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보 거부'도 유권자의 권리다 [허영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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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보 거부'도 유권자의 권리다

2016.04.01


이번 4·13 총선을 앞두고 유권자들의 반응이 싸늘합니다. 선거에 관심이 없다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정치에 실망감을 느꼈기 때문이겠지요. 배신감이라고 해도 크게 지나치지 않습니다. 선거 때면 고개를 조아리는 것은 물론 무릎까지 꿇어가며 한 표를 호소하면서도 당선된 뒤에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자기들 밥그릇만 챙기려 드는 정치인들의 속셈을 이제는 두루 넘겨짚고 있는 것입니다.

선거가 불과 열흘 남짓 앞으로 다가왔는데도 아직 찍어줄 만한 후보를 찾지 못했다는 응답자가 40% 안팎에 이른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그것을 말해 줍니다. 이른바 ‘부동층’입니다. 이런 분위기라면 투표율이 50%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라는 전망도 제기됩니다. 여야 정당이 후보를 내세우는 과정에서 지역 민심과는 아랑곳없이 제멋대로 공천했고, 선거운동이 진행되는 과정에서도 현실과 동떨어진 공약을 남발하고 있으니 마음에 들 리 없습니다.

이런 점에 비춰본다면 현행 국회의원 선출 방식에는 중대한 결함이 있습니다. 아무리 유권자들이 외면하더라도 후보자 가운데 어느 한 명은 반드시 당선되도록 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몇 표를 얻든, 종다수(從多數) 원칙에 따라 그중에서 한 표라도 더 얻기만 하면 금배지를 달게 되는 것입니다. 상당한 유권자들이 투표장에 나타나지 않더라도 상관이 없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선거는 선거대로 진행될 뿐입니다.

경우를 좀 더 확대해서 생각해 보면 문제가 심각합니다. 가령 투표자의 50% 득표를 얻어 당선됐다고 해도 투표율이 60%였다면 전체 유권자의 30% 지지밖에 얻지 못한 것입니다. 투표율이 50%인 상황에서는 전체 유권자의 지지율은 25%로 떨어집니다. 실제로는 투표율과 득표율에 따라 이보다 훨씬 못한 경우가 수두룩합니다. 재보궐선거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겠지요.

이렇듯 전체 유권자를 기준으로 기껏 20% 안팎의 지지율밖에 얻지 못하고도 지역구민을 대표한다는 논리가 쑥스럽습니다. 선거에 참여하지 않은 30~40% 유권자의 눈에는 자격이 모자라는 사람인데도 말입니다. 현행 선거제도의 맹점입니다. 후보를 선택하기 싫어서 선거에 참여하지 않은 유권자의 입장에서는 ‘후보를 선택하지 않을 권리’가 침해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국민이 국가의 주인이라면 투표에 참여할 권리만큼이나 후보를 거부할 권리도 인정해야만 합니다.

물론 두어 명의 후보가 끝까지 박빙의 접전을 이룸으로써 득표가 갈라지는 결과에 대해서는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지만 그런 경우는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접전을 이룬다면 결과적으로 그만큼 투표율이 높아지는 것이 보통입니다. 따라서 접전지역 당선자에 있어서도 전체 유권자로부터 얻은 지지율이 다른 지역구에 비해 그리 낮지는 않다는 것이 경험적으로 확인된 사실입니다. 후보들의 자격 미달로 관심을 끌지 못한 채 투표율이 저조한 경우가 문제입니다.

특히 이번 선거의 경우 여야 정당은 공천 과정에서부터 적잖은 잡음을 일으켰습니다. 서로의 텃밭인 영남과 호남에서는 아무라도 후보로 내세우기만 하면 당선되기 마련이라는 오만한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새누리당은 ‘친박(親朴)'이니 ‘비박(非朴)'이니 티격태격했고,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은 ‘친노(親盧)’니 ‘비노(非盧)’니 하면서 다투었습니다. 자기들의 이해관계만 있었을 뿐 국민들은 관심에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국회의원 당선에 필요한 최소 득표율 기준을 새로 정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단순히 경쟁자들 가운데서 한 표라도 더 얻었다고 민의의 대변자라고 자처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전체 지역구민의 10%이든, 15%이든 하한선을 정해놓고 그만큼의 득표에 미치는 후보가 없다면 해당 지역구에서는 당선자를 내지 않는 방법입니다. 투표율이 50%에 미치지 못할 경우 해당 지역의 선거를 무효화하는 방법도 고려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야만 정말로 유권자들이 무섭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선거구민들이 투표를 하면서 뽑고 싶은 후보가 없다는 의사를 투표용지에 표기하도록 하는 것도 하나의 방안입니다. 설령 가장 많이 득표를 했더라도 후보 선택을 거부한 표수에 미치지 못한다면 역시 그 선거구는 당선자를 내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민의를 반영하는 참다운 방법입니다. 정치에 신물이 난 나머지 투표를 포기하는 사람이 적지 않은 상황에서도 당연히 당선자가 나오는 불합리한 제도는 고쳐져야 마땅합니다.

국회의원 재보궐선거는 물론 시·도 지사나 교육감 선거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는 방안입니다. 모든 후보가 최소한의 득표율 기준을 넘어서지 못하거나 ‘후보 기피’ 표수에 미달할 경우에는 당선자를 내지 않으면 됩니다. 국회의원이나 기초단체 의원의 경우 공석으로 두면 될 것이고, 단체장과 교육감의 경우에는 중앙정부가 관리인을 파견해 임기 동안 행정을 대신 이끌어 가도록 하면 될 것입니다.

현행 헌법에도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1조 2항)고 명시돼 있습니다. 직접적으로는 대통령과 국회의원을 뽑는 권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유권자들의 의사와 관계없이 후보자 가운데 어느 한 명은 억지로라도 지역 대표로 선출해야 하는 지금의 선거제도는 헌법 정신에도 분명히 어긋납니다. 공직 선거에서 정말로 국민이 주인이 되는 시대를 구경하고 싶습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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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허영섭

이데일리 논설실장. 전경련 근무. 경향신문과 한국일보에서 논설위원 역임. 미국 인디애나대학 저널리즘스쿨 방문연구원. '일본, 조선총독부를 세우다, '대만, 어디에 있는가', '영원한 도전자 정주영'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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