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삭기 자격증 따도 “초보는 안 뽑아요”
50대 응시자 급증
“현장 경험 쌓을 기회 줘야”
공공도서관에 가면 자격증 참고서를 놓고 ‘열공’ 중인 중장년층을 많이 볼 수 있다.
이들은 은퇴 후 ‘제2의 인생’을 위해 자격증 취득에 나서지만, 막상 자격증을 따도 취업할 데가 없다. 나이가 많다고, 해당 분야 경력이 없다고 취업시장에서 외면받는다.
[김형우 기자]
4월 초순 서울 용산구 남산도서관 열람실. 창밖의 화창한 봄 날씨에 아랑곳하지 않고 공부에 열중하는 ‘청춘’이 적지 않다. 그런데 검은 머리 사이로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이 드문드문 보인다. 적어도 열 명 중 세 명이 초로(初老)의 신사다. 청년이나 중장년이나 책상에 앉은 모습은 다를 바 없다. 도서관에 비치된 책이 아니라 각자 가져온 참고서에 푹 빠져 있다. 대부분 자격증 취득용 참고서다. 나이만 다를 뿐, 모두가 ‘스펙 쌓기’에 열심이다.
베이비붐 세대의 대거 퇴직으로 구직시장에 중장년 인력 공급이 크게 늘었다. 그러나 수요는 그에 따르지 못한다. 전국경제인연합회 중장년일자리희망센터의 ‘30대 그룹 퇴직자들의 구직 현황’을 보자. 취업 성공률이 25%에 그친다. 구직 희망자는 7556명이지만, 일자리를 구한 사람은 1901명에 불과하다.
서울 종로구 종로도서관에서 만난 박모(57) 씨는 재취업 준비생이다. 깔끔한 정장 차림으로 도서관에 나온 그는 국내 유수 전자회사 출신. 중국 주재원으로 15년간 베이징, 상하이 등지에서 영업맨으로 활약했다. 박씨는 탄탄한 중국어 실력을 밑천 삼아 지난해 중국어 관광통역안내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중국인 관광객 가이드로 제2의 인생을 시작하기 위해서다. 초임 가이드의 월급은 200만 원 남짓. 전자회사에서 받던 임금과는 비교가 안 되게 적지만 그는 “경제 사정 때문에 재취업이 절실하다”고 했다.
많은 중장년 퇴직자가 박씨처럼 새 일자리를 얻기 위한 ‘스펙’ 마련 차원에서 자격증 취득에 나선다. 한국산업인력공단에 따르면 2014년 국가기술자격증 필기시험에 지원한 50대 이상 응시자가 16만1492명으로, 4년 전보다 50%가량 증가했다(2010년 10만6537명). 서울 용산구 용산도서관에서 만난 장모(53) 씨는 공인중개사 시험을 준비 중이다. 그는 지금까지 부동산 임대업으로 생계를 유지해왔다. 그는 “지방에서 소규모로 임대업을 해온 까닭에 노후 준비를 해놓지 못했다”며 “아직 고등학생인 아이들 뒷바라지까지 하려면 세컨드 잡은 필수”라고 했다.
하지만 자격증을 취득해도 재취업은 쉽지 않다. 50대가 가장 많이 취득하는 자격증은 한식조리기능사, 지게차운전기능사, 굴삭기운전기능 면허 순(2013년 산업인력공단 통계)이다. 주로 음식점을 창업하려는 사람들이 한식조리기능사 자격증을 딴다는 점을 감안하면, 재취업을 하려는 50대가 주로 취득하는 것은 중장비 운전 자격증인 셈이다. 하지만 취업포털 파인드잡의 ‘중장년 일자리’ 란에는 4월 14일 기준으로 중장비 운전 관련 일자리가 단 한 건도 올라와 있지 않다. 이혁진 고령사회고용진흥원 수석연구원은 “중장비 자격증을 2, 3개까지 취득하는 어르신들도 있는데, 고용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드물다”고 전했다. 그는 “현장에서는 자격증을 갓 취득한 신입이 아니라 경력 있는 인력을 선호하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50대 응시자 급증
굴삭기 자격증 따도 “초보는 안 뽑아요”
은퇴한 50대들 사이에서 굴삭기나 관광가이드 자격증은 인기 스펙이지만, 막상 자격증을 취득해도 일자리를 구하기가 어렵다.
