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음이 말해주는 문화 수준 [방석순]



www.freecolumn.co.kr

소음이 말해주는 문화 수준

2016.03.11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의 다섯 감각을 5감(五感)이라고 하지요. 여러분은 그중 어느 감각이 가장 예민합니까. 아내에게 물었더니 뜻밖에 미각이라고 대답합니다. 나이 들어서도 입맛은 변함없이 예민하다는 겁니다. 저는 청각이라고 했습니다. 젊은 시절보다 다소 무디어지긴 했지만 그래도 소리에는 비교적 예민하고 소리의 질도 나름대로 잘 판단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내의 말을 들어보면 그렇지 않은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슨 일에 열중하다 보면 애써 켜 놓은 경보(알람)도 듣지 못한다는 게 그 근거입니다. 요리 솜씨가 꽤 좋은 편인 아내도 나이 들며 이따금 짜고 싱겁고, 간을 잘 못 맞추곤 합니다. 그걸 보면 미각도 좀 수상해집니다. 12년산 보통 양주와 몇 십 년 됐다는 값비싼 양주의 맛을 정확히 구별해내는 사람은 흔하지 않습니다.

그러고 보면 오감 대부분이 적잖은 허점을 안고 있습니다. 시각이 그렇게 예민하고 정확하다면 영화라는 예술은 아예 생겨나지도 못했을 겁니다. 착시현상을 이용한 게 바로 활동사진이라니까요. 아무리 개 코처럼 후각이 예민한 사람도 몇 시간, 아니 몇 십 분만 지나면 이내 무디어져 원래의 냄새를 크게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그런가 하면 아침에 한 번 잘못 마주친 고약한 냄새를 저녁까지 느끼기도 합니다. 실제 냄새는 가신 지 오래인데 머릿속에 그 냄새가 배어 있기 때문이겠지요. 주로 외피에서 느끼는 촉각도 예민한 것 같지만 의외로 그 둔감함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대포만한 주사라도 간호사가 엉덩이를 찰싹 때리는 순간 큰 통증을 느끼지 못한 채 살 속 깊이 파고듭니다.

시각은 직선적이어서 그나마 가리기 쉬운 편입니다. 미각은 직접 입에 넣지 않으면 알 수 없으니 시비할 일이 별로 없습니다. 촉각 역시 직접적으로 닿지 않으면 알아채기 어렵습니다. 지속적으로 나는 나쁜 냄새는 참기 어렵지만 코 스스로가 쉬이 피로해져 무감각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살아가면서 실제로 이웃과 가장 많은 시비를 일으키는 건 바로 청각과 소음으로 인한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내가 일으키는 소음은 여간 조심하지 않으면 큰 분쟁의 씨앗이 됩니다. 오죽하면 층간 소음 시비로 살인하는 경우까지 생기겠습니까. 주방에 대리석을 깔고 거실에 양탄자를 까는 호사(豪奢) 대신 차라리 방음장치를 잘해 두는 게 이웃끼리, 층간 평화를 유지하는 지름길입니다.

그런데도 가장 관리에 소홀하기 쉬운 게 또한 소음입니다.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가다 보면 눈치 없는 영감님, 아줌마들의 전화 통화 소리에 몇 정거장을 지나도록 고문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몇 분, 때로는 몇 십 분 아무 상관도 없는 남의 집안 대소사를 빠짐없이 함께 들어야 합니다. 지하철에서도 통화가 가능한 통신 문명을 자랑할 게 아니라 비상시에만 통화가 가능하도록 통제해 주었으면 바랄 때가 더 많습니다.

서울시청 도서관 안에 ‘쉿! 조용히, 사뿐사뿐, 생각을 방해하지 마세요~’라고 쓴 펼침막이 걸린 걸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도서관 바로 앞 서울광장에는 허구한 날 각종 단체의 행사로 안내 방송 소리가 요란합니다. 한쪽 모퉁이에서도 어느 기업 노조인지의 항의 시위로 확성기 소리가 귀를 찢을 듯합니다.

대형 백화점 안에서 시골 저자거리처럼 큰소리로 호객하는 모습은 참 기이해 보입니다. 다닥다닥 붙은 가게들이 저마다 손님을 끌겠다고 틀어놓는 시끄러운 음악 소리에 질려서 그런 골목은 피해 다닐 때가 많습니다.

주말이면 수많은 사람들이 산을 찾습니다. 도시생활에서 쌓인 심신의 피로를 씻기 위해서입니다. 거기에 좋아하는 음악이라도 곁들이면 더욱 즐겁겠지요. 그래서 간혹 라디오를 켜 들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음악 소리가 문제입니다. 나는 육자배기를 좋아하는데 곁에 있는 사람은 힙합을 좋아합니다. 나는 클래식 중에서도 장엄한 교향곡을 즐기는데 옆 사람은 늘어진 트로트를 즐깁니다. 그렇다고 저마다 제 좋아하는 음악 소리를 틀어대면 어찌 되겠습니까. 도심을 떠나 산속에서까지 서로에게 소음 고통을 주는 일이 되고 말 것입니다.

아예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 것이 산을 찾는 사람의 도리고 예의입니다. 음악을 듣기보다 자연의 소리를 듣는 편이 더 바람직하고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실제로도 자연과의 말 없는 대화를 즐기려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인간 세상에서의 온갖 소음과 시비와 갈등으로 인한 고통을 자연의 소리로 치유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 이들에겐 어떤 인위적인 소리도 소음일 뿐입니다. 겨우 서넛이 함께 걸으면서도 온 산이 울리도록 소리 높여 떠드는 사람, 주변을 아랑곳하지 않고 터뜨리는 낭자한 웃음소리, 간단없이 딸랑거리는 방울 소리가 모두 자연과의 대화를 방해하는 소음 공해라 하겠습니다.

집안에서는 가족들끼리 서로 질서와 예의를 잘 지켜야 화목한 가정이 이루어집니다. 마찬가지로 일터에서도 거리에서도 자연에서도 서로서로 공중도덕과 예의를 지켜야만 모두가 편안하고 즐겁고 밝은 사회가 될 것입니다. 소음의 적절한 자기통제야말로 그 사회 문화 수준의 척도라고 생각합니다.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자유칼럼그룹은 특정한 주의나 입장을 표방하지 않습니다.

필자소개

방석순

스포츠서울 편집국 부국장, 경영기획실장, 2002월드컵조직위원회 홍보실장 역임. 올림픽, 월드컵축구 등 국제경기 현장 취재. 스포츠와 미디어, 체육청소년 문제가 주관심사.

Copyright ⓒ 2006 자유칼럼그룹.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freecolumn.co.kr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