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박상도]



www.freecolumn.co.kr

이영춘 세례자 요한 신부님

2016.05.04


‘저 신부님 꽤 까칠하신데?’ 첫 대면 때의 솔직한 느낌이었습니다. 당신이 계셨던 성당과 지금 부임하신 성당을 가감없이 비교하는 것을 보며, 지나친 솔직함에 당황스러운 마음이 들었기 때문에 필자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신부님 중에는 흔히 괴짜라고 불리는 분들도 종종 계십니다만, “전에 있던 성당은 이러저러해서 참 좋았는데, 여기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쉽지 않네요.”라는 말씀은 자칫 우열을 가리는 듯하게 비칠 수 있고 또, 현 부임지의 신자들에게 다소 섭섭함 마음이 들게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유로 사람에 대한 선입견은 지극히 직관적이고 주관적인 판단이기 때문에, 그다지 잘 맞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신부님의 성격이 까칠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신부님을 차츰 알아가게 되면서 선입견은 역시 틀린 경우가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신부님의 솔직함은 그 속에 아무런 의도가 들어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그분에 대한 약간의 부정적인 생각이 말끔히 해소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무언가를 바라면서 하는 말은 듣는 사람에게 부담을 줍니다. 하지만 단순히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고 그 이상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러한 모습을 시종일관 유지한다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법률에서 말하는 ‘선의(善意)’와 ‘악의(惡意)’의 개념은 상식적인 해석하고는 차이가 있습니다. 법률에서 선의는 좋은 뜻, 좋은 의도가 아니며 악의 역시 나쁜 뜻, 나쁜의도로 해석되지 않습니다. 법률에서 선의란 어떤 사정이나,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뜻이고 악의란 어떤 사정과 사실을 알고 있다는 뜻이 됩니다. 예를 들어, 초등학교 1학년 담임 교사가 “우리 반은 철수가 가장 큰 문제야.”라고 얘기하거나, 영희 엄마에게 전화를 해서 “이번에 영희가 교내 사생대회에서 그림을 정말 잘 그렸는데, 아깝게 2등이 되어서 상을 못 받았어요.”라고 얘기하는 경우 선의로 해석할 경우와 악의로 해석할 경우 엄청난 차이가 생깁니다. 악의로 해석하게 되면 촌지를 바라는 것이 되고 선의로 해석하면 진심으로 철수와 영희를 걱정하는 것이 됩니다.

목 5동 성당의 주임 신부였던 이영춘 신부님은 근처 직장인들의 사목활동에도 적극적이었는데 필자가 근무하는 SBS는 당신이 관할하는 구역이었습니다. 매달 한 차례 방송사로 오셔서 미사를 집전하였는데, 늘 한결 같은 모습으로 신자들을 위해 헌신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하루는 필자가 속해 있는 직장의 가톨릭 신자들을 위해 신부님이 저녁을 준비했으니 성당으로 오라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날 저녁 몇몇 동료 선후배와 성당으로 향하면서 신부님의 건강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위암이라고 하지?”
“꽤 진행됐다고 하던데, 시간이 많이 남지 않은 것 같다고…”
필자는 귀를 의심했습니다. 왜냐하면 신부님은 그 동안 단 한번도 당신이 투병중인 것을 내색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단 한번도 아파 보이지 않았으며, 단 한번도 당신의 처지를 내비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날 저녁은 빠스카 의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빠스카 축제라고도 하는 이 의식은 모세가 이집트를 탈출해서 새로운 땅에 도착한 것을 축하하는 의식으로 오늘날 가톨릭 교회에서 행하는 미사의 기원으로 보는 시각이 많습니다. 김밥과 바게트 빵과 포도주로 저녁을 함께 하며 새로운 형태의 미사를 신부님의 친절한 설명과 함께 올리고 있는 도중, 신부님께서  
“지금부터 세족례를 시작하겠습니다. 원하시는 분은 앞으로 나와 주세요.”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순간 장내가 술렁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에서 12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데서 시작된 세족례. 2009년에 용산참사 유가족들에게 문정현 신부께서 세족례를 해줬다는 기사를 본 적도 있고 교황께서 세족례 의식을 행하셨다는 뉴스를 접한 적도 있긴 했지만, 그것이 우리 앞에 현실로 다가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모두들 당황스러워하는 가운데 6명 정도가 세족례 의식에 참여해 주었습니다. 필자에게도 주변에서 권유를 했으나 감히 용기를 내지 못했습니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스스로 자격이 없다고 여긴 것이 맞을 겁니다. 

모두들 어색하게 자신의 발을 신부님께 맡겼습니다. 그날 세족례를 할 것이라는 귓뜸조차 없었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며칠 동안 발을 안 씻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고, 무좀에 걸린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발 냄새가 유난히 많이 나는 사람도 있었을 텐데 신부님은 아무 상관 없다는 듯이 매우 정성껏 발을 씻겨 주셨습니다.

