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과 붉은 머리 여왕 [김수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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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과 붉은 머리 여왕

2015.10.30


오늘은 시진핑(習近平) 중국 주석의 영국 방문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지난 20일 영국을 국빈방문한 시진핑 주석과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황금마차를 타고 버킹엄 궁으로 들어가는 광경은 역사의 아이러니를 느끼게 했습니다. 영국 왕실은 3대가 나서서 근위대 환영식에서부터 버킹엄 궁 안에 숙소를 마련해주까지 시진핑 부부에게 풀코스의 환대를 베풀었습니다. 

영국과 중국의 관계, 과거의 눈으로 보면 침략자와 피압박자의 관계였습니다. 오늘의 눈으로 보면 시진핑은 세계 최대(最大) 사회주의 국가 원수이고 엘리자베스 2세는 원조(元祖) 자본주의 국가의 군주입니다. 

영국이 이렇게 시진핑을 공들여 환대한 것은 중국이 금고에 가득 쌓아놓은 달러(외환보유고)를 활용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시진핑은 영국 방문 선물로 돈 보따리를 풀어 놓았습니다. 중국은 영국의 원자력발전소, 에너지, 항공, 바이오, 금융 등 150개의 경협 프로젝트에 무려 30억 파운드, 우리 돈으로 약 52조원을 투자하겠다고 서명했습니다. 사회주의 국가가 자본을 들고 나타나 자본주의 종주국을 흔들어 댄 꼴입니다. 

영국 총리실 산하에는 ‘비즈니스 자문 그룹’이 있습니다. 1년에 4차례 총리를 비롯한 재무장관 등과 회합을 갖고 영국의 경제정책과 기업정책에 대해 조언하는 기구로 영국의 대기업 총수 19명이 참여해왔습니다. 시진핑이 영국을 방문한 첫날 캐머런 총리는 세계 최대 전자상거래 업체 알리바바그룹의 마윈(馬雲) 회장을 20번째 자문위원으로 임명했습니다. 
이런 영국의 태도를 두고 서방 매체들은 ‘kowtow’(머리를 조아린다)라는 말을 쏟아냅니다. 중국어 ‘叩頭’에서 나온 저자세 외교를 상징하는 표현입니다. 

물론 영국이나 중국이나 계산이 있습니다. 영국은 중국의 자본을 끌어들여 영국 산업에 활기를 불어넣고 싶어 합니다. 중국은 투자를 통해 영국의 선진 기술과 시스템을 배우고 싶어 합니다. 보다 전략적인 의도를 짚어보면 중국은 시진핑의 일대일로(一帶一路) 세계전략을 펼치는 데 영국의 지정학적 위상을  활용하고 싶고, 영국은 미래 GDP 1위 대국과의 어깨동무로 자국의 위상을 높일 수 있다는 그림을 그리고 있을 법합니다. 

미국과 EU의 입장에서 보면 영국과 중국의 밀월관계는 가히 파격적으로 보입니다. EU 국가들은 영국의 친(親) 중국 정책의 속도와 규모에 놀라고 있는 형국입니다. 중국의 팽창을 막으려고 애를 쓰고 있는 미국은 전통적 동맹관계인 영국의 행동이 영 못마땅할 것입니다. 특히 영국은 중국 주도의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에 서방국가 중 가장 먼저 참여함으로써 눈치를 살피던 독일 프랑스 등 EU 국가들의 참여를 선도했습니다. 중국에겐 기분 좋은 일이지만 미국에겐 불편하기 이를 데 없는 일입니다. 

중국 근대사의 분수령은 19세기 중반 일어난 아편전쟁이었습니다. 이 전쟁을 일으켜 중국을 굴복시키고 쇠퇴의 길로 몰아넣는 데 앞장선 것은 ‘붉은 머리의 야만족’이었습니다, 당시 청나라 황실에선 영국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시진핑의 7, 8대조쯤 할아버지가 살았던 청나라의 건륭제(乾隆帝)는 천하 지존이었습니다. 서양 야만족이 황제 알현을 청해서 허락되면 세 번 무릎을 꿇고 아홉 번 이마를 조아리는 삼궤구고두(三九叩頭)의 예를 올려야 했습니다. 천하 그 자체인 중국에게는 야만족의 조공(朝貢)은 있어도 대등한 국교 관계나 통상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나마 서양 야만족에게 조공이라는 이름의 상거래를 허가한 지역은 광주(廣州) 한 곳뿐이었습니다. 

당시 해상무역에 이어 산업혁명으로 서구의 으뜸가는 강국으로 부상한 영국은 조공이 아니라 평등한 통상관계를 중국에 원했습니다. 현재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8대 선왕인 조지3세는 건륭제의 80회 생일을 축하한다는 명목으로 1793년(건륭제 80회 생일은 1790년) 조지 매카트니를 단장으로 하는 사절단을 베이징으로 보냈습니다. 중국 관리들은 축하사절단이라는 말에 황제 알현을 주선했습니다. 그러나 중국은 삼궤구고두의 예를 요구했고 매카트니는 영국식 알현 의전을 고집했습니다. 몇 주간의 실랑이 끝에 겨우 건륭제를 만났으나 황제는 청나라에는 '없는 물산(物産)이 없다'며 통상교류 요청에 퇴짜를 놓았습니다. 

