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추억여행 [방석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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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추억여행

2015.12.02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 부산 여행에 이렇게 설레는 까닭은 무엇일까? 초고속 열차 KTX가 생겨난 후로 수많은 사람들이 출퇴근하듯 오가는 길인데. 아마도 나이 탓일 겁니다. 그냥 여행이 아닙니다. 어린 시절 추억을 찾으러 가는 여행길입니다.

‘그래, 앞으로 얼마나 자주 가랴? 더 늦기 전에 다녀오자.’ 갑작스런 작심은 죽마고우의 꾐 때문이었습니다. “예전 살던 곳, 놀던 곳 함께 돌아보자.” 달콤한 제안에 즉흥적으로 찬동하고 말았습니다. 사실 젊어서부터 수없이 다니던 곳입니다. 그러나 늘 볼 일만 보고 쌩하니 돌아왔습니다. 기독교 장로님이 되신 친구와도 겨우 콜라 한 잔밖에 나눌 수 없으니 크게 염도 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출발 전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가 한밤중에 깨고 말았습니다. 인터넷으로 구매해 인쇄해 둔 기차표도 점검하고, 짊어지고 갈 배낭도 챙기고. 그렇게 한참 시간을 보내다 늦잠에 빠져 알람 소리도 못 들었습니다. 선잠 자다 새벽같이 일어난 아내 덕에 간신히 차 시간을 맞출 수 있었습니다. 친구도 설레기는 마찬가지였던가 봅니다. 떠나는 날까지 몇 번씩이나 전화로 도착 시각을 묻고 어디서 어떻게 만나자 다짐을 두었습니다.

우리의 순례는 초등 4학년 시절 함께 기거하던 친구의 옛집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아쉽게도 새 건물로 바뀌었지만 골목은 예전 그대로였습니다. 어릴 적부터 친구는 무척 잽쌌습니다. 학교서 돌아와 대문이 잠겨 있으면 벼락같이 담을 타고 올라가 간단히 열곤 했습니다. 둘은 친구 어머님이 챙겨 주시는 밥을 먹고 한 방에서 잠자며 함께 공부했습니다. 아니, 어른들 눈을 벗어나 함께 노는 데 더 골몰했던 것 같습니다. 서대신동 골목골목이 우리의 놀이터였습니다. 때로는 뒷산에 올라가 동굴을 뒤지고 잔디밭을 구르며 놀았습니다.

함께 다니던 대신초등학교에도 가 보았습니다. 예전 교사는 일제 때 지은 허름한 2층 건물이었는데 지금은 5층 건물이 번듯이 서 있습니다. 가까운 곳에 구덕운동장이 있습니다. 큰 경기가 벌어질 때마다 ‘담치기’해 들어가던 곳입니다. 안의섭, 정운경 등 서울의 유명 삽화가들이 초대되어 시민 위안잔치가 열린 적이 있었습니다. 그날 갑작스런 비로 숱한 관중이 일시에 몰려나가다 압사 사고가 발생했었지요. 그 틈에 끼었다가 낯모르는 아주머니 도움으로 구사일생, 고무 신발 한 짝만 끌고 울며 집까지 걸어갔던 기억이 납니다.

동대신동을 지나 검정다리[黑橋]를 거쳐 보수초등학교 위 언덕배기 판자촌까지가 평소의 등하교 길이었습니다. 집에서 다닐 땐 매일 아침 2km 남짓한 그 길을 달리다시피 걸어가야 했습니다. 추억에 잠긴 채 보수동 책방골목에 들어섰습니다. 학기 초마다 학교에서 프린트해 준 교과서 리스트를 식구대로 쪼개어 나누어 들고 헌책 사러 다니던 곳입니다. 학생마다 지원군 서너 명씩 붙으니 좁은 골목이 차고 넘쳐 저희 같은 꼬마들은 어른들 가랑이 사이로 다녀야 할 지경이었습니다. 골목 위로는 좁고 가파른 계단이 까맣게 이어져 있습니다. 산비탈 난민촌으로 가는 길입니다. 교내 웅변대회에 참가할 예정이었는데 하필 대회 전날 그 계단에서 다리를 접질려 등교조차 못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때마침 책방골목을 취재하러 나온 KBS-TV ‘행복한 지도’ 제작팀과 마주쳤습니다. 골목과 계단을 주의 깊게 살피는 제 모습이 신기했던지 사연을 묻습니다. 수십 년 전 책방골목 풍경을 기억나는 대로 일러 주었는데 도움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책방골목 바로 아래가 영화로 더욱 유명해진 국제시장입니다. 어린 동생들 먹이고 가르치느라 어머니와 함께 고생하셨던 큰형님의 일터이기도 합니다. 전란 통에 아버지와 헤어지는 바람에 형님은 고등학교 다닐 나이에 옷 짓는 일부터 배워야 했습니다. 그 일로 동생들을 뒷바라지하며 청춘을 다 보냈습니다. 형님 생각에 잠시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시장은 옛날과 다름없이 인파로 북적거립니다. 어릴 때 기억보다 가게 규모도 크고 번듯해 보입니다.

