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긍선 박사, 복지 정책의 큰 선각자 [이성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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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긍선 박사, 복지 정책의 큰 선각자

2015.10.06


100여 년 전 우리나라를 찾아온 외국인들이 남긴, 우리네 생활상을 담은 흑백사진을 보노라면 아주 오래전의 무슨 ‘흑백 활동사진’을 보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곤 합니다. 이와 관련해 특히 필자에겐 지난 40여 년간 뇌리(腦裏)에서 맴돌고 있는 한 장의 특별한 흑백사진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삼일운동이 일어난 다음 해인 1920년(大正 9년) 12월에 ‘경성고아원 제1회 고아수용기념(京城孤兒院 第一回 孤兒收容紀念)’이란 제호 밑에 11명의 헐벗은 아이들이 두 사람의 어른과 함께 찍은 사진입니다.

두 줄로 서 있는 11명의 아이들 뒤에 중년의 두 어른이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의 몰골이 안쓰럽기 그지없습니다. 12월의 한겨울 추위에도 헐벗은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뒷줄에 서 있는 어른 중 한 분은 두꺼운 두루마기를 입고, 다른 한 분은 겨울 양복을 입은 것으로 보아 사진을 찍을 당시의 날씨가 얼마나 추웠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나마 앞줄에 선 6명 중 한 명은 어설프게나마 천으로 ‘발싸개’를 했고, 다른 한 명은 일본의 재래식 양말인 ‘다비(足袋)‘를 신었습니다. 하지만 나머지 아이들은 하나같이 신발도 신지 않은 ‘맨발’ 상태입니다.

사진 속 4명의 아이들은 더럽긴 해도 넝마를 몸에 걸쳤지만 다른 7명은 가슴과 아랫도리가 그대로 노출되어 있습니다. 가장 어려 보이는 아이(앞줄 맨 왼쪽)는 양팔과 종아리가 추위에 그냥 드러나 사진을 촬영하는 순간에도 추워서 몸을 떨며 힘들어하는 모습이 역력합니다. 그래서 이 사진을 볼 때면 늘 가슴이 아련히 아파옵니다. 

그런데 필자가 알기에 이 가슴 아픈 이야기를 전해주는 사진은 우리나라 사람이 설립하고 운영하기 시작한 국내 첫 번째 고아원의 역사 기록 중 하나입니다. 우리나라의 현대식 보육원은 프랑스 출신 백(M. G. Blanc, 白) 신부가 1885년 서울 곤당골(美洞)에 개설한 것이 효시인데, 앞서 언급한 경성고아원은 한국인이 1920년에 세운 첫 고아 관리 시설인 셈입니다. 설립자는 당시로서는 흔치 않게 미국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돌아와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셨던 해관 오긍선(海觀 吳兢善, 1878~1963) 박사이십니다. 

1920년의 사진에서 헐벗은 고아 11명과 함께 서 있는 양복 차림의 중년 신사(당시 42세)가 바로 오긍선 박사입니다. 

오긍선 박사의 인생 여정을 살펴보면 그분이 얼마나 훌륭한 선각자였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오긍선 박사께서는 국내 최초로 교수 정년퇴임 제도를 제정해 1942년 세브란스 학장직과 교수직에서 스스로 물러나셨습니다. 그렇게 ‘솔선수범의 본보기’를 남기고 홀연히 정년퇴임자 신분의 길을 택한 후 박사께서는 당신이 설립한 한성고아원으로 다시 돌아가셨습니다. (주: 옛 한성고아원은 현재 경기도 안양에서 (사회복지법인) 해관재단 <좋은 집>으로 이어져 오긍선 박사의 증손녀 오경인 여사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

그리고 1945년 광복 이후의 정치적 혼란기와 한국전쟁 기간에도 고아들 곁을 떠나지 않았고, 그렇게 평생 고아들을 돌보다 1963년 86세의 일기로 조용히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1920년 한성고아원 설립, 1942년 교수 정년퇴임제 도입, 퇴임 후 한성고아원 귀임’이라는 일련의 사건에서 필자는 오늘날 우리 사회의 키워드인 ‘사회 복지’를 만납니다. 오긍선 박사께서는 ‘복지’라는 낱말조차 없었을 성싶은 그 시절에 사회복지(Social Welfare)라는 개념을 아주 분명하게 몸으로 실천하셨던 것입니다. 