매카트니는 중국을 떠나면서 이런 기록을 남겼습니다. “영국의 함선 몇 척만 동원해도 중국 황실 해군을 압도할 수 있고, 몇 달이 지나지 않아 해안을 따라 모든 선박을 완전히 박살낼 수 있다.”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조류를 중국은 몰랐던 것입니다. 위기의 진실을 호도하는  신하와 측근의 장막에 둘러싸여 있는 지도자가 자신이 서 있는 무대가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사례는 동서고금에 흔히 일어나는 일입니다.   

매카트니 사절단의 협상 실패로 중국의 통상문호 개방을 포기할 영국이 아니었습니다. 영국인들이 차를 마시는 습관이 퍼지면서 영국은 대량의 은이 중국으로 유출되는 무역 적자에 시달렸습니다. 영국은 모직을 수출하려고 했지만, 중국인들은 모직을 야만족이 입는 옷감이라며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이때 영국인들이 생각해낸 방안이 인도에서 생산한 아편을 동인도회사를 통해 중국에 수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 중국은 아편 밀매가 성행하기 시작할 때였습니다. 

1834년 빅토리아 여왕은 해군 장교 존 네이피어를 중국으로 파견했습니다. 당시 외무장관 헨리 파머스톤은 네이피어에게 공격적인 활동을 하도록 지시했습니다. 네이피어는 홍콩 섬의 중요성에 눈독을 들이는 등 뛰어난 전략가였지만 임무를 다 완수하지 못한 채 말라리아에 걸려 사망했습니다. 그러나 영국의 요구는 끈질기게 이어졌고 아편 밀거래는 폭발적으로 늘어났습니다. 

청나라 황실은 1838년 임칙서(林則徐)를 전권대신으로 임명하고 아편 단속의 전권을 부여했습니다. 임칙서는 아편이 중국을 망하게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강직한 관리였습니다. 그는 광주에 부임하자 영국인들이 소지한 아편을 압수해서 불태우고 밀거래업자를 체포하는 등 강압책을 썼습니다. 이게 도화선이 되어 아편전쟁이 일어났습니다. 파머스톤 외무장관은 군함을 파견해서 청나라 해군력을 무력화시켰고 황실을 굴복시켰습니다.

아편전쟁 패배로 중국은 영국과 남경조약을 체결했습니다. 홍콩 할양, 전쟁 배상금 지불, 치외법권 인정, 5개항 개방 등 굴욕적인 불평등 조약으로 중국의 수모가 시작되었습니다. 독일 프랑스 미국 등 서구 열강들이 하이에나 떼처럼 달려들어 중국을 무력화시켜나갔습니다. 

1972년 중국을 방문해 미중 관계정상화의 다리를 놓은 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은 아편전쟁에 이르는 중국의 쇠망 과정을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중국 사회에 가장 뼈아픈 사회적, 지적, 도덕적 부담으로 작용했다." 고 평했습니다. 

중국은 이제 세계무대의 한가운데로 돌아왔습니다. 굴욕적으로 빼앗겼던 홍콩도 되찾았고 GDP규모로 미국에 도전하는 G2로 우뚝 섰습니다. 산업혁명 당시 중국은 세계 GDP의 30%를 차지하는 경제부국이었다고 합니다. 중국의 인구 규모와 경제발전 속도로 볼 때 300년 전 세계 최대 GDP국가의 영광을 되찾을 날이 머지 않았습니다. 

칼 마르크스는 "역사는 되풀이 된다, 한 번은 비극으로 한 번으로 희극으로"라고 말했습니다. 중국과 영국이 과거 200년 간 뒤엉켜온 세계사의 굴곡에서 생각해볼 게 많은 대목인 것 같습니다. 중국과 영국은 홍콩반환 협상에서 보았듯이 과거의 상처를 단말마적으로 까칠하게 들춰내지 않고 현실적으로 접근합니다. 제국 경영을 해봤던 나라들이라 그런지 모르나 경험과 실용에 바탕을 둔 전략적 실용주의가 느껴집니다. 

“과거는 서막일 뿐입니다.”(What's past is prologue) 
시진핑 주석은 영국 방문 중 웨스트민스터(영국의 국회의사당)에서 행한 11분간의 연설에서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희곡 '템페스트'에 나오는 구절을 인용했습니다. 영국과 중국 언론은 이 구절을 과거보다 미래에 집중하겠다는 뜻으로 해석했습니다. 
시진핑 주석이 연설한 그 단상은 아편전쟁을 일으키기 전 파머스턴 외무장관이 포함(砲艦) 외교로 중국을 굴복시킬 의지를 표명했던 곳입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동맹도 없고 영원한 적도 없다. 오직 국가이익만 있을 뿐이다.” 오늘날 중국과 영국의 지도자들은 파머스톤이 말한 이 외교적 명언을 충실히 따르는 것 같습니다. 과거보다는 미래를 생각할 때 국가가 발전해왔다는 역사의 교훈을 느끼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자유칼럼그룹은 특정한 주의나 입장을 표방하지 않습니다.

필자소개

김수종

한국일보에서 30년간 기자 생활. 환경과 지방 등에 대한 글을 즐겨 씀.
저서로 '0.6도' '다음의 도전적인 실험' 등 3권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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