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죗값 이미 치렀다”는 ‘궤변’, 정녕 아무 일 없나 [이성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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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죗값 이미 치렀다”는 ‘궤변’, 정녕 아무 일 없나

2016.04.29


언론 매체 보도에 따르면 얼마 전 치른 20대 총선에서 국회의원 후보자로 등록한 사람 중 무려 41%가 ‘전과 기록 보유자’라고 합니다. 그중에는 물론 강권 정치가 횡행하던 시절의 ‘보안법 전과자’도 있겠지만 이런 경우는 소수에 그친다고 합니다. 음주 운전, 폭행, 공무 집행 방해 같은 범법자가 대부분이고 심지어는 사기범도 몇몇 있다고 합니다. 참으로 개탄스러움을 넘어 민망하기 그지없는 일입니다.

사정이 이런데도 그 위풍당당한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중립을 지킨다며 함구로 일관했습니다. 위원회 관리 규정에 죗값을 치른 전과 행적은 결격 사유라는 조항이 없기 때문이라도 한 걸까요?
총선 후보들이 그렇게도 ‘당당하게’ 입후보 등록 사무실에 가서 절차를 밟는 것은 어떤 형태로든 “나는 이미 죗값을 치렀다. 고로 나는 당당하다”라는 나름의 굳센(?) 신념이 있었기에 가능했겠지요.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작태를 설명할 방법이 없을 겁니다.

비단 정치계뿐만 아니라 국내 의료계도 마찬가집니다. 특히 지난 2011년 일어난 의대생들의 집단 성폭행 사건과 관련해서도 정치계와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이 사건은 만취해 잠든 여학생을 남자 동기생들이 집단으로 성추행한 것도 모자라 스마트폰에 그 기록을 영상으로 남긴 어처구니없는 사건입니다. 그것도 한 명문 의대 졸업 학년에서 말입니다. 참으로 어이없는 일입니다. 그 사건으로 가해 학생 3명은 모두 퇴교 조치를 당했고, 법정에서 1년 6개월~2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고 감옥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최근 그 가해 학생 중 2명이 각기 다른 의학전문대학원에 다시 입학하면서 문제가 불거졌습니다. 동료 학생들이 그들의 ‘성추행 전과’를 알고 성토하며 나선 것입니다.

그런데 더욱 이해할 수 없는 것은 학교 당국이 학사 운영 규정에 ‘성범죄자는 의사가 될 수 없다’는 항목이 없다는 이유로 어정쩡한 입장을 취했다는 점입니다. 게다가 “이미 죗값을 치렀다”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는 정서가 학생들 사이에 번지는 등 그들의 입학을 놓고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성범죄자 의사는 안 돼”, “아동 성추행범에게 아이를 맡기는 꼴”이라는 강경론과 “죗값을 이미 치렀으니 괜찮다”, “마녀사냥식 여론몰이는 안 된다”는 동정론이 팽팽하게 맞선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양비양가론 행태가 그대로 반복되는 것 같아 서글프기까지 했습니다. 어느 누구도 윤리적 판단 기준에 관해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오래전 미국 대통령 경선 과정에서 한 후보가 뭇 미녀들과 요트 파티를 즐기는 영상이 보도된 적이 있는데, 이 일이 발생하자 그 후보는 아무런 변명 없이 후보직을 사퇴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들 사회의 윤리적 잣대가 이를 용납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는 무형의 윤리법이 사회를 지탱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의대생 사건이나 지난 총선 후보들의 ‘전과자 현상’을 보며 필자는 독일에서의 경험이 떠올랐습니다. 의사 국가시험을 보려고 대학 본부에 가서 서류 양식을 받았는데, 그중 생소한 고유명사가 눈에 띄었습니다. 신원조회서(Fhrungszeugnis)라는 것이었습니다. 처음 듣는 낱말이기도 해서 담당자에게 그 증빙 서류를 어디서 발부하느냐고 물어봤습니다. 그런데 市경찰국에서 서류를 발급한다는 얘기에 필자는 깜짝 놀랐습니다. 만약 필자에게 형법상 전과 기록이 있었다면 의사 국가시험 응시 자격을 얻지 못했을 것이라는 얘깁니다.

근 반세기 전의 일이라 독일의 동료 지인에게 신원조회서가 아직도 있는지 확인했더니 변함없이 존속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지인은 의사인 자기 부인이 병원을 다른 장소로 옮겨 새로 신고하는 데도 경찰청에서 발부하는 신원조회서를 제출해야 했다고 덧붙였습니다. 행여 의사가 알코올이나 마약에 중독되었다면 그에게 환자 진료를 맡길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미국이나 독일의 사례에서 공통점은 불문율인 윤리법이 실정법보다 상위 개념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반면 우리 사회에 팽배하고 있는 “죗값을 치렀다”라는 ‘궤변’과 함께 총선 후보자 중 41%가 전과자라는 게 끔찍하기만 합니다. 특히 우리 사회에서 ‘윤리가 곧 법’이라는 개념 자체가 사라지고 만 것만 같아 염려스럽기까지 합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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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이성낙

뮌헨의과대 졸업. 프랑크푸르트대 피부과학 교수, 연세대 의대 교수, 아주대 의무부총장 역임.
현재 가천대 명예총장, 의ㆍ약사평론가회 회장, (사)현대미술관회 회장, (재)간송미술문화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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