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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색 소시지와 아듀 2015년
2015.12.17
며칠 전 학교 선배와 점심을 함께 먹었습니다. 김치찌개와 제육볶음을 시켰더니 몇 가지 전이 반찬으로 나왔습니다. 그중에 전이라고는 하기에는 애매한 반찬도 있었는데 바로 분홍색 소시지를 계란물에 담갔다가 기름에 지진 반찬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반찬과 전 중에서 선배와 필자의 젓가락이 먼저 간 곳이 바로 그 분홍색 소시지였습니다.“초등학교 다닐 때, 도시락에 이 소시지 반찬을 가져오는 날은 날아오는 젓가락을 피해서 사투를 벌여가며 밥을 먹어야 했지. 하하.”“선배도 그랬어요? 우리 때도 소시지 반찬은 있는 집 애들이나 싸가지고 왔었는데…. 허허.”지금은 고인이 된 코미디언 한주열 씨가 광고를 했던 한냉 소시지와 역시 고인이 된 배삼룡 씨가 투자를 했다고 알려진 해바라기 소시지, 그리고 난공불락의 1위를 고수했던 진주햄 소시지까지 1970년대 도시락에 싸가고 싶은 반찬 1순위가 바로 분홍색 소시지였습니다.그런데 그렇게 맛있게 먹었던 소시지였는데 40년 세월이 흘러 어른이 되어 다시 먹으니 예전 맛이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생선살을 으깨서 다진 연육에 밀가루를 섞고 감미료와 인공색소로 맛을 낸 분홍 소시지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은 공정으로 만들어집니다. 따라서 소시지의 맛이 변했다기보다는 그걸 먹는 사람의 입맛이 변한 것일 겁니다.고기의 함량이 높은 소시지와 햄을 마트에 가면 원 플러스 원 행사로 살 수 있는 지금 같은 시대에 분홍색 소시지는 그저 옛 추억을 떠올리며 웃음 짓게 만드는 역할은 할 수 있어도 맛이 있어서 다시 찾게 되는 음식은 아닌 것입니다. 분홍색 소시지를 먹으면서 몇 해 전, 방송을 하면서 타 본 기아 자동차의 ‘브리사 1000’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1970년대에 대한민국 택시의 주종을 이뤘던 자동차였던 브리사 모델 중에서도 브리사 1000은 고급모델이었습니다. 어릴 적 기억에는 그렇게 좋던 자동차가 세월이 흘러 다시 타보니 안쓰러울 정도로 형편없었던 것입니다. 일단 요즘 나오는 소형차보다 훨씬 작은 차체에, 무척 관리가 잘된 차였음에도 시속 70Km가 넘으니 도로에서 올라오는 모든 소음과 충격들로 더 이상은 무서워서 달리기가 겁이 날 정도였습니다.지금 생산되는 자동차는 브리사나 포니에 비할 수 없는 품질과 안전 및 편의 사양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아마도 1970년대에 이러한 자동차를 만들었다면 마치 UFO 취급을 받았을 겁니다. 아마 영화 007 시리즈에 등장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초등학교 시절 학년이 바뀔 때마다 가정환경 조사를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담임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눈을 감게 하고, “집에 텔레비전이 있는 사람 손 들어 봐요.”, “집에 자동차 있는 사람 손들어 봐요.”라고 말씀하시던 기억이 납니다. 슬쩍 실눈을 뜨고 훔쳐 본 그 당시 기억에 텔레비전이 있는 집이 절반이 되지 않았고, 자동차가 있는 집은 한 반에 한두 명뿐이었습니다.지금 생각하면 정말 격세지감을 느끼는 풍경이었습니다. 지금이야 웬만한 형편만 돼도 자동차를 보유할 수 있고, TV는 방마다 한 대씩 있는 집도 많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잘살게 된 것만큼 더 행복해지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의 길을 걸어온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물질은 넘쳐나는데 마음은 더 헛헛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불가(佛家)에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불교에서 승려들이 여름 동안 한곳에 머물면서 수행에 전념하는 하안거(夏安居)를 마치고 해제(解制) 법문(法文)을 하시는 고승(高僧)이 주장자(柱杖子:지팡이)를 옆에 놓고 가리키며,"이 막대기를 톱이나, 도끼나, 손을 대지 말고 짧게 만들어 보아라!"라고 말씀하셨답니다. 3개월 동안 머리를 싸 동여매고 공부를 하였건만 모두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는데, 바로 그때 한 스님이 앞으로 나가 3배를 올리고"제가 해 보겠습니다."하고는 밖으로 나가더니 크고 긴 막대기를 가져다가 그 주장자 옆에 놓았다고 합니다.고승은 빙그레 웃으시며"길고 짧다는 것은 상대적 개념이다. 역시 그대가 해냈구나!"하시며 만족해하셨답니다.40년 전보다 더 좋은 집에서 더 좋은 음식을 먹고 더 많은 물질적 풍요를 느끼고 사는데도 더 행복하지 못한 이유는 내가 가진 것이 남들이 가진 것보다 더 적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욱 절망스러운 것은 열심히 일하면 더 높은 계층으로 올라설 수 있다는 희망이 사라진 것입니다. 수십 년 전에는 열심히 일하면 자신의 세대에 계층 상승이 가능하다고 믿는 국민이 절반이 넘었는데 지금은 22%에 불과한 나라가 되었습니다.내가 가진 것이 남들이 가진 것에 비해 적다고 느끼는 것만으로도 불행하다고 생각할 텐데 이러한 상황이 나아지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은 사람들을 절망으로 이끕니다. 사실 위에서 예로 든 주장자 이야기는 위만 쳐다보지 말고 아래도 내려다보면서 스스로 만족함을 깨우치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은 종교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이야기일 뿐입니다. 인간의 본성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종교적 해탈로 행복을 느낄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2015년을 보내고 2016년이 다가옵니다. 총선을 앞두고 정치권은 어느 줄에 기대야 살아남을지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재벌 기업에서는 대리급의 젊은 직원을 희망퇴직으로 내몰고 있고, 정부가 추진하는 경제개혁 법안을 노동계에서는 결사반대하고 있습니다. 저마다 자신이 가진 지팡이의 크기만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미래의 희망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지금 당장 내 몫을 챙기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결국 힘 있는 자들이 항상 더 챙기면서 게임이 끝납니다. 그 과정 속에 도덕적 정의와 배려는 실종된 지 오랩니다.분홍색 소시지의 추억이 있는 분들은 꼭 한번 옛날 도시락 반찬으로 싸가던 그때를 생각하면서 분홍색 소시지를 드셔보시길 권합니다. 그 작은 반찬에 행복해하던 그때를 생각하면서 지금 왜 우리는 행복하지 않은가를 곰곰이 생각해 보시기를 권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다시 행복해질 수 있는지도 생각해 봤으면 좋겠습니다. 피곤한 한 해를 보냈습니다. 2016년은 행복한 한 해가 되길 간절히 바라봅니다.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자유칼럼그룹은 특정한 주의나 입장을 표방하지 않습니다.
필자소개
박상도
SBS 아나운서. 보성고ㆍ 연세대 사회학과 졸. 미 샌프란시스코주립대 언론정보학과 대학원 졸. 현재 SBS TV 토요일 아침 '모닝와이드'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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