필자에겐 오긍선 박사를 마음의 스승으로 모시게 된 아주 특별한 계기가 있었습니다. 1960~1970년대 독일 대학병원에서 피부과 전문의 과정을 밟고 있을 때의 일입니다. 당시 새내기 의사인 필자는 도서관에서 각종 전문 학술지(Journal)를 보며 최신 연구 결과를 탐독하곤 했습니다. 그때 학술지마다 예외 없이 일본 연구자들의 최신 연구 결과가 2~3편씩 실리는 것을 보며 적잖이 속을 끓이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근래에는 전문 학술지를 펼쳤다 하면 국내 연구진의 훌륭한 논문을 만나는 게 예사지만 그 시절엔 달랐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필자는 미국피부과학회가 주관해 발행하는 학술지에서 우연히 <한국 피부학계의 대부 오긍선[Kung-Sun Oh, Patriarch of Korean Dermatology(Archive of Dermatology, 1968)]>이라는 논문을 만났습니다. 마치 광활한 사막 한복판에서 시원하게 쏟아지는 소나기를 만난 듯했습니다. 

논문은 1960년대 주한 미군 병원에서 피부과 의사로 근무한 래리 패리시(Larry Parish) 박사와 당시 연세의대 피부과의 우태하(禹泰河) 박사가 함께 발표한 것이었습니다. 필자들은 오긍선 박사가 20세기 초 미국에서 의학을 전공한 인재라고 소개하면서 한편으론 사회사업가로서의 업적도 부각시켰습니다. 당시 논문을 본 필자는 박사께서 우리나라의 몇 안 되는 선각자 중 한 분임을 알고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필자는 1975년 전혀 생각하지 않던 연세의과대학의 부름을 받고 오긍선 박사께서 1917년 국내 최초로 개설한 피부과학 교실의 주임교수직에 부임했습니다. 근 20년간의 독일 체류를 청산하고 귀국한 필자는 당시 설렘과 두려움에 많은 고민을 하던 차였습니다. 그런데 문득 오긍선 박사께서도 1907년 귀국 당시 서울보다 여러모로 열악했던 전라북도 군산야소병원장으로 부임했다는 사실이 떠오르자 마음의 갈등도 이내 사라졌습니다. 돌이켜보면 필자와 오긍선 박사의 만남은 필연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긍선 박사께서는 의학자로서, 교육 행정가로서 존경을 받는 큰 스승이십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필자는 오긍선 박사께서 남긴 가장 큰 발자취는 그 먼 옛날 사회복지의 중요성을 깨닫고 몸소 실천하신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선생님께서는 작은 ‘흑백사진’ 한 장으로 오늘날의 우리에게 올바른 복지 개념을 가르쳐주십니다. 아울러 당신의 실천적 삶을 통해 큰 교훈과 감동을 선사합니다.

오긍선 박사 약력:
1878년 10월 4일 충남 공주 출생/1900년 배재학당 졸업/1902년 도미/1907년 미국 루이빌 의대 졸업/1907년 전북 군산야소병원장/1910년 광주야소병원장/1911년 목포야소병원장 겸 정명중학교 교장/1912년 세브란스 의학교 교수/1916년 동경대학 피부비뇨기과학 연구(1년)/1917년 한국 최초로 피부과 창설, 주임교수/1920년 경성고아원 설립/1930년 오스트리아 빈대학에서 피부과학 연구(1/2년)/1934년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제2대 교장(한국인 최초 학장)/1942년 정년제 제정 및 학장직 사임/1952년 한국사회사업연합회 회장/1963년 서거/1963년 대한민국장과 훈장 추증.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자유칼럼그룹은 특정한 주의나 입장을 표방하지 않습니다.

필자소개

이성낙

뮌헨의과대 졸업. 프랑크푸르트대 피부과학 교수, 연세대 의대 교수, 아주대 의무부총장 역임.
현재 가천대 명예총장, 의ㆍ약사평론가회 회장, (사)현대미술관회 회장, (재)간송미술문화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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