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부신 인공지능 [김영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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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부신 인공지능

2016.03.24


어느 날 서울역 역사에 들어가니 ‘맞이방’중심에 사람들이 뺑 둘러 서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숨을 죽인 채 눈은 텔레비전 화면을 주시하고 있었죠. 이세돌 9단과 알파고의 대국이었습니다.

3년 전 CNN은 미래가 어떤 모습인지 보려면 한국행 티켓을 끊으라고 보도했습니다. 최근 알파고의 대국이 일어난 서울이 바로 그것이죠. 인간 이세돌과 인공지능의 세기적 대결에 호텔 홀은 세계 각국의 취재진으로 꽉 차서 기자들은 대국이 끝날 때까지 몇 시간 동안 꼼짝도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형편없는 정치와 경제난에 허덕이는 칙칙한 서울이 미래지향적인 화제의 초점이 된 것은 정말 행운입니다. 내 계파가 공천을 받느냐,마느냐에 골몰한 무개념의 정치권과 극명하게 대조되는 최첨단 디지털 이벤트를 서울에 열게 만든 이세돌의 존재가 바둑을 잘 모르는 나를 뿌듯하게 했습니다.

4승 1패, 알파고의 승리로 충격 받은 사람들은 인공지능의 미래를 생각합니다. 힘들거나 복잡한 일을 기계에 맡기려는 인간의 욕망은 산업혁명을 일으켰고 정보화혁명을 거쳐 네트워크 혁명이 한창 진행 중이죠. 구글은 1,202대라는 컴퓨터 망을 이세돌에 대결시켰죠. 각국의 기업들은 지금 만물을 연결하는 사물인터넷(IoT) 연구와 개발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글로벌리더가 된 구글의 포부는 언론사들이 해야 할 뉴스의 유통망이나 검색어로 돈 벌려는 우리나라 포털과 차원이 다릅니다. 세상의 모든 정보를 담겠다는 목표로 이름도 10의100승을 뜻하는 단어(googol)에서 따왔으며 검색엔진을 넘어 빅 데이터의 대형(大兄)이 되고 있죠. 알파고 대국 1주일간 구글 모회사 주식 시가총액은 58조 원이 치솟았습니다. 공동 창업자인 세르게이 브린은 인공지능의 격전장인 서울을 처음 방문해 이세돌도 격려했습니다.

인공지능 로봇은 오래전에 단순반복적인 노동의 차원을 벗어났습니다. 내 친구는 초정밀 로봇으로 위암 수술을 받고 완쾌했습니다. 외신들은 2010년 한국이 비무장지대에 열 감지 센서와 레이더, 기관총과 수류탄으로 무장한 한국산 로봇을 배치했다고도 보도했습니다.

우리가 아직 이세돌과 알파고의 승부에 취해 있던 그제 일본 매스컴은 제3회 니케이 호시 신이치(星新一) 문학상에 응모해 1차 전형을 통과한 소설의 서두를 실었습니다.

“그날은 구름이 낮게 드리운, 잔뜩 찌푸린 날이었다. 방안은 항상 최적의 온도와 습도. 요코 씨는 어수선한 모습으로 소파에 앉아 시시한 게임으로 시간을 잡아(죽이고)있다. 하지만 나에게 말을 걸어오지 않는다.”  일본어 원문을 일부러 구글로 번역해 보았습니다. 자유시간을 갖기 시작한 컴퓨터가 소설을 쓰는 재미에 눈을 뜨고 인간에 대한 봉사를 접는다는 내용인데 과학자들은 소설 창작 프로젝트팀을 만들어‘인공지능(AI)’을 이용해 썼으며 아직은 인간의 역할이 8할이었다고 말합니다.

이미 주어진 데이터로 팩트 위주의 경제나 체육 기사를 작성하는 인공지능은 미국의 AP, LA타임스, 블룸버그 통신 등에서 연간 수백만 건을 생산하며 맹활약 중입니다. ‘유엔 미래보고서 2045’는 30년 후 인공지능이 인간을 대신할 직업군으로 의사, 변호사, 기자, 통·번역가, 세무사, 회계사, 금융 컨설턴트 등을 꼽았습니다. 지난 1월 다보스 세계경제포럼은 2020년까지 인공지능 로봇 등으로 일자리 700만 개가 사라지고 200만 개가 새로 생긴다고 전망했습니다. 우리나라 어느 로펌도 인공지능변호사를 개발 중이죠. 

사실 미래 사회에선 인간 배심원이나 판·검사보다 모든 판례를 고려한 인공지능이 더 공정한 판단을 내려 ‘정치재판’이니 ‘사법살인’이니 하는 논란을 잠재울 수 있을지 모릅니다. 또 유권자들이 직접 참여하는 인공지능 국회라면 무능하고 게으른 의원들을 대체해 무보수로 일하며 국민생활에 도움을 줄 법안의 적체를 해소하는 데 매우 효율적일 것입니다.

그러나 인공지능이 어디로 발전하건 냉정만으로는 인간과의 공존이 어렵죠. 구글이 개발해 330만 킬로미터를 무과실로 운행한 자율 주행 자동차가 교차로에서 배수로 부근의 모래주머니들을 피하려고 옆 차로로 들어가면서 달려오던 버스가 양보할 것으로 믿었다가 측면 충돌 사고를 일으켰다는 뉴스를 읽었습니다. 구글은 책임을 인정하고 버스 같은 대형차는 양보할 확률이 낮다는 새로운 소프트웨어를 추가했다는 것이죠.

자율 주행차가 인공지능으로 차간 거리 확보나 속도 조절 같은 물리적 방어운전은 할 수 있었지만 사람처럼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거나 창을 열어 손짓하며 내가 양보할까 말까를 결정하는 정서적 요소까지 소프트웨어로 담지는 못한 모양입니다. 나의 양보심을 프로그래밍하기가 쉽겠습니까?

시간이 해결책일까요. 일본 드라마처럼 인간과 사랑을 나누는 로봇이나 혹은 요즘 어린이 인기 애니메이션같이 자장가를 불러주고 신발 냄새를 맡으면 기절하는 로봇이 나올지 모르죠. 가끔 손녀를 업어주는 나의 일상이 미래의 인공지능과 어떻게 연결될지도 궁금합니다. 나는 이세돌이 당혹해 한 얼음 같은 알파고의  인공지능이 아니라 실생활에 봉사하는 감성의 인공지능을 꿈꿉니다. 2035년을 그린 영화 ‘아이, 로봇’에서는 약을 심부름하는 로봇을 형사가 도둑으로 오인하여 덮치다가 주인에게 혼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쯤엔 알파고는 상대도 안 되는 착한 로봇들이 즐비하여 일상생활을 정말 도와줄 수 있을까요.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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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김영환

한국일보, 서울경제 근무. 동유럽 민주화 혁명기에 파리특파원. 과학부, 뉴미디어부, 인터넷부 부장등 역임. 우리사회의 개량이 글쓰기의 큰 목표. 편역서 '순교자의 꽃들.현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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