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배운 첫 문장 [임철순]

www.freecolumn.co.kr

내가 배운 첫 문장

2015.12.14


며칠 전에 할아버지 제사를 지냈습니다.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돌아가셨으니 벌써 53주기네요. 제사를 준비하던 아내가 “살아 계셨으면 올해 몇 살이야?”하고 물어 향년(享年)도 따져보고 몇 주기인가도 생각하게 됐습니다. 살아 계시다면 120세도 넘습니다. 수년 전부터 할아버지 제삿날에 할머니 제사도 함께 지내고 있는데, 언제까지 제사를 지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나는 엉터리입니다. 제사의 형식과 순서, 음식 진설에 대해 너무 무지해서 제사 때마다 ‘참고자료’를 들춰보지만 돌아서면 곧 잊어버립니다. 조부모와 아버지의 제사를 모신 지 얼마 안 됐을 때는 아이들이 “아부지, 좀 제대로 해요” 그러기도 했는데, 요즘은 포기했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나는 그저 홍동백서, 조율이시 이런 말만 되뇌고 있습니다.

어렸을 때 제사를 마친 할아버지가 마루에서 소지(燒紙)를 하는 걸 본 기억이 납니다. 지방(紙榜)에 불을 붙인 뒤 두 손으로 종이를 공 다루듯 하는 모습은 왠지 무섭고도 우스웠습니다(할아버지, 불장난하면 오줌 싸요!) 그때 제사법을 제대로 배워둘 걸 하는 생각도 납니다.

‘계룡산 호랭이’라고 소문났던 할아버지는 되게 무서웠고, 배포가 커서 동네 사람들을 휘어잡고 사는 어른이었습니다. 한번 혼을 내시면 절로 눈물이 찔끔 나왔지요. 나는 할아버지와 함께 사랑방에서 기거했는데, 언젠가 집에 불이 난 일이 있습니다. 뭔지 소란스럽고 창호지가 우련 붉어 잠을 깼는데, 할아버지는 그 와중에도 바로 앉은 자세인 채 “집에 불이 났는데 잠만 자느냐?”고 그랬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 할아버지가 초등학교 입학 2년 전에 고종사촌형과 나를 사랑방에 무릎 꿇고 앉게 한 뒤 이상한 책을 펴놓고 서산(書算)대로 글자를 짚으시며 따라 읽으라고 했습니다. 수줍음이 많았던 나는 왠지 무서워 따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고종사촌형이 따라 읽는 걸 보고서야  “윗 상(上)” 그랬습니다. 한자를 배우기 시작한 것입니다.

우리가 배운 것은 계몽편(啓蒙篇· 사진)이었습니다. 누가 지었는지 모른다는 설, 조선 후기 장혼(張混)이 지었다는 설이 엇갈리는 계몽편은 천자문(千字文)과 동몽선습(童蒙先習) 다음에 읽는 초학 아동교재입니다. 할아버지가 왜 천자문부터 가르치지 않으셨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계몽편은 “上有天 下有地 天地之間 有人焉 有萬物焉 日月星辰者 天之所係 江海山嶽者 地之所載”라고 시작됩니다. “위에 하늘이 있고 아래에는 땅이 있으며 하늘과 땅 사이에 사람이 있고 만물이 있다. 해와 달과 별은 하늘에 걸려 있고 강과 바다와 산은 땅에 실려 있다”는 뜻입니다. 천 지 인 만물로 문장이 시작됩니다. 천지와 자연 속의 인간에 대해 알려주면서 세상의 이치와 인간의 도리를 가르치는 것이 계몽, 문자 그대로 몽매함을 일깨워주는 일인 셈입니다.

철들어 읽은 책이지만, 이미륵의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에는 아들에게 한자를 가르치는 아버지가 天(천)이라는 글자를 설명하면서 “어디서든 이 글자를 만나거든 몸가짐을 바로 하라”는 요지의 말을 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하늘은 그만큼 엄정하고 공평하고 무서운 것입니다. “위에 하늘이 있고 아래에 땅이 있다”는 계몽편의 첫 문장은 당연하고 건조한 자연과학적 진술 같지만 얼마나 깊이 생각해야 할 우주의 원리이며 안심이 되는 사실인가요? 이로써 상하의 질서를 배우고 천지간에 존재하는 인간의 일을 알게 되는 단초가 이 문장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 인간과 만물이 ‘있다’[有]는 존재에 대한 개념어로 연결돼 서로 관계를 맺습니다.

