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여성--알렉시예비치의 작품을 읽고 [정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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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여성--알렉시예비치의 작품을 읽고

2015.12.08


몇 해 동안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의 작품을 사서 읽어 보다가 기대한 만큼의 감동을 느끼지 못한 기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번역본을 읽는 데서 오는 전달의 불충분함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올해는 달랐습니다. 지면을 통해 본 수상 소식만으로도 관심을 갖기에 충분했습니다. 수상자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1948년 우크라이나 태생)는 기자 출신으로, 소설가나 시인이 아닌데도 노벨문학상을 받는다는 점이 특이하였으며, 그 못지 않게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라는 대표작(1985년 초판 발간)의 제목이 저의 흥미를 끌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틈이 나는 대로 입수해 읽어보리라 마음먹었지만 다른 일에 밀려서 한동안 잊고 있다가 어느 날 우연히 발이 닿은 서귀포 어느 서점에서 신간을 둘러보던 중 이 책이 눈에 확 들어왔습니다. 아, 이거구나, 하면서 사서 바로 읽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5백 페이지가 훨씬 넘는 분량도 그랬고 처음 접하는 참혹하고 극한적인 이야기라 한 줄 한 줄 읽어가며 상념이 많아져 그리 빨리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천천히 조금씩 읽다 보니 열흘은 더 걸린 듯합니다. 첫 장(章)을 끝내고 드는 생각은 이 작품은 문학상보다도 평화상을 받아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6.25를 겪거나 베트남전에서 전쟁의 참상을 직접 겪은 이들을 빼고, 이 책의 독자는 대부분 전쟁에 관하여는 다른 책이나 영화, 또는 텔레비전 뉴스 등을 통해 간접 체험만을 하였을 뿐일 것입니다. 저 자신도 예외는 아닙니다. 그런데 이 책은 실제로 2차대전 중 독일을 상대로 싸웠던 구소련인들이 자신들의 체험을 작가에게 생생하게 전달해준 것을 작가의 관찰과 함께 그대로 기록한 것이어서 정말 전쟁터에서 이들을 보는 듯한 느낌과 감동을 받게 됩니다. 인간이 벌이는 전쟁이란 것에 대해 지금까지 이처럼 생생하게 쓴 것을 보지 못한 것 같습니다. 
 
작가는 진실로 전쟁이 무엇이며 왜 전쟁이 있어야 하는가에 대한 젊은 시절의 의문으로 시작하여 평생 전쟁에 천착하였습니다. 종전 30여 년 후부터 구소련 각지로 찾아다니면서 전쟁에 참여했던 여성들을 만나 그네들의 경험을 물어보았습니다. 그네들은 전쟁터에서 생긴 온갖 트라우마로 그동안 남에게 말하지 못하거나 말하고 싶지 않았던 자기들만의 이야기를, 역사의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어렵사리 작가에게 이야기해줍니다. 이런 전쟁터의 생생한 증언을 채취한 노력만으로도 작가는 노벨평화상을 받을 만한 일을 했다고 봅니다.
 
전쟁은 남자들이 만들어내는 것이지만 실제로 전쟁에서는 수많은 여자들이 동원될 수밖에 없습니다. 여자들이 잘하는 간호, 위생, 세탁, 취사와 같은 분야뿐 아니라 통신병, 저격수, 전차병, 조종사 등으로 실전에도 참여합니다. 이미 많이 죽어나간 남자들을 대신하여 전쟁터에 나가지 않을 수 없기도 하였지만 조국애(祖國愛)와 복수심에 불타 전투에 참여하기를 적극적으로 원하여 나간 경우도 많습니다. 아버지와 딸, 어머니와 딸, 형제자매들이 함께 전쟁에 나가기도 합니다. 성인 남자라곤 없이 늙은 여자와 어린 아이들만 사는 동네도 있습니다. 전쟁의 잔혹함에 대한 증언들을 굳이 이 자리에서 길게 늘어놓을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구소련의 대독일 전쟁이 특별하게 다가온 것은 15만에 이르는 그 많은 여 전사(戰士)들이 거의 다 15세 내지는 18세의 소녀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소녀들은 필요에 의해 징집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자원해서 입대하거나 군 기관의 불허에도 불구하고 징집대열에 섞여들면서 자연스럽게 입대한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잘 안 되면 동네 숲으로 들어가 빨치산으로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학교나 당원 교육을 통해 당시 스탈린 정부로부터 주입된 공산주의 사상과 조국애가 소녀들의 머릿속에 뿌리박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은 전쟁 초반에 모스크바까지 유린당하는 상황에서도 조국이 승리해야 하고 또 승리할 것이란 믿음을 가지고 싸웠으며 그런 탓으로 더 치열하고 처절하게 싸웠습니다.
 
