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년필 [김창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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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필

2015.11.26


계절이 계절인지라, 아니 나이 탓일까요? 쓸쓸한 기분이 들기도 하고 지난 일이 생각나기도 합니다. 고장이 났지만 아직 보관하고 있는 만년필 한 자루는 대학시절 한 여학생이 선물로 준 것입니다. 검정색 몸통에다 허리에 금박을 두르고 꼭지에는 '알프스의 만년설(萬年雪)' 무늬가 있습니다. 독일에서 간호사로 일하다 귀국하여 우리 과에 편입 온 늦깎이 여학생으로부터 받은 만년필인데 당시로서는 무척 희귀한 것이었죠.

이름이 ‘맹충자(孟忠子)’인 그 여학생에 대해서는 ‘맹(孟) 언니’라는 제목으로 전에 글을 써서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그녀와의 사이에 얽힌 이야기를 충분히 전하지 못했어요. 그러니까 이 글은 그녀에 대한 못다 한 이야기로 ‘맹(孟) 언니 시즌2’인 셈입니다.

동기들 보다 나이가 대여섯 살 위였는지라 성을 따서 ‘맹(孟) 언니’라고 불린 그 여학생과 내가 좋아한다거나 하는 사이는 아니었어요. 맹 언니는 누구에게든 오래 알고 지낸 사이처럼 스스럼없이 대하는 재주가 있었는데, 내가 또래 중에서도 그나마 어린 편이어서 누나처럼 특별히 살갑게 대해 준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가끔 그녀가 내겐 오히려 동생처럼 여겨지기도 했지만.

한번은 그녀가 내게 언제, 몇 날 몇 시에 태어났는지 '의정스럽게' 묻더라고요, 대충 대답해주었더니 혼자서 고개를 갸웃하거나 끄덕이기도 하고 생각하는 표정이었다가 킥킥 웃기도 했어요. 이어 믿거나 말거나 사설이 뒤따랐습니다. 이름의 한자 획수를 살피면 인생의 앞길을 알 수 있는데, 획수가 모두 홀수거나 짝수로 끝나면 평탄치 않다느니, 세상에는 음양이 있고 고리처럼 맞물려야 하는데 서로 등지면 좋을 것이 없다는 둥, 그런 사람은 고집이 센 편이니 이름을 바꾸어야 한다느니. 아니, 세상에 고집 없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맹 언니는 별것 아닌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도 “어머!” “그래요?” “정말?” 같은 감탄사와 의문사를 적재적소에(쓰지 않아도 될 곳에) 사용하여 말 하는 사람을 더 신나 떠들게 하는 재주가 있었답니다. 그녀는 또 자기가 잘 모르거나 경험하지 않은 분야에 대해 누가 그럴듯한 이야기를 하면 경청함은 물론 존경의 염(念)을 비치기도 했어요. 말하는 사람이야 알고 있는 지식 전부에다 없는 이야기 까지 부풀려 쏟아내는 것이지만, 상대방은 그것이 빙산의 일간인 줄 착각을 한 것이어서, 그러니까 그녀의 나에 대한  경탄은 지나친 것이어서, 씁쓸하기도 했지만요.

말이 통하지 않아 밋밋하게 돌아선 적도, 그 때문에 한동안 ‘개가 닭 보듯’ 지낸 적도 있었습니다. 한번은 내가 잘 모르면서도 “이를테면 말이죠….” 아는 체를 했어요. “그러니까 하이데거가 말한 ‘고향상실(Heimatlosigkeit獨)’의 의미는 인간, 즉 현존재(Dasein獨)의 사유와 행동은 시간과의 관련 속에서만 비로소 실현되는 것이지만, 인간 현존재는 존재와 시간의 관계를 망각함으로써 자신의 고향을 상실한다니까요. 그러니까 고향상실은 형이상학에 의해 고착되며 동시에 형이상학으로 인해 은폐되는 것으로 말미암아 어쩌고저쩌고…."

맹 언니는 깜빡 기죽지 않았어요. 자기에겐 ‘인천’이라는 엄연한 고향이 있다나요. 고향을 잠시 떠나온 것일 뿐 마음속에 시퍼렇게 살아 있는데, ‘고향상실’ 운운은 어불성설이라는 것이었지요. 그 무렵 치기어린 우리들은 개념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가 없으면서도 ‘마음의 고향’이니 ‘고향상실’이니 하는 말들을 액세서리처럼 달고 살았다고요. 맹 언니의 예상 밖 대거리는 본뜻과는 거리가 있었지만, 무슨 군자 연, 학자 연, 지식인인 체, 종교가인 체하는 군상들의 반응과는 다른 것이어서 이채로운 감이 있었어요. 그렇긴 해도 적극적인 동조를 기대했던 나로서는 머쓱한 일일 수밖에 없었지만 말예요.

맹 언니와 나는 심정적으로 가까웠다 멀어졌다를 반복했습니다. 뭐 특별할 것도 없는 여자와 남자 사이가 원래 그렇기는 하지만. 학기 말이 되자 맹 언니는 띄엄띄엄 학교에 나오더니 그마저 그만두었어요. 그해 12월 말 나는 군에 갔고, 첫 100일 휴가 나왔을 때 맹 언니가 학교를 중퇴하고 결혼했다는 말을 전해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 고장 난 만년필은 맹 언니가 입대 선물로 준 것이고, 그녀와는 이후 본적이 없답니다.

* 그간 저의 글을 읽어주신 자유칼럼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재충전의 시간을 가진 후 더욱 좋은 글로 찾아뵙겠습니다.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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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김창식

경복고, 외국어대 독어과 졸업. KAL 프랑크푸르트 지점장 역임.
한국수필(2008, 수필) 신인상 . 시와문화(2011, 문화평론) 신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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