국제시장과 이어지는 남포동 광복동 거리는 예나 다름없이 화려하고 번잡합니다. 오가는 사람들로 서울 명동보다 더 복작거립니다. 도시에 살며 사람에게 멀미를 내다가도 또 이렇게 사람들과 비비대며 사는 맛을 느끼게 됩니다.

종일 걸어 다녀 묵직해진 다리를 이끌고 이윽고 부산의 상징 자갈치시장에 도착했습니다. 친구가 마련한 저녁상에 친구 부부와 여동생, 그리고 저희 부부가 마주앉았습니다. 친구 어머님처럼 얼굴이 밝고 환한 친구 여동생이 전혀 기억에도 없던 제 실수담을 들려주었습니다. 어느 날 제가 전화를 걸어 친구 아버님께 “야 이놈아, 형님이다.” 하더라는 겁니다. 부자의 목소리가 비슷한 경우가 더러 있긴 해도 그런 실수를 했다니. 친구 어머님이 늘 아들과 똑같은 반찬으로 제 도시락을 싸 주시던 일, 제가 삼총사의 일원인 또 한 명의 친구와 싸우던 일… 들출수록 부끄러운 옛이야기들이 거푸 쏟아져 얼굴이 붉어졌습니다.


사람은 제 편리한 것,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고 사는 것인지, 까맣게 잊고 지내던 옛일들을 들으며 한편 부끄럽고, 한편 미안하고, 또 한편 고맙고, 그러면서도 그 시절이 더욱 그리워졌습니다.

다음 날 친구는 일상으로 돌아가고 저희 부부 둘이 다시 추억 찾기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어릴 적 보수동 산비탈 옛 집터는 끝내 찾을 수 없을 수 없었습니다. 지형도 바뀌고 건물도 바뀌고 더구나 그곳에 살던 사람들까지 바뀌었으니. 하긴 세월 탓도 사람들 탓도 아닙니다. 그곳에 아무런 정표도 남기지 않고 훌쩍 떠났던 제 탓일 뿐입니다.

발걸음을 옮겨 서울로 올라오기 직전까지 다니던 중학교를 찾았습니다. 평준화로 한동안 토성중이 되었다가 1992년부터 다시 옛 역사를 이어 경남중이 되었답니다. 교문 옆엔 대선배 고 김영삼 대통령을 추모하는 걸개가 걸려 있었습니다.

용두산공원에서는 남다른 감회에 젖었습니다. 전쟁과 피란살이의 고통이 누구보다 깊었을 형님은 동생들에게 이렇게 당부하곤 했지요. “혹시 이다음 또다시 변란이 일어나 헤어지게 되거든 잊지 마라. 매년 정월 초하루 부산 용두산공원 충무공 동상 앞에서 만나는 거야!” 장군의 동상은 어릴 적 보던 모습 그대로 말없이 부산 앞바다를 향하고 있었습니다.

내친김에 광안리와 해운대 동백섬까지 돌아보고 저녁 기차에 올랐을 땐 파김치가 되었습니다. 엉겁결에 따라나섰던 아내는 말할 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꿈같은 어린 시절을 돌이켜 볼 수 있었던 행복한 여행이었습니다. 이제껏 깨닫지 못하고 지내온 것들을 다시 생각하게 해 준, 의미 있는 여행이었습니다. 발걸음을 부추기고 반가이 맞아준 친구에게 새삼 고마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자유칼럼그룹은 특정한 주의나 입장을 표방하지 않습니다.

필자소개

방석순

스포츠서울 편집국 부국장, 경영기획실장, 2002월드컵조직위원회 홍보실장 역임. 올림픽, 월드컵축구 등 국제경기 현장 취재. 스포츠와 미디어, 체육청소년 문제가 주관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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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박대문

환경부에서 공직생활을 하는 동안 과장, 국장, 청와대 환경비서관을 역임했다.
우리꽃 자생지 탐사와 사진 촬영을 취미로 삼고 있으며,
시집 『꽃벌판 저 너머로』, 『꽃 사진 한 장』, 『꽃 따라 구름 따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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