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재개그여, 쫄지 마시라 [임철순]







www.freecolumn.co.kr

아재개그여, 쫄지 마시라

2016.04.28


나이가 든 사람은 이 세상에 무슨 기여를 할 수 있는 것일까? 그저 그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남들에게 안심이 되고, 부표나 좌표, 방향을 알리는 화살표 구실을 할 수 있는 것일까? 하찮아 보이는 사람도 각자 나름대로 장기나 슬기를 지니고 있다는 노마지지(老馬之智)라는 말이 과연 지금도 유효한 것일까? 

급변하는 세상에 적응하기가 어렵고 인공지능이라는 것까지 나와 인간의 일과 미래를 위협하는 시대에, 나이가 든 사람들은 무력감과 상실감에 휩싸이기 쉽습니다. 예순도 안 돼 자기 의사와 관계없이 은퇴를 당하고 아무 할 일이 없어 산으로 들로 헤매고 사는 사람들이 많은데,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기계가 인간의 생존까지 위협하는 상황이 됐습니다. 

내가 아는 사람은 지공(지하철 공짜)거사가 되는 올해 가을에 40년 가까이 해온 직장생활을 스스로 접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나이에 회사에 다니는 것도 대단한 일이니 더 하라고 다들 말리지만 본인 생각은 다릅니다, 후배나 부하들의 설명을 얼른얼른 알아듣지 못하는 경우가 있고, 내가 회사에 무슨 도움이 되는가, 오히려 걸림돌이 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자꾸 하게 된다고 합니다, 젊은 시절에 ‘저 사람은 일도 잘 하지 못하면서 왜 아직도 회사에 다니지?’하고 생각했던 선배보다 이미 더 많은 나이가 됐습니다.

교직생활 30년이 넘은 교사는 가끔 멍해지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가만있어봐, 내가 지금 뭘 하고 있었지? 애들 중간고사 시험문제 낼 때 어떻게 했더라? 늘 익숙하게 해오던 일이 갑자기 생소해지고 그래서 옆 자리의 또래 교사와 비슷한 실수나 착각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함께 웃지만 마음은 편하지 않습니다. 나이든 교사에 대한 학생들의 거부감과 비호감에도 갈수록 신경이 쓰인다고 합니다.
 
또 어떤 이는 아침에 출근하면서 ‘지금 이 건물에서 내가 나이가 제일 많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그러면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지고 한겨울에 모자를 뺏긴 듯 머리가 시려지면서 행동에 더 조심을 하게 된다고 합니다. 어느 조직이든 뭔가 상의할 수 있고 때로는 투정과 응석을 부릴 수 있는 선배가 있으면 그는 다행스럽고 행복한 사람입니다.  

조선 명종-선조 연간의 선비 최전(崔澱·1567~1588)의 시에 이런 게 있습니다. “늙은 말 솔뿌리 베고/천리 길을 꿈꾸다가/가을바람 낙엽소리에/놀라 일어나니 해 기우는 석양.”[老馬枕松根 夢行千里路 秋風落葉聲 驚起斜陽暮] 겨우 여덟 살에 이런 시를 썼다니 그가 스무 살을 갓 넘겨 요절한 것도 전혀 이상하지 않지만, 나이든 사람들의 마음과 정서가 잘 드러나는 시 아닙니까? 유행가의 가사처럼 해는 져서 어두운데 찾아오는 이는 없습니다. 내가 쓸모 있는 존재인가 아닌가 그 생각만 곱씹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베스트셀러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가 나이든 사람들의 마음을 더 불편하게 해주었습니다. 이제 겨우 마흔 살, 이스라엘의 예루살렘 히브리대 교수인 그는 26일 내한 강연회에서 “인류에게 가장 큰 위협이 되는 기술은 인공지능”이라며 “30년 후에는 인공지능이 거의 모든 직업에서 인간을 밀어낼 것”이라고 내다봤습니다. 또 “지금 아이들은 선생님이나 연장자에게서 배운 지식으로 인생을 준비해나가는 게 불가능한 첫 세대가 될지도 모른다”며 “배우는 시기와 배운 걸 써먹는 시기로 인생이 나뉘던 시대는 지났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앞으로 인류는 계속해서 스스로를 만들어가야 한다”고 덧붙였습니다. 현재의 교육과정은 산업시대에 적응하도록 맞춰져 있는데, 2050년이 됐을 때 세상이 어떻게 달라져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래에는 50세도 15세 학생처럼 자기 계발에 나서야 한다는 것이지요. 나이든 사람들의 경험은 별로 쓸모가 없으니 그런 것에 기대거나 기대하지 말고 스스로 자신을 만들어가야 한다는 말과 같지 않습니까? 늙은 말은 쓸모가 없습니다.  

