년 말 처음 내려갔던 기획재정부의 한 공무원은 이렇게 말합니다.


“4년 전과 달리 지금은 꽤 살 만한 도시가 됐습니다. 업무 때문에 서울 출장이 많은 게 단점이라면 모를까 교육 환경은 아주 좋아졌어요. 대전에서 세종으로 이사를 온다고 할 정도니 말 다했죠. 결국 각 혁신도시를 얼마나 살 만한 도시로 가꿔나가느냐가 중요한 것 아닐까요.”

조민영 윤성민 기자 mymin@kmib.co.kr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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