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건설과 IT를 잇는 다리입니다” - 주기범 한국건설기술연구원 ICT융합연구소장

주기범 한국건설기술연구원 ICT융합연구소장




   “몇 년 안에 건설 분야의 대한민국 표준이 세계 표준이 될 겁니다.”


‘대한민국 표준=세계 표준’을 자신 있게 부르짖은 이가 있으니 바로 주기범 한국건설기술연구원(건설연) ICT융합연구소장이다. 그는 20여 년간 ‘건설과 IT의 만남’이라는 낯선 길을 걸으며, 건설연의 과거와 미래를 상징하는 인물로 손꼽힌다. 


4일 주 소장에게 ‘건설연에서의 24년’과 앞으로의 미래를 듣기 위해 경기 고양시 일산서구 킨텍스 인근의 흑염소 요리 전문점 ‘청궁’을 찾았다. 


“날이 좀 쌀쌀하거나 체력이 떨어진 느낌이 들 때면 이따금씩 몸보신 하러 찾곤 합니다.” 


부추와 깻잎, 버섯위에 흑염소 고기가 올라간 전골냄비는 소탈한 주 소장의 모습과도 잘 어울렸다. 전골이 끓어오르는 동안 그는 어떻게 건설ICT 분야에 뛰어들게 됐는지 이야기를 하나씩 풀어 놓았다.


주기범 한국건설연구원 ICT융합연구소장은 도로 시설물 유지관리 정보시스템 구축, 건설자재관리 시스템 등 굵직한 건설ICT 사업을 책임져 건설정보화에 크게 이바지했다는 평을 듣는다.- 한국건설기술연구원 제공 

“1992년쯤 일 겁니다. 컴퓨터가 286에서 386으로 넘어가던 시절 아버지께서 컴퓨터 한번 배워보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컴퓨터를 배우러 간 주 소장이 처음 마주한 과목은 ‘자료구조론’ ‘데이터베이스’ 같은 지극히 원론적인 개념이었다. 그는 “신기하게도 재미가 있었다”며 “그때 처음으로 IT에 눈을 떴다”고 말했다. 


컴퓨터와의 운명적인 만남이 계기가 된 것일까. 그가 건설연에서 처음 맡은 업무는 데이터베이스 구축과 운영이었다. 건설업계에 다양한 자재와 정보들이 전산화의 물결을 탈 무렵, 건축과 IT 양쪽에 모두 소양을 갖춘 ‘융합 인재’인 그가 탄탄대로를 걷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전골이 한소끔 끓어 오른 뒤 불을 살짝 줄이자 깻잎 향이 살짝 감도는 전골 냄새가 군침을 자극했다. 불을 줄이는 사이 그가 옛날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주기범 소장이 1993년 찍은 사진을 들고 설명하고 있다. - 한국건설기술연구원 제공 

“1993년에 찍은 사진인데요, 이때 참 잘생겼었네요.”(웃음)


실제로 이목구비가 뚜렷한 사진 속 22년 전 주 소장은 배우 손창민을 연상케 할 만큼 훈남이었다. 

“건설자재 데이터베이스를 만들어 놓고 온라인으로 서비스를 한다는 내용을 장관에게 처음 보고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주 소장은 건설자재 데이터베이스 운영을 시작으로 도로시설물 유지관리 정보시스템 구축, 건설자재관리 시스템 등 굵직한 건설ICT 사업을 책임져 건설정보화에 크게 이바지했다는 평을 듣는다.


최근 몇 년간 주 소장은 건물정보모델링(BIM·Building Information Modeling)을 토목 구조물에 적용하고 표준화하기 위한 연구를 이끌었다. BIM은 3차원 건축물 모델로 다른 분야의 전문가나 발주자가 건축물을 한눈에 이해할 수 있도록 해 시공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예산 낭비와 구조변경 등을 막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주 소장은 “현재는 ICT세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며 “새로운 ICT기술을 건설 분야에 효과적, 효율적으로 접목하는 것이 건설연과 ICT융합연구소의 역할”이라고 강조했다.


식사가 끝나갈 무렵 주 소장에게 ‘건설연’으로 삼행시를 부탁하자 주 소장은 “회의 때 보면 즉석에서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꺼내놓는 친구가 있는가 하면 순발력이 떨어지는 대신 진득하게 일을 잘 하는 친구도 있다”며 운을 뗐다.


“저는 후자에 속합니다. 시간을 좀 주셔야 겠는데요.” 장고의 시간 끝에 주 소장이 삼행시를 완성했다.

건설연입니다. 설마 모르시는 건 아니겠죠? 연구 잘하는 정부 출연연이 되겠습니다.


‘연구 잘하는 정부 출연연’이라는 문구에서 건설연과 ICT융합연구소에 대한 자부심이 느껴졌다. 실제로 주 소장은 ‘건설연을 최고의 직장으로 추천하는가’라는 질문에 망설임 없이 “그렇다”고 답했다.


“저는 건축학 학사로 건설연에 입사했습니다. 만약 다른 직장에 취직했다면 지금까지 공부와 연구를 이어오지 못했을 겁니다. 자신이 배우고, 연구하고 싶은 학문 분야를 계속해서 파고들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장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주 소장이 이 자리에 오기까지 ‘탄탄대로’만 걷지는 않았을 터. 연구원 생활에서 특별히 실수를 하거나 낭패를 본 일은 없는지 슬며시 물었다. 


“낭패요? 글쎄요...”라며 말끝을 흐리는 그에게 특별한 해프닝을 기대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그렇지 않았다.


“기억에 남는 큰 실수는 없었습니다. ‘이 정도로 하고 넘어가면 되겠지’ 싶은 것들은 늘 뒤통수를 치기 마련이거든요. 그래서 조금이라도 찜찜한 구석이 있으면 두 번 세 번 확인하며 지냈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기자가 전날 보낸 질의서에 빼곡하게 ‘모범 답안’을 적어온 주 소장에게서 실수를 잘 하지 않는 성격이 엿보였다. 


“종종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살아보니 ‘어떻게든’ 되는 일은 없더라고요. 작은 것 하나라도 고민하고, 계획하고 노력했을 때 조금씩 길이 보였습니다. 막연하게 기다리기보다 작은 것 하나부터 고민하고 이뤄내는 삶이 좋은 것 같습니다.”


‘진득 하니 일을 잘 하는’ 축에 속한다는 그 답게 꼼꼼하고 신중한 태도가 지금의 그를 만든 셈이다. 마지막으로 10년 후의 목표에 대해 묻자 따뜻한 인간미가 느껴지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때면 은퇴를 앞두고 있을 텐데, 후배들에게서 ‘이 선배 참 멋있는 사람이었다’라는 평가를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또 그때도 좋아하는 선배, 후배들과 함께 술 한 잔 기울일 수 있는 여유가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습니다.”


주기범 한국건설기술연구원 ICT융합연구소장이 보양식으로 이따금씩 찾는다는 흑염소 전골. - 신선미 기자 vamie@donga.com 제공 

동아일보 염재윤 기자 ds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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