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리 브란트가 친일 논란을 본다면 [이성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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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 브란트가 친일 논란을 본다면

2016.02.25


근래 《친일인명사전》이 교육계의 새로운 화두로 떠올랐습니다. 각 시·도 교육청이 일선 학교에 ‘친일파 명부’를 비치하도록 독려한 것입니다.

친일파 논란을 보며 필자는 문득 알랭 레네(Alain Resnais) 감독이 1959년에 연출한 영화 <히로시마 내 사랑(Hiroshima Mon Amour)>이 생각났습니다. 이 영화는 원폭 피해의 참상을 통해 전쟁을 반대하는 영화를 촬영하기 위해 히로시마에 온 프랑스 여배우가 일본인 건축가를 만나 사랑에 빠지면서 서로가 겪은 전쟁 경험을 나눈다는 것이 줄거리입니다.

이 영화에서 여주인공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이 프랑스를 강점한 시기에 독일군 장교와 사랑에 빠집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나자 여주인공은 대낮 길거리에서 행인들이 해대는 포악한 욕설을 들어야 했고, 동네 이웃들이 자신의 얼굴에 침을 뱉어대는 모욕을 받아야 했으며, 거리 한복판에서 한 사내에게 강제로 머리카락을 잘리며 ‘협력자내통자(collaborateur)’라고 낙인찍는 수모를 당합니다.

필자는 이 영화를 보면서 여주인공이 독일의 ‘스파이’가 되어 프랑스에 반하는 활동을 한 것도 아니고, 단지 적대국의 한 남자를 사랑했을 뿐인데 ‘collaborateur’라고 매도당하는 것이 아주 가슴 아팠습니다. 영화를 보고 한참 뒤에 ‘마녀사냥’이라는 단어를 접하며 이 영화의 여주인공이 겪은 일이 바로 마녀사냥의 한 사례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전쟁을 일으키고, 프랑스를 침범했던 독일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생각해봅니다. 신명을 다해 나치 정권에 적극 가담한 사람에게는 전후 반세기가 훌쩍 지난 현재에도 가차 없이 대가를 치르게 합니다. 얼마 전 95세 고령자를 나치 정권의 친위대 요원으로 활동하며 유대인을 학살하는 데 능동적으로 가담했다는 혐의로 법정에 세우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나치당에 가입하고 군인, 공무원, 교사로 근무한 일반 사람들을 전쟁 후 나치 당원이었다는 이유로 사회 문제를 삼은 적은 결코 없습니다.

나치 정권 시절 수도원에 피신해 지냈고, 전후 초대 총리로 선출된 콘라트 아데나워(Konrad Adenauer, 1876~1967)가 1949년에 첫 내각 명단을 발표하자, 승전국인 프랑스와 영국에서 내각에 임명된 장관들이 나치 당원으로 활동한 경력이 있다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습니다. 이에 아데나워 총리는 “한 나라를 유치원생으로 운영할 수는 없다”고 일축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그만큼 나치 정권 시절 나치 당원이 아닌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상황은 다르지만 이 일과 맥을 같이하는 사례가 있습니다.

1960년대 초 서베를린 시장을 지내며 두각을 드러내고, 총리 시절(1969~1974) 독일 통일의 기초를 닦은 빌리 브란트(Willy Brandt, 1913~1992)의 정치 행보입니다.

빌리 브란트는 아버지가 누군지 모른 채 편모 슬하에서 성장했습니다. 그의 본명은 헤르베르트 에른스트 카를 프람(Herbert Ernst Karl Frahm)입니다. 1920~1930년대 청년 프람은 당시 새바람을 일으킨 공산주의 사상에도 영향을 받지만, 그에게 이름을 지어준 의조부(Stiefgrossvater) 프람에 영향을 받아 독일사회당(SPD)에 입당했다가 곧 탈당하고 독일사회노동당(SAPD)에 들어가 활동합니다. 시쳇말로 그는 극좌익 성향의 청년이었던 것입니다.

