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으로 하늘을 가리는 세상 [박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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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으로 하늘을 가리는 세상

2016.06.14


고등학교 때 줄곧 전교 1등만 했고 서울대에 입학한 후, 그 어렵다는 재경직 행정고시를 통과해서 산업자원부에서 잔뼈가 굵은 동창이 있습니다. 어느 날, 밤 12시가 되어 퇴근하는 길에 상주(喪主)인 필자를 조문(弔問) 왔을 때, 입술이 부르튼 초췌한 모습에 되레 걱정이 되어,

“넌 이사관이 되어도 쉴 틈 없이 일만 하니?”라고 묻자,

“일이 너무 많아서 청사 근처에서 잘 때도 있다. 마누라는 몸 버리지 말고 지금이라도 그만두라고 한다. 그만두고 나오면 마누라야 좋겠지, 돈은 많이 벌 테니까. 그래도 끝까지 버텨 보려고…”

소주잔을 들이키며 한숨 섞인 대답을 하는 친구의 모습에서 왠지 모를 처연함 속에 대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 친구 역시 당장 그만두면 로펌이나 기업체에 스카우트되어 그 말 많고 탈 많은 ‘관피아’의 일원으로 지금 받는 봉급의 몇십 배를 받으며 처자식 호강시키며 그간의 노고를 보상받을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초심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며 그 친구가 주변의 유혹을 이겨내고 명예를 지키는 선량한 국가의 관리자가 되어주기를 불안한 마음으로 응원하고 있습니다.

불안한 마음이 드는 이유는 필자가 친구를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세태의 흐름이 너무 수상하기 때문입니다. 과거에는 돈과 명예의 구분이 있었습니다. 돈과 권력도 구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돈이 권력이고 명예인 시대가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박계동 전 의원이 노태우 대통령 비자금 4,000억 원을 폭로한 이후, ‘권력의 목적이 돈이 되어버린 나라’라는 프레임이 대중의 머리 속에 강력하게 형성되었습니다. “나라의 최고 수장이 그렇게 돈을 밝혔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는 거겠지?”, “그렇지. 권력은 짧고 돈은 대대손손 물려줄 수가 있잖아?”, “그러고 보면 상팔자 중의 상팔자는 재벌이겠네!” 대충 이런 생각들이 사람들 사이에 형성된 것입니다. 여기에 “본인은 재산이 29만 원이야.”라고 얘기하는 전두환 전 대통령의 코미디를 보면서 권력의 무상함과 이에 대비되는 돈의 절대적인 힘을 깊이 느꼈을 겁니다.

이렇게 최고 권력자조차 돈 앞에 무너져 내리니, 그 아래로 내려가면 오죽하겠습니까? 전직판사였던 변호사가 원정 도박 혐의로 영장이 청구된 기업체 대표의 로비를 위해 수십억 원을 받았다고 해서 온 나라가 시끄럽습니다. 이 지저분한 사건에 전직 지검장이었던 변호사까지 이름이 오르면서 도대체 이 나라가 어쩌다 이 모양이 되었는지 한탄하는 소리가 가득합니다. 이 사람들이 현직에 있을 때도 이렇게 비리 투성이였는지, 아니면 법복(法服)을 벗으면서 돈 맛을 알게 된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들이 이렇게 많은 수임료를 받는 이유가 과거 동료였던 판사, 검사에게 로비를 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현직이나 전직이나 썩어있기는 마찬가지 아니겠느냐는 생각이 듭니다.

이 모든 문제의 핵심은 ‘돈으로 못하는 것이 없는 세상’을 우리가 만들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놀이동산에는 VIP패스라는 것이 있어서 인기 있는 놀이기구를 탈 때, 길게 줄을 서지 않고 바로 탈 수 있게 해줍니다. 물론 이 VIP패스는 기존 입장료의 두 배에 해당하는 비용을 지불해야 합니다. 10여 년 전에 마치 새치기하듯 다른 문으로 들어오는 VIP패스 이용자를 보면서 ‘미국이라는 나라는 돈이면 뭐든 다 되는 나라구나’라고 생각했는데 언제부터인가 우리나라의 놀이 동산에서도 Q패스라는 것을 웃돈을 주고 구입하면 줄을 서지 않고 바로 놀이기구를 탈 수 있게 해주고 있습니다.