중국 체류 경력 15년에 관광통역안내사 자격증까지 취득한 박씨도 취업에 성공하지 못했다. 그는 “여행사가 중장년 가이드를 원하더라도 관광가이드 관련 경력을 요구하기 때문에 아직 면접 기회조차 얻을 수 없었다”며 “초짜 가이드를 채용하는 자리에 도전해봤지만, 청년 지원자들에게 밀리고 말았다”며 안타까워했다. 박씨는 1년 반째 가이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자 이를 포기하고 다른 길을 모색중이다.
“중소기업에서 중국어 문서를 번역하는 일자리를 구하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가이드보다는 급여가 적어요. 하지만 그마저 경쟁률이 만만치 않아서 면접 준비를 철저하게 해야 할 것 같아요.”
그는 중국어 책을 양팔 가득 끌어안고 있었다.
남산도서관에서 만난 이모(65) 씨는 “남들 다 따는 자격증으로는 취업이든 창업이든 어렵다”며 “재취업이 보장되는 토질 및 기초 기술사 자격증을 공부하고 있다”고 했다. 토질 및 기초 기술사는 건물의 설계·시공·평가·감리 업무를 하는 전문직으로, 이 자격증이 있으면 측량회사나 건설회사, 건설 교육기관 등에 진출할 수 있다. 이씨는 대기업 건설회사 설계 파트에서 일하다 은퇴했다. 하지만 이 자격증은 필기시험 합격률이 1.9%에 그칠 정도로 매우 어렵다(2014년 기준). 이씨는 “벌써 세 번이나 낙방한 상태라 과연 해낼 수 있을지 걱정되긴 한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중장년층의 자격증 취득이 취업으로 이어지지 않는 주요한 이유 중 하나는 ‘경력 쌓을 기회’가 드물기 때문이다. 물론 고용노동부가 ‘장년취업인턴제’를 도입하고 있지만,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전국의 사업체는 72개에 불과하다(2015년 기준). 이 프로그램 참여자의 정규직 전환율은 각 사업체마다 50~80%로, 꽤 높은 수준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는 각 사업체에 배정된 인원 대비 정규직 전환자 비율이다. 이 프로그램에 지원한 인원 대비 정규직 전환 비율을 따지면 5~20%에 불과하다.
“현장 경험 쌓을 기회 줘야”
이혁진 수석연구원은 “중장년층 취업훈련과 취업인턴제를 긴밀하게 연계해야만 중장년층 재취업난을 해소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일례로 일본 도쿄 산업노동국 고용취업부의 ‘중장년 취업 지원을 위한 능력 개발’ 사업은 퇴직한 중장년층에게 새로운 기술을 교육하는 것에 더해 1~2년간 각 분야 현장에서 훈련하는 기회까지 제공한다. 결과는 좋다. 2014년 기준으로 이 사업 참가자의 73.4%가 취업에 성공했다.
오후 10시. 서울 구로구 구로도서관의 문이 닫힌다. 도서관 정문으로 ‘수험생’이 하나둘씩 쏟아져 나온다. 무릎 나온 트레이닝 바지와 청바지 사이로 잘 다려진 정장 바지가 종종 눈에 띈다. 백팩을 멘 청년 몇몇은 누군가와 통화하며 걸어가고, 나머지는 귀에 이어폰을 꽂는다. 서류가방을 든 ‘아버지’들 중 몇몇은 친구와 소주 한잔 기울이려 간다며 기자에게 손을 흔든다. 또 다른 정장 차림의 신사들은 휴대전화에 시선을 고정한 채 각자 흩어진다.
2016-05-04
강지남 기자 | layra@donga.com, 박세준 ehdd 인턴기자 | 한양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4학년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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