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담(鼎談)과 타협이 사라진 사회 [임철순]


www.freecolumn.co.kr

정담(鼎談)과 타협이 사라진 사회

2016.03.04


봄의 시작인 3월은 입학 개강 등 새로운 출발을 하는 시기입니다. 이 부푼 3월에 3의 뜻을 생각해봅니다. 3은 여러 의미를 담은 숫자입니다. 삼원색의 독자성과 융합, 천지인(하늘 땅 사람) 삼재(三才)의 조화, 삼가는 삶을 일깨우는 삼재(三災)관념, 삼권분립의 견제와 균형, 삼심제도가 지향하는 신중과 공정, 삼위일체의 굳건한 신앙, 가위바위보나 삼세판의 경쟁과 승복, 삼진아웃 쓰리 아웃의 종결과 교대, 이런 것들을 나열할 수 있습니다.

인생살이에는 삼인행 필유아사(三人行 必有我師)나 익자삼우 손자삼우(益者三友 損者三友)의 가르침이 있고, 삼인성호(三人成虎)의 조작과 거짓도 있고, 삼행시나 시조의 얼개인 초·중·종장의 승계와 반전도 있습니다. 3은 창조, 조화, 변화, 종결, 승복의 숫자입니다. 변화를 만들어 내는 최소의 숫자가 3입니다. 모든 일은 정(正)과 반(反)을 거쳐 합(合)에 이르는 삼단논법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3의 시각으로 우리 사회를 보면 참 답답하고 암담합니다. 갈등과 대립이 원만하게 해소되는 사례를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합의재판부는 세 명이 의견을 맞추면 좋다 해서 그렇게 운영된다지만, 우리 사회에는 그런 세 명도 없고 제3자가 설 자리도 없습니다. 대립하는 쌍방이 죽자 사자 멱살 잡고 싸움만 할 뿐입니다. 대치 중인 진영은 갈수록 강고해질 따름입니다.

한 30년 전만 해도 언론에는 정담(鼎談)이 있었습니다. 솥의 다리는 셋이니 세 사람이 솥발처럼 벌려 마주 앉아서 하는 이야기라는 뜻입니다. 어떤 문제가 불거졌을 때 세 사람을 모아 좌담을 하면 최선은 아닐지 몰라도 나름대로 의미있는 결론이 도출됩니다. 세 사람은 삼국이 정립(鼎立)하듯 서로 견제하고 완충 역할을 하면서 논의를 이어갑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정담이 없어졌습니다. 첨예하게 대립하는 쌍방과, 토론의 진행자가 있을 뿐입니다. 흔히 ‘끝장토론’이라는 이름 아래 편 갈라 진행하는 대담은 ‘너 죽고 나 살기’의 쟁투장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회가 변해서 정담이 없어진 건지, 정담이 없어져 사회가 이렇게 된 건지는 모르겠습니다. 복싱은 라운드 당 3분씩인데, 이런 쟁투는 시한도 규칙도 무시된 채 끝없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각종 정부기관이나 언론매체의 심의기구, 이런저런 위원회에서도 여와 야의 대리전쟁이 벌어질 뿐 제3의 조정/완충세력이 없으니 무슨 결정이든 쉽게 나지 않고 결정된다 해도 반발과 무효화 요구가 이어집니다.

단원고 ‘4·16 기억교실’의 경우, 사고로 희생된 학생들의 교실을 보존하는 문제로 촉발된 갈등과 대립이 새 학기가 시작돼 입학식도 마친 시점까지 해소되지 않고 있습니다. 나는 그 교실을 학교에 돌려주어 재학생과 신입생들의 불편과 피해를 막고, 추모·기억시설은 별도로 조성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런 시설에 대해 아무것도 약속받지 못한 희생자부모들에게 교실을 돌려달라고 요구하는 건 무리입니다.

재학생과 희생자, 이 두 부모단체는 2월 28일, 3월 2일에 이어 8일에 다시 만나 해결책을 논의키로 했습니다. 종교인평화회의가 중재한 결과입니다. 그동안 세월호 문제로 떠들고 탄식하던 사람들은 뭘 했나요? 문제 해결을 위해 나서야 할 제3자는 국회의원을 비롯한 그 지역 정치인들, 안산교육지원청과 경기도교육청과 같은 교육당국 등 여럿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해가 바뀌도록 대립을 수수방관하다가 종교단체를 앞세워 뒤늦게 나서고 있습니다.

학부모단체들과 이 문제에 관여하는 기관 등이 합의한 해결원칙은 ‘솔직하게 소통하고’  ‘상호 존중하면서’  ‘만장일치로 합의하기’  세 가지라는데, 늦었지만 이제라도 그런 원칙을 잘 지켜 의미 있는 타협 사례를 만들어내면 좋겠습니다.

우리 사회는 문제 해결능력을 키워야 하고, 합의에 승복하는 자세를 길러야 합니다. 독일의 원전폐기 정책을 살펴봅니다.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집권 후 전 정권의 원전폐기 검토 정책을 무효화한 장본인입니다. 하지만 2011년 3월 11일 동일본 대지진으로 상황이 바뀌자 ‘안전한 에너지 공급을 위한 윤리위원회’, 이른바 ‘17인 위원회’를 발족시켜 이 문제를 논의토록 했습니다.

위원회가 그해 4월 18일에 개최한 11시간의 토론은 TV로 생중계됐고, 국민들은 위원회에 다양한 의견을 보탰습니다. 전 국민이 토론에 참여한 셈입니다. 이 토론을 바탕으로 17인 위원회가 ‘2022년까지 모든 원전 가동을 중단하라’는 보고서를 5월 29일 정부에 내자 메르켈 총리는 다음 날 바로 원전 폐쇄를 발표했습니다. 사회적 합의 실천을 위해 자신의 정책을 백지화한 것입니다.

토론에 참여한 원전 유지론자나 대형 전력회사들은 반대했지만, 국민의 94%가 정부 정책을 지지하고 나서니 그들도 승복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부럽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런 합의의 과정과 승복을 경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까지 이렇게 관용과 상호 존중이 없는 암담한 미타(未妥) 사회를 살아가야 하는 걸까요?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자유칼럼그룹은 특정한 주의나 입장을 표방하지 않습니다.

필자소개

임철순

1974~2012년 한국일보 근무. 문화부장 사회부장 편집국장 주필 및 이사대우 논설고문을 역임했다. 
한국기자상, 삼성언론상, 위암 장지연상 수상. 
현재 이투데이 주필 겸 미래설계연구원장, 자유칼럼그룹 공동대표, 한국언론문화포럼 회장, 
시니어희망공동체 이사장.

Copyright ⓒ 2006 자유칼럼그룹.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freecolumn.co.kr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