이에 비해 동몽선습은 “天地之間 萬物之中 唯人最貴”,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만물의 무리 가운데 오직 사람이 가장 존귀하다고 시작됩니다. 사람이 가장 존귀한 것은 오륜(五倫)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을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은 당연하고 옳은 생각입니다. 그런데 계몽편에 비하면 뭔가 좀 갑작스러운 기분이 듭니다. 계몽편에는 그와 비슷한 말이 마지막 장인 인편(人篇)의 첫머리에 나옵니다. 나로서는 하늘과 땅을 말한 뒤 인간을 언급한 계몽편이 당연히 더 인상적이고 좋습니다.

나는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계몽편을 두 번 떼어 책거리를 했습니다. 아들을 위해 즐겁게 떡을 빚었던 어머니는 내가 당시 계몽편을 처음부터 끝까지 막힘없이 외웠다고 합니다. 지금은 오히려 모르는 문장과 글자가 있을 정도이지만 그때는 열심히 배우고 익혔던 것 같습니다.

아이들이 새를 잡으려고 몰려다닐 때 사랑방에서 글 읽고 있는 나의 목소리를 흉내 내며 지나가던 게 생각납니다.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한자를 아는 게 신기했던지 상급학생들이 땅에 한자를 써보게 하던 것도 생각납니다. 사랑방에 손님이나 붓 장수가 오면(1950년대 공주 산골에는 붓을 팔러 다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할아버지는 나에게 계몽편이나 삼국지연의를 읽게 하며 손자 자랑을 했습니다. 그때 어른들이 숙성(夙成)하다고 말하는 걸 들었는데,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기분이 좋았던 기억이 납니다.

할아버지는 손자에게 인쇄된 계몽편을 주고 외손자에게는 손수 붓으로 쓴 책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아쉬운 것은 계몽편을 뗀 다음에 더 이상 다른 교재로 공부를 더 하지 않은 점입니다. 논어 맹자 시경 서경 등으로 공부가 이어졌으면 참 좋았을 텐데 할아버지에게는 이미 손자를 가르칠 여유가 없었던 같습니다.

그러나 그 정도 가르침이라도 얼마나 소중한가요? 태어나서 배운 첫 문장이 ‘上有天 下有地’라는 게 참 다행스럽고 자랑스럽습니다. 우리 선조들은 이미 아이 때부터 인간과 자연에 대한 사유를 시작해 확고한 인식을 다지고 어른이 됐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항상 하늘을 두려워하고, 바르게 살려고 노력하고, 인간관계를 무엇보다 중시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최근 어떤 사람이 새해에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손자가 유치원에서 한자(50자) 선행학습을 하는 것을 걱정하기에 전혀 걱정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르면 이를수록 좋다고 했지요. 요즘은 아이들이 배워야 할 게 많아 헷갈릴 수 있고 한자교육에 대한 반대와 반감도 심한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한자와 한문을 배움으로써 얻을 수 있는 건 참으로 많습니다.

어쩌다 보니 어려서 서당에 다녔던 사람의 글을 읽은 데다 외손자의 한자 교육을 걱정하는 글도 보게 돼 나의 한문 공부를 생각해보았습니다. 이번에 할아버지에게 절을 하면서 나는 속으로 “할아버지, 고맙습니다”라고 고했습니다. 할아버지는 내가 지금까지 이나마라도 좀 바른 것, 옳은 것을 생각하며 살 수 있게 하는 힘을 주셨습니다.

책장 속에 보관하고 있던 계몽편 낡은 책자를 모처럼 꺼내 펼쳐봅니다. 계몽편의 마지막 문자는 見得思義(견득사의), 이로운 일을 보거든 그게 옳은 일인지 생각하라는 말입니다. 그 책의 맨 뒤에는 초등학교 때의 서투른 붓글씨로 ‘하루에 글을 안 읽으면 섭바닥에 가시가 돋힌다.’고 씌어 있습니다.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자유칼럼그룹은 특정한 주의나 입장을 표방하지 않습니다.

필자소개

임철순

1974~2012년 한국일보 근무. 문화부장 사회부장 편집국장 주필 및 이사대우 논설고문을 역임했다. 
한국기자상, 삼성언론상, 위암 장지연상 수상. 
현재 이투데이 주필 겸 미래설계연구원장, 자유칼럼그룹 공동대표, 한국언론문화포럼 회장, 
한국1인가구연합 이사장.

Copyright ⓒ 2006 자유칼럼그룹.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freecolumn.co.kr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