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발소에 가는 이유" - 시인 윤병무


윤병무 시인 제공 출처 동아사이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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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요일을 피해 한 달에 한 번 찾아가는 곳이 있다. 세 평 남짓한 그곳의 노부부는 춘하추동 나를 반긴다. 내가 쓴 시의 소재이기도 한 그곳 문 앞에는 자유, 평등, 박애의 상징 색인 파랑, 하양, 빨강 띠가 철야 작업을 가능케 한 20세기의 형광등을 둘러싼 원통형 아크릴 속에서 역사는 상향 발전한다는 듯이 나선형으로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다.

 

이곳이 이발소임을 알리는, 제사상에 오르는 색색의 옛 과자 꽃하스가 연상되는 회전 간판 등(燈)이다. “정통 이발의 명가”라는 홍보 문구가 유리 벽면에 씌어 있는 그곳은 8년 전부터 내가 꾸준히 다니는 우리 동네의 유일한 이발소 ‘ㅅㅅ이용원’이다. 어제 그곳에 다녀왔다. 문을 여니, 한겨울에도 화분만한 작은 전기난로 두 개로 난방을 유지하는 그곳의 3인용 허름한 소파에 전기장판을 깔고 앉아 TV를 시청하고 있던 노부부가 언제나처럼 환하게 웃으며 반겨주었다.

 


어디든 단골이 좋은 것은 상호간에 별도의 주문이 필요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손님인 나는 철제 의자에 앉기만 하면 된다. 이발사는 먼저 수건을, 그 다음은 흰 가운을 손님 목에 얌전히 두른다. 그와 동시에 손님은 눈을 감는다. 분무기에서 퍼진 작은 물방울들이 머리에 뿌려지고 성근 빗이 머리칼을 고르고 나면 본격적으로 이발이 시작된다.

 

수다스런 왜가리처럼 은빛 가위는 자꾸 입을 벌려 손님 머리카락에 말을 건다. 하지만 손님은 매번 대꾸하지 않을뿐더러 그 소리가 아스라한 자장가처럼 들린다. “싹둑싹둑.” 윗머리에서 말을 걸기 시작한 은빛 가위는 이번에는 귀밑머리에 대고 속삭인다. “삭둑삭둑.” 그 즈음이면 그 자장가 소리도 희미해지고 손님은 살짝 고개를 떨군다.

 

참회자처럼 떨군 고개를 이발사의 너그러운 두 손끝이 공손히 일으켜 세우기를 두세 번 반복하고 나면 끝내 대꾸 없는 손님에게 야속한 은빛 가위도 입을 다물고 왜가리처럼 어디론가 날아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이어서 목에 둘러진 흰 가운과 수건이 역순으로 풀어지고 나면 철제 의자 등받이가 돛을 접듯 손님과 함께 편안히 뒤로 눕는다.

 

이로써 가장 행복한 시간이 찾아온다. 예전 같으면 달궈진 함석 연통을 스친 비누 거품이겠지만, 그것은 옛말. 온수로 비벼진 두툼한 거품 붓이 손님 얼굴에 하얀 원형 그림을 그리고 나면 뜨거운 물수건이 턱부터 살포시 그림을 덮는다. 그 순간 나의 일상의 가장 평안한 시간이 시작된다.

 

산책을 할 때도, 식사를 할 때도, 변기에 앉아 있을 때도 온전히 쉬지 못하지만, 심지어 잠을 잘 때도 우리는 꿈속을 달리지만, 온갖 잡상을 떠나 아지랑이 같은 나른함에 감싸여 궁로(窮老)한 손길을 믿고 면구한 얼굴을 맡긴 채 눈을 감고 이발소 의자에 누워 있을 때면 누워 있음도 잊게 된다.

 

아득해지는 그 사이에, 나는 유년 시절로 회귀해 잡음도 섞여 흘러나오는 라디오 소리, 그 환청의 노랫소리를 듣는다.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로 시작하는 이미자의 「동백 아가씨」의 가락에 맞춰 이발소 노부인은 민들레 꽃씨 같은 솜털까지 면도해주신다.

 

이발이 끝나고 면도가 끝나고 환청의 옛 노랫소리가 끝나고 다시 돛을 편 철제 의자에서 일어서면 바닥에는 시름과 함께 한 달 동안 웃자란 내 검고 흰 머리칼이 흩어져 수수 빗자루를 기다리고 있다. 나의 머리카락이 자라는 유일한 이유가 평안한 그곳에 있다. 그리고 세월은 뜨거운 물수건이 주름진 얼굴에서 식는 속도만큼만 흘러간다. 그래서 한 해가 저물 무렵이면 그곳의 노부부는 내게 새해 달력을 부탁하는 것이다.

 

※ 저자소개

윤병무

시인. 시집 <5분의 추억>과 <고단>이 있다.

 

※ 편집자주

뉴스를 보다보면 무엇인가를 분석해서 설명을 해주는 내용이 대다수입니다. 그래야 원인을 정확하게 찾고, 대책을 세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가끔은 고개를 들어 사물을 그대로 보는 자세도 필요합니다. 대상을 온전히 바라보면 분석한 내용을 종합할 수 있는 통찰력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준비했습니다! 시인의 눈으로 일상을 바라보는 ‘생활의 시선’을 매주 연재합니다. 편안한 자세로 천천히 읽으면서 감정의 움직임을 느껴보세요.

윤병무 시인 ybm1966@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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