전쟁의 참혹함은 남녀 할 것 없이 마찬가지겠으나, 여성만이 겪을 수 있는 전쟁터의 비인간적인 장면 하나만 예로 들겠습니다. 한 전차 소대가 독일군에 쫓기다가 늪지에 빠집니다. 전차도 빠지고 기관총도 소총도 사람도, 모든 것이 늪에 잠겨 있는 상황에서 부근은 독일군이 탐색견까지 동원해서 수색을 하고 있습니다. 전쟁터에 와서 아이를 낳은 여자 대원 하나가 아기를 안고 있는데 아기 울음소리가 나면 발각되어 전원이 몰살될 절체절명의 순간입니다. 아기는 춥고 배고파서 곧 울음을 떠뜨릴 판입니다. 극단의 긴장 상태에서 대원들은 모두 이 여성 병사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뭇 시선의 뜻을 의식한 아기 어머니는 아무 말 없이 보자기에 싸인 아기를 그대로 늪 속으로 밀어 넣습니다. 독일군이 멀리 사라지고 나서 늪에서 나온 대원들은 오랫동안 차마 그 여자 대원을 쳐다보지도 못하였다고 합니다. 
 
“또 하나의 전쟁이 담긴 네 개의 녹음테이프(이틀간의 대화)를 가지고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여러 가지 감정이 교차했다. 충격과 공포, 의혹과 경탄. 호기심과 당혹, 연민. 친구들에게 그녀(위와는 다른 여성)의 이야기 중 몇 가지 에피소드를 들려주었다. 뜻밖에도 똑같은 반응들. ‘어휴, 너무 끔찍하다. 어떻게 그걸 다 겪었대? 그러고도 제정신으로 살 수 있었대?’ 또는 ‘우리가 알고 있는 전쟁은 경계가 확실하잖아. 적과 우리 편, 선과 악. 그런데 이 전쟁은?’ 하지만 모두들 눈에 눈물이 가득 고이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다들 깊은 생각에 잠겨들었다. 아마 나와 같은 생각들이리라.”
 
“이미 수천 번도 넘는 전쟁이 이 땅에서 벌어졌음에도 전쟁은 여전히 인간사에서 가장 풀기 어려운 비밀 중 하나로 남았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변한 건 아무것도 없다. 나는 거대한 역사를 인간이 가 닿을 수 있는 작은 역사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그래야 뭐라도 이해할 수 있을 테니까. 할 말을 찾을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탐색하기 간단해 보이는, 그리 넓지 않은 이 작은 영토--한 사람의 영혼의 공간--가 역사보다 더 난해하다. 알아내기 더 힘들다. 왜냐하면 내 앞에 있는 그건 살아 있는 눈물이고 살아 있는 감정들이기에 . . . 길은 오로지 하나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 그리고 사랑으로 사람을 이해하는 것.”
 
작가는 전쟁터의 모든 이야기, 전쟁에 참여한 가정 내의 이야기, 전쟁에 참여한 소녀와 여자들의 이야기를 충실히 캐묻고 완벽에 가까운 기록으로 남기지만 끝까지 전쟁이란 것에 대한 의문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합니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란 제목이 시사(示唆)하듯 여자들이라면 쉽사리 전쟁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란 시각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생명을 만드는 사람이 어찌 생명을 파괴하는 그런 일을 벌이겠는가, 하는 것이지요. 
 
딱히 그 말을 하려고 이 글을 쓰는 것은 아닙니다. 책을 읽고 간단한 독후감이라도 써야겠다고 마음먹은 데는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그래도 가장 사실에 가깝게 느껴볼 수 있는 전쟁터의 생생한 이야기를 실감나게 접하면서 작가처럼 전쟁에 대해 진정한 의문을 다시금 가져볼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습니다. 그리하여 생명을 잉태하고 낳는 거룩한 일을 맡은 어머니와 딸, 자매들이 전쟁의 온갖 참상을 겪지 않고 가정 내에서 온전히 살 수 있도록 특히 남성들이 더욱 노심초사할 일이다,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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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정달호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후 줄곧 외교관으로 일했으며 주 파나마, 이집트대사를 역임했다. 은퇴 후 제주에 일자리를 얻는 바람에 절로 귀촌을 하게 되었고, 현재 제주평화연구원 객원연구위원으로 있으면서 한라산 자락에 텃밭과 꽃나무들을 가꾸며 자연의 품에서 생활의 즐거움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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