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서 한 줄 때문에…"


임동권 법무법인 금양 변호사


   셉티드(CEPTED: Crime Prevention Through Environmental Design)라는 도시디자인 기법이 있다. 도시 디자인을 통해 범죄를 예방하는 기법이다.


셉티드(CEPTED) 개념의 지하주차장 설계 출처 도시미래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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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미국인 범죄학자 제임스 윌슨과 조지켈링이 주장한 '깨진 유리창 이론(Broken window theory)'은 셉티드 디자인의 이론적 배경을 제공한다. 깨진 유리창을 방치하면 나중에 그 지역 일대가 무법천지로 변한다는 것으로 무질서와 범죄의 확산성을 경고한 이론이다.


이 깨진 유리창 이론은 그대로 건설분쟁에서도 적용된다. 건설공사 분쟁의 대다수는 그 공사계약서의 작성이 불충분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계약서의 조그만 틈이 마치 깨진 유리창과 같은 역할을 해 당사자 간 끝없는 분쟁의 씨앗이 되는 것이다.


A시와 B공사는 건설사업 위수탁 계약을 체결했는데 그 공사비의 규모는 수백억원에 달했다. 그런데 그 둘 사이에 작성된 위수탁 계약서는 달랑 12개 조항만을 담고 있었다. 그마저도 매우 추상적이고 중의적으로 작성된 것이어서 태생적으로 깨진 유리창을 담고 있었던 것이다.

 

분쟁은 다음과 같은 문구로부터 시작됐다. "건설공사 위탁수수료는 C법기준과 D법기준 중 낮은 금액을 적용해 가감 정산한다." 하지만 C법에는 B공사가 수행하는 업무의 수준에 따라 위탁수수료가 각각 다르게 규정돼 있었고, D법도 마찬가지였다.


B공사의 업무수준에 관해서는 계약서 어디에도 기재된 바가 없었다. 결과적으로 위탁수수료가 결정된 것처럼 외형은 갖춰졌지만 사실상 위탁수수료가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업이 진행됐던 것이다.


위 사례와 같은 추상적이고 중의적인 계약서 조항은 차라리 없는 것이 나은 조항이다. 분쟁을 종식시키는 것이 아니라 분쟁을 유발하는 조항이기 때문이다. 이를 왜 확정하지 아니한 채 계약서를 작성했던 것일까? A시와 B공사가 왜 계약을 체결하는지에 대한 깊은 고민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계약은 왜 체결하는가? 바로 분쟁에 대비하기 위함이다. 계약이 제대로 이행된다면 계약서를 꺼내볼 이유가 없다. 묵혀두었던 계약서를 꺼내보기 시작한다면 이미 분쟁은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건설분야에서도 셉티드와 같은 건설분쟁 예방프로그램이 필요하다. 건설공사계약의 셉티드기법은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까.


건설분쟁의 예방책은 의외로 간단하다. 계약서를 깔끔하게 '디자인'해서 불필요한 분쟁을 예방하는 것이다.


일반적인 건설공사표준도급계약서와 표준시방서만으로는 공사계약의 디테일한 부분이 부족하게 된다. 특히 부가가치세 포함여부, 지체상금률, 공사대금 지급시기 등을 공란으로 두는 경우 당사자는 돌이킬 수 없는 곤란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다만, 계약서는 스스로 공부해서 작성하는 것보다는 법률전문가의 도움을 받을 것을 권한다. 추상적이거나 중의적인 문구 때문에 발생하는 천문학적인 비용과 시간을 고려한다면 더더욱 그러하다.


요즘 법률사무소의 문턱은 과거 그 어느 때보다도 높지 않다. 법률전문가는 분쟁의 해결단계에서 찾아가는 것보다 분쟁의 예방단계에서 찾아가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한편, 계약의 당사자인 시공자는 변경시공에 대비해 '시공기록부'를 작성하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변경 시공액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분쟁은 대부분 구두로 합의했기 때문에 발생한다. 분쟁을 방지하기 위해 번거롭더라도 합의 내용을 서면화해야 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서면화하는 방법이 간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시공기록부라는 것은 시공상 변경사항이 생길 때마다 시공기록부에 합의된 내용만을 기재한 후 쌍방이 확인을 하는 일지다.


별도 서면을 통해 합의하는 것은 번거롭기 때문에 시공기록부를 만들어 합의가 됐음을 기록으로 남겨놓고 양사 대리인이 서명하는 것이다. 변공시공액 분쟁에 관한 간단하고 명쾌한 해법이다.

 

앞 사례로 돌아가자. 결국 A시는 수수료를 확정하지 못한 채 계약을 체결한 귀책으로 수억원의 수수료를 추가로 부담해야 했고, 담당공무원은 견책 등 불이익을 당하게 됐다.


그런데 A시와 B공사가 적지 않은 비용과 시간을 들여 '법원'의 해석을 받아야만 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바로 계약서에 이미 내재되어 있던 '문구의 추상성과 중의성'에 대한 법률전문가의 진단이나 조언 없이 계약서를 작성했기 때문이다.


'미래'를 전혀 내다보지 않고 계약서를 작성한 것이다.

현재 이미 A시와 B공사는 2년간 소송을 했는데도 소송의 끝은 보이지 않는다. 사건 담당자들이 사건과 함께 늙어가고 있다.


누가 미래를 단언할 수 있겠는가. 미래를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약속'하는 것이 '계약'인 것임을 잊지 말자.

[프라임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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