예전 같으면 “똑같이 요금 내고 놀러 와서 누구는 기다리고 누구는 VIP대접을 받나?”며 항의를 할 법한 일인데 이제는 이러한 일들이 통용되고 있습니다. 경제학의 이론상으로는 지불한 금액의 크기에 맞게 차별화된 서비스를 받는 것이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고 생각할 수 있는 일이지만, 돈으로 해결되는 일의 경계가 점점 더 확대되는 것에 대한 윤리적 고민은 하지 않는 것 같아서 씁쓸합니다. 똑같은 서비스를 받는데 단지 먼저 이용할 수 있게 하면서 돈을 더 받는다? 이제는 고객의 시간까지 거래의 대상이 된 것인데, 이 점을 우리는 과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사기업뿐만 아니라 공공재를 이용하는 데에도 돈이 위력을 발휘합니다. 미국의 고속도로에는 2인 이상 또는 3인 이상 승차한 차량만 빨리 갈 수 있게 지정한 카풀 레인(Carpool Lane)이 있는데 일부 주(州)는 이 카풀레인을 통행료만 내면 나홀로 차량도 이용할 수 있게 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결정은 주 의회 또는 시 의회의 의결을 거쳐 이뤄졌습니다만, 이 또한 돈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의 범위를 넓혀 주고 있는 셈입니다. 그렇다고 이러한 세태를 무조건 비난하자는 뜻은 아닙니다. 단지 우리의 생각이 점점 돈에 대해 지나치게 관대해지고 있지 않은가? 라는 걱정어린 질문을 던져보는 것입니다.

미국 대선이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습니다. 이번 대선은 지난 대선과 차별화된 특징이 있습니다. 바로 도널드 트럼프가 공화당 후보가 되었다는 점입니다. 억만장자가 대권에 도전한 것은 1992년에 로스 페로(Ross Perot)가 처음이었습니다. 그는 무소속 후보로 나와 당시에 18.9%를 득표하여 꽤 이슈가 되긴 했어도 돈이 있는 사람이 동시에 권력까지 갖는 것에 대해 사람들의 반감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엔 부동산 재벌이 미국 대선의 공화당 후보가 된 것입니다. 세 번의 결혼과 세금 탈루 의혹이 이제는 미국 대선 주자가 되는 데 걸림돌이 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민주당 후보인 힐러리 클린턴도 트럼프보단 못하지만 수천 억원의 재산이 있습니다. 한 해에 강연료로 수백 억원의 수입을 올렸는데 도대체 이렇게 많은 강연료를 어떻게 벌 수 있었는지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습니다.

이번 미국 대선에서 이 두 사람 모두 역대 가장 많은 선거 비용을 쓸 거라는 예측이 벌써부터 나오고 있습니다. 미국 대선의 선거 비용은 후보 당 1조 원이 넘게 듭니다. 물론 이 돈을 대선후보들이 자신의 주머니에서 꺼내 쓸리는 없습니다. 선거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각 후보들은 영향력 있는 로비스트들을 영입하고 있고 그 로비스트들은 월가와 기업가들에게 손을 내밀 겁니다. 문제는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것입니다. 정책으로 도움을 주든 정부보조금으로 도움을 주든 그들이 짜놓은 합법적인 시스템을 통해 돈을 댄 사람들에게 매우 교묘하게 보상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99%(We are 99%)’를 외치며 월가의 개혁을 아무리 요구한다고 해도 이러한 바람이 공염불이 되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매일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하고, 돈이 많았으면 좋겠다고 이야기를 하고 돈의 유혹에 빠지기도 하고 돈이 없어서 서러움을 겪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적어도 돈 때문에 나쁜 짓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인디언들의 벽화를 보면 아이들의 마음은 세모 어른들의 마음은 동그라미로 그려져 있습니다. 죄를 지으면 마음이 아픈 것은 죄를 지을 때마다 세모꼴 마음이 회전하면서 뾰족한 모서리가 마음을 긁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어른이 되면서 이 모서리가 닳고 닳아서 동그랗게 되어, 죄를 지어도 별로 마음이 아프지 않게 된다고 합니다. 자본주의가 염치가 없어져서 돈으로 하늘을 가릴까 봐 두렵습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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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박상도

SBS 아나운서. 보성고ㆍ 연세대 사회학과 졸. 미 샌프란시스코주립대 언론정보학과 대학원 졸. 
현재 SBS TV 토요일 아침 '모닝와이드'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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