이렇게 ‘늙은 말’을 생각하다 보면 요즘 갑자기 번진 ‘아재개그’를 함께 떠올리게 됩니다. 아재개그는 별로 우습지 않지만 웃어주려는 선의나 마지못해 호응하는 선심에서 만들어진 말입니다. 사회적 약자인 여성과 젊은이들이 자신들을 방어하기 위한 심리적 반작용에서 권력을 휘두르는 중년 남성들에 대해 드러내는 혐오의 감정이 담겨 있다고 분석한 사람도 있습니다.  

사실은 처음 듣는 이야기이고 재미있는 농담인데도 “아, 아재개그 하시네요” 그러면 그 자리가 정리돼 버리고 맙니다. 나도 몇 번 그런 경험을 당했습니다. 조금 있으면 ‘할배개그’라는 말도 나올 텐데, 거의 황혼연설과 비슷한 의미를 담게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든 사람의 능력 중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자신을 객관화할 수 있는 여유와 국량입니다. 그런 것이 언어로 드러나는 것이 유머이며 개그일 것입니다. 자신을 타자화해서 바라볼 수 있는 능력, 그것이 주위에 밝고 긍정적인 힘으로 작용한다면 더없이 좋은 일이겠지요.

조조의 대표적인 시 '보출하문행'(步出夏門行) 중 네 번째 작품 '귀수수'(龜雖壽)에 "늙은 천리마는 우리에 엎드려 있어도 /마음은 천리를 달리고/열사는 늙어도/웅심은 꺾이지 않네"[老驥伏 志在千里 烈士暮年 壯心不已]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장하고 원대한 마음은 나이가 든다고 해서 사라지는 게 아닙니다.  

사실 늙으면 생각이 낡아지고 모든 점에서 묽어집니다. 그렇기에 오히려 더욱 더 맑음과 밝음을 지향하게 됩니다. 젊음은 어떤가요? 말장난 같지만 젊음은 닮고 싶은 삶과 앎의 멘토를 찾는 시기이고, 아파서 곪는 상처를 경험하는 시기입니다. 젊은 시기를 거쳐야 늙은 삶이 옵니다. 삶에는 월반과 추월이 없습니다. 인생은 ㄻ에서 ㄺ으로 가는 과정인 것 같습니다. 세상에는 젉은이도 있고 늚은이도 많습니다. 늙은 말을 가치없는 존재로만 생각하면 안 됩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이 칼럼을 필자와 자유칼럼그룹의 동의 없이 상업적 매체에 전재하거나, 영리적 목적으로 이용할 수 없습니다.

필자소개

임철순

1974~2012년 한국일보 근무. 문화부장 사회부장 편집국장 주필 및 이사대우 논설고문을 역임했다. 
한국기자상, 삼성언론상, 위암 장지연상 수상. 
현재 이투데이 주필 겸 미래설계연구원장, 자유칼럼그룹 공동대표, 한국언론문화포럼 회장, 
시니어희망공동체 이사장.

Copyright ⓒ 2006 자유칼럼그룹.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freecolumn.co.kr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