죽음을 앞둔 신부님의 세족례를 보면서 필자는 조용히 휴대폰을 들어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이영춘 신부님을 기리는 글을 쓰리라 마음을 먹었습니다. 아마 이 사진은 당신의 거룩한 모습을 기억하는 유일한 사진일 겁니다. 사진에서 세족례를 받는 사람들은 나이 오십을 넘긴 필자의 선배들입니다. 한때는 세상 무서울 것이 없는 방송사의 에이스였던 분들이었지만 이제는 직장에서는 아재개그나 하고, 집에서는 서서히 찬밥 신세가 되가는 힘없는 중년들입니다. 그렇다고 마음이 백옥처럼 깨끗하여 해마다 봉사활동을 하고 기부를 하는 것도 아니고, 정의 사회 구현을 외치는 정의로움도 어느새 사라져 버린 나이입니다. 어쩌다 친구를 만나면 은퇴 후 어떻게 살 것인지를 고민하고, 소주 한 잔에 수십 년 직장생황 동안 위 아래로 치이며 살아 온, 상처 받은 자신의 영혼을 달래며 사는, 그저 그런 배 나온 중년 남자들입니다. 신부님의 눈에는 이분들이 가엽게 보였을 것이고 세족례를 통해 이분들이 당신의 뜻에 따라, 가슴에 남은 사랑의 불씨를 지펴서 세상을 따뜻하게 해주기를 바라셨을 겁니다.

세속적인 관점에서 세족례 사진을 본다면 가장 먼저 드는 느낌은 칙칙함일 겁니다. 광고 이론에서 시선을 사로잡는다는 3B 즉, beauty(미인), baby(아기), beast(동물) 중 어디에도 해당되지 않는 50대 중년 남성을, 50대 신부님이 발을 씻겨주는 모습은 직관적으로 봤을 때 전혀 매력적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당시 신부님의 건강 상태와 신부님께 발을 맡긴 사람들을 잘 알고 있는 필자에는 너무나 소중한 사진입니다. 필자가 평생 간직하는 최고의 장면 중 하나가 바로 이 사진입니다. 신부님의 세족례를 받은 사람들 뿐만 아니라 이 모습을 지켜본 사람들의 영혼도 함께 말끔하게 치유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겨드리고 다음날 십자가를 지셨듯이 이영춘 신부님은 그날 세족례를 하고 나서 몇 달 후인 2012년 2월 3일에 선종하셨습니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성경에 기록된 세족례와 관련된 대화입니다. ‘국민 행복, 희망의 세 시대’가 박근혜 정부의 국정 비전입니다. 유발 하라리의 저서 <사피엔스> 서문엔 '인간은 권력을 획득하는 데는 매우 능하지만 권력을 행복으로 전환하는 데는 그리 능하지 못하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다 가진 사람이 행복하지 않은 이유는 나누는 데 인색하기 때문이고 자신을 낮추지 않기 때문입니다.

대통령 임기가 2년 반 남았습니다. 20대국회의원 당선자 통계를 보면 절반 가까이가 초선입니다. 즉, 절반은 4년짜리 시한부라는 얘기입니다. 죽음을 앞에 두고 자신을 한 없이 낮춰 미천한 사람들의 발을 씻겨 주신 이영춘 세례자 요한 신부님의 희생과 사랑을, 이 분들에게 기대하는 것은 지나친 욕심일까요?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이 칼럼을 필자와 자유칼럼그룹의 동의 없이 상업적 매체에 전재하거나, 영리적 목적으로 이용할 수 없습니다.

필자소개

박상도

SBS 아나운서. 보성고ㆍ 연세대 사회학과 졸. 미 샌프란시스코주립대 언론정보학과 대학원 졸. 
현재 SBS TV 토요일 아침 '모닝와이드' 담당.

박대문의 야생초사랑

왕벚나무 (장미과)

제주의 ‘한라생태숲’에서 만난 왕벚나무입니다. 1909년 창경궁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들고 왕벚나무를 심는 등 일제 강점기에 일본에서 들여온 왕벚나무가 우리나라에 많이 심어졌고 벚꽃축제로 유명한 워싱턴 DC의 왕벚나무 또한 일본이 기증한 것이어서 대부분 사람이 왕벚나무가 일본 원산으로 알고 있습니다.

필자소개

박대문

환경부에서 공직생활을 하는 동안 과장, 국장, 청와대 환경비서관을 역임했다.
우리꽃 자생지 탐사와 사진 촬영을 취미로 삼고 있으며,
시집 『꽃벌판 저 너머로』, 『꽃 사진 한 장』, 『꽃 따라 구름 따라』가 있다.

Copyright ⓒ 2006 자유칼럼그룹.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freecolumn.co.kr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