1933년 히틀러가 정권을 잡자, 프람은 노르웨이로 망명합니다. 그리고 빌리 브란트(Willy Brandt)라는 익명(Deckname)으로 지하운동에 가담하고, 그 이름으로 된 노르웨이 여권을 소지한 채 독일에 잠입해 활동하기도 합니다. 전쟁이 끝나자 그는 독일로 돌아와 그 경력을 바탕으로 독일사회당(SPD)에서 정치인으로 새로운 출발을 합니다. 그 후 서베를린 시장을 거쳐 중앙 정치 무대에 진출합니다. 그 당시는 ‘철의 장막’, ‘죽의 장막’으로 표현하던 동서 냉전 시기였는데, 독일 사람들은 빌리 브란트를 못 미더워했습니다. 사담을 나누는 자리에서는 그의 공산당 당적을 거론하기도 하고, 조국을 배신하고 빌리 브란트란 익명으로 독일에 잠입해 스파이 활동을 한 사람이 그 이름을 자랑스럽게 계속 사용한다며 불편한 심기를 숨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빌리 브란트가 1971년에 노벨 평화상을 받자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그런 이야기는 ‘침묵의 늪’으로 잠적해버립니다. 필자는 독일사회가 만드는 영웅의 탄생을 본 것입니다.

필자는 요즈음 우리 사회에서 일고 있는 친일파 논란으로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혹시 ‘나도 친일파 자손인가?’ 생각해보기도 합니다. 그 이유는 선친이 일본에 유학한 1 세대에 속하기도 하고, 창씨개명을 거부하지 못하고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꿨기 때문입니다. 필자는 지금도 일본식 이름을 기억합니다. 그런데 우리 선대는 왜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꿨을까, 자문해봅니다.

일제는 1930년대 후반부터 ‘내선일체(內鮮一體)’라는 미명 아래 조선어 교육은 물론 한글 사용 자체를 금지하고, 인류 역사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없는 창씨개명(創氏改名) 정책을 무섭게 밀어붙입니다. 여기서 ‘내(內)’란 일본을 말하고, ‘선(鮮)’은 조선을 말합니다. 요컨대 조선과 일본은 하나(一體)이니 조선인을 일왕(日王)의 신민(臣民)으로 만들어 결국 우리 문화를 말살해버리겠다는 의도였습니다. 그러한 탄압 정책 아래에서 우리 선대는 금융거래를 포함한 사회생활을 하며 살아남기 위해서 일본식으로 개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온갖 고행을 감내한 것입니다. 참으로 무섭고 참혹한 시대상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일제의 강압적 식민 정책 아래에서 가문의 역사가 깃든 이름을 어쩔 수 없이 버려야만 했던 선대의 아픔을 후세인 우리가 조금이라도 보듬어야지, 지탄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친일 행적이 분명한 매국노나 애국지사에게 비수(匕首)를 들이댄 배신자까지도 두둔하자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한편 이번 《친일인명사전》 발간에 적극 참여한 집필자 중 선대가 일제강점기에 일본식으로 이름을 바꾸지 않은, ‘족보가 깨끗한’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생각해봅니다. 그러면서 빌리 브라란트가 우리네 친일 논란을 본다면 뭐라 할까 궁금해집니다. 

필자가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이제 친일 문제를 거론하며 사회 갈등을 조장하는 소모적 논쟁을 그만두어야 할 때라는 것입니다. 덮어둘 것은 덮어두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 사회도 영화 <히로시마 내 사랑>에서처럼 순수한 마음으로 독일군을 사랑한 여인을 ‘협조자내통자’라고 낙인찍는 그런 사회가 되고, ‘집단 마녀사냥’이란 무서운 함정에 빠져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자유칼럼그룹은 특정한 주의나 입장을 표방하지 않습니다.

필자소개

이성낙

뮌헨의과대 졸업. 프랑크푸르트대 피부과학 교수, 연세대 의대 교수, 아주대 의무부총장 역임.
현재 가천대 명예총장, 의ㆍ약사평론가회 회장, (사)현대미술관회 회장, (재)간송미술문화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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