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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중턱에서
2015.10.26
여름이 끝나고 겨울까지 가는 길의 중턱쯤일까요, 한창 무르익는 가을입니다. 설악이나 내장의 그것은 아닐지라도 멀리서 보는 한라산이 불그레한 빛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가까이 가면 더욱 붉은 모습을 볼 수 있겠지요. 철 따라 바뀌는 주변의 모습이 그 속에 사는 우리의 삶을 한층 더 풍요롭게 합니다. 하나둘 벌써 낙엽이 지고 있지만 아직은 낙엽 밟는 소리를 그리워할 때는 아닌 것 같습니다. 가을 옷을 입고 있는 수목들의 한가운데서 가을의 빛깔을 만끽할 때입니다.온화한 기후 때문에 제주의 단풍은 그저 물드는 흉내만 내다가 가는지도 모릅니다. 제주에서 익어가는 가을을 느끼게 해주는 것은 역시 억새가 아닐까 싶습니다. 억새는 봄, 여름 푸르고 억센 풀로 자라다가 가을에 들어 밝은 빛으로 바뀌면서 수수처럼 붉은 꽃을 피웁니다. 하늘이 높고 맑을 즈음 억새꽃은 하얗게 변하여 바람에 하늘거립니다. 거센 바람 앞에서는 강가의 갈대처럼 온몸을 흔들어댑니다. 일렁이는 억새가 오름의 분화구를 메울 때, 길섶에 늘어선 하얀 억새풀이 지나가는 이들의 시선을 잡을 때 제주의 가을은 절정을 이룹니다.지난봄 중국의 유명 인사 한 분이 제주에 와서 많은 청중들을 상대로 한 연설에 앞서, 그 전 해 가을 제주에 왔을 때 흔들거리는 하얀 억새가 그에게 가장 인상적이었다고 하면서 억새를 주제로 한 자작 한시를 읽어 준 기억이 새롭습니다. 억새는 아마도 우리나라에 가장 흔한 자생 식물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렇게 시의 소재가 되면서도 가을의 정취를 흠뻑 느끼게 해주는 억새가 때로는 애물단지가 되기도 합니다. 산 여기저기 군락을 이루고 있는 억새는 보는 이의 나이를 불문하고 가을의 낭만을 전해 주지만 집 안에서 마구 피어나는 억새는 마당을 혼란스럽게만 합니다. 그렇다 해도 곳곳에 억새가 있기에 가을이 가을다워짐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억새는 그렇다 치고, 올가을 집 마당에서 본 어떤 나무의 별난 현상에 대해 새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난 9월 그윽한 향기를 뿌리다가 열흘 새 꽃이 다 떨어진 금목서(金木犀, 또는 만리향) 여남은 그루가 시월 중순 들어 다시 꽃을 피운 것입니다. 서울에서 돌아온 어느 날 밤 문득 달콤한 향수 냄새가 코끝에 와 닿고 마당은 온통 향긋한 바람으로 살랑거리는 것이었습니다. 어두운 밤 희미한 달빛 아래 그 향기의 발원지를 찾다가 금목서 나무에 가득한 주황의 작디작은 꽃들에 이르렀을 때는 놀라움 그 자체였습니다. 다 지고 나서 한 달이 지난 후에 어찌 꽃들이 다시 핀다는 말입니까? 그 꽃은 하나하나가 개미만한 크기밖에 안 되는, 아마도 꽃 중에서도 가장 작은 꽃으로 포도송이의 송이처럼 한데들 뭉쳐 있는 모습입니다. 한 해에 두 번 피는 꽃이 꽤 있을 테지만 금목서 외에 해마다 놀라움을 안겨 주는 또 다른 식물이 느릅나무(elm)입니다. 약재로도 쓰이는 느릅나무 두 그루가 귀족처럼 의젓하게 현관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시월 초 어느 날 갑자기 윙윙거리는 벌떼 소리에 놀라 주변을 살펴보았더니 봄에 하얗게 꽃이 피었던 느릅나무에서 다시 작은 꽃들이 만발해 있었습니다. 벌들은 정말 눈발이 휘날리 듯 온통 나무를 뒤덮으며 활발하게 꿀을 빨고 있었습니다. 벌들이 시끄럽게 소리 내며 일하는 모습에서 때아닌 풍요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수목들이 빚어내는 가을의 빛깔을 더욱 다채롭게 하는 것은 빨강의 열매들입니다. 이런 나무들은 대개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은 채 꽃을 피우는지 아닌지도 모르고 지나치는 존재들입니다. 아니 꽃이 없어서 열매로 대신 모습을 뽐내려고 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 이름 모를 나무들이 가을에 맺는 빨강의 열매들이 없다면 가을의 분위기가 좀 따분해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빨강과 때로는 노랑이나 보라의 열매를 선물하는 나무들 중 이름이 좀 알려진 것은 피라칸타(pyracantha)와 먼나무입니다. 둘 다 어디 가든 눈에 띄는 빨강 열매지만 먼나무는 서귀포 가로수의 대표로서 제법 귀하게 여겨지는 종목입니다.집 마당에도 먼나무 대여섯 그루가 있어 가을엔 구슬처럼 화려한 빨강 열매들을 맺으면서 잎은 잎대로 고운 연두색으로 바뀌는 게 참 예쁘고 가상합니다. 상록수지만 어떤 나무들은 겨울에 잎을 다 떨구고 빨강 열매만 남기고 있어 그 모습에서 다소 외로움과 애잔함을 볼 수도 있습니다. 녹색의 바탕 없이 빨강의 열매만 달린, 먹을 수도 없는 그런 열매를 보는 느낌을 짐작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가을을 가을답게 해주는 것들이 어찌 이뿐이겠습니까. 들국화, 구절초, 해국, 코스모스처럼 바람과 추위를 이기는 작은 생명들과 도처에 붉게 또는 노랗게 익어가는 열매들... 가을은 정녕 빛깔과 열매들로 풍성한 계절입니다. 제주의 가을을 특징짓는 것으로 또 하나 빠트릴 수 없는 것이 사방을 노랗게 물들이고 있는 감귤나무입니다. 이곳에서 감귤은 생명산업으로, 감귤나무는 한때 대학나무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노란 감귤이 알차게 매달린 감귤나무와 감귤 밭이 없는 제주의 가을을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가을이 가기 전에 제주에 와 보시면 삶이 감귤로 인해 한층 더 풍요로워짐을 느끼실 것입니다. (http://www.jemin.com/news/articleView.html?idxno=373544)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자유칼럼그룹은 특정한 주의나 입장을 표방하지 않습니다.
필자소개
정달호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후 줄곧 외교관으로 일했으며 주 파나마, 이집트대사를 역임했다. 은퇴 후 제주에 일자리를 얻는 바람에 절로 귀촌을 하게 되었고, 현재 제주평화연구원 객원연구위원으로 있으면서 한라산 자락에 텃밭과 꽃나무들을 가꾸며 자연의 품에서 생활의 즐거움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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