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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거 중년 가을철 레시피
2015.09.17
아무리 모국이라 해도 돌아온 처지가 처지인지라 2년 전 ‘난민 신세’로 한국에 왔을 때 지인들은 각자의 ‘방서’를 제게 권했습니다. 구태여 이름을 붙이자면 ‘독거 중년 레시피’라고 할까요?^^그중에는 ‘치즈, 바나나, 초콜릿’을 상비하라는 아주 구체적인 ‘약방문’을 주신 분도 있었습니다. 저를 진심으로 아끼고 본인 또한 가족 간의 별리의 아픔을 겪은 분이라 충고를 귓등으로 흘리지 않았기에 지금껏 제가 기억하고 있을 테지요. 독수공방의 설움을 야식으로 달래라는 단순한 뜻이었다면 ‘배달의 민족, 야식공화국’에서 치즈, 바나나, 초콜릿은 아무래도 좀 궁색스럽습니다. 그분이 유독 그 세 가지를 권했던 것은 야식 목적이 아니라 우울증 방지에 효과적이라는 이유였습니다. 본인도 그 세 가지를 늘 곁에 두고 사신다고 했습니다. 치즈, 바나나, 초콜릿이 우울증을 완화시키는 효과가 있는 줄 예전엔 미처 몰랐건 알았건, 중요한 것은 앞으로 내 삶에 끈적한 늪이나 수렁처럼 질척일지도 모를 우울증에 대한 괴이쩍은 '혐의'가 그분의 처방으로 인해 “우울증 몇 년 형에 처한다”는 확정적 '선고'처럼 들렸다는 사실입니다. 그리하여 수인생활을 막 시작하는 죄수가 휴지, 치약 등 감방에서 쓸 개인물품을 지급받는 중에 그 세 가지도 들어있더라고 해야 할지. 허걱! 때맞춰 “가정이 깨졌으니 너는 이제부터 가방을 걸머지고 도서관에나 다니라"는 친구의 말은 도서관이 순식간에 ‘형무소’로 인식되게 할 만큼 충격적이었습니다. 다행히 저는 50평생 우울증 '전과'가 없었다는 것이 ‘정상 참작’ 되어 ‘우울증 집행유예’ 상태에서 지금껏 삶을 지탱해가고 있습니다. 우울증은 마음과 정신에 거풍이 지속적으로 되지 않은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인 물에 이끼가 끼다가 종당엔 썩어 버리듯이, 흐르지 않고 막힌 생각과 감정이 똬리를 틀도록 방치되면 그것이 곧 우울증으로 나타나는 거겠지요. 상황은 끊임없이 변화하는데 변화의 물살에 자신을 유연하게 띄우지 못하기 때문이며, 변하지 않는 단 한 가지는 ‘모든 것이 변화해 가고 있다’는 사실뿐이건만 과거에 매여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완고함 탓입니다. 그 지인뿐 아니라 최근에 우연히 만난 같은 처지의 대학 선배는 남편과 헤어진 지 10년이 넘었음에도 원망과 분노와 회한과 자책이 수그러지기는커녕 해를 거듭할수록 차곡차곡 쌓여 거의 ‘수미산’ 수준이었습니다. 하도 억울해 하다보니 이제는 몸에 깊은 병마가 잠식했다며 저를 붙잡고 하소연을 하는 것까지는 참아줄 수 있었지만 제 상태를 지레짐작하며 예의 본인의 ‘처방전’을 써 주려는 것만큼은 사양했습니다. 그분의 마음 또한 지난 10년 동안 볕을 쬐고 거풍된 적 없는 굳고 눅진하고 곰팡이 슨 상태라는 것이 딱할 뿐이었습니다. 동양 철학자 박희채 저 <장자의 생명적 사유>에는 “누가 나를 이렇게 했는지를 생각해 보았으나 알아내지 못했다. 부모인들 어찌 내가 가난하기를 바랐겠는가? 하늘은 사사로이 덮어줌이 없고, 땅은 사사로이 실어줌이 없으니 하늘과 땅인들 어찌 사사로이 나를 가난하게 하겠는가? 그래서 나를 이렇게 만든 존재를 찾아보았지만 알 수 없었다. 내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은 운명일 것이다.” 라는 ‘장자 대종사’에 나오는 내용이 풀이되어 있습니다. 장자가 언급한 ‘운명’이란 일어난 일에 대해 집착과 편견을 버리고 마음의 속박을 벗어 자유롭고 평화로워질 수 있는 길을 여는 아이러니한 단초라고 저는 이해합니다. 누가 나더러 이렇게 파경에 이르라고 한 것도 아니고 내가 원해서 이 지경이 된 것도 아니라면, 역설적으로 말해 그러니 이대로 자유롭고, 평화롭고 나아가 지금 상황 속에서 행복하지 말란 법도 없으니까요. 관계가 깨졌다고 해서 마음의 평화마저 깨지도록 해서는 안 될 터인데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내면을 거의 박살내거나 아니면 아무렇게나 방치하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저는 반년 전부터 한 수련 공동체의 10여 명 도반들과 꾸준히 마음 공부를 하면서 내면이 습해질 때마다 거풍을 하여 고슬고슬, 습습하게 하는 훈련을 받고 있습니다. 매사 변화를 온전히 수용할 줄 안다면 삶의 질곡과 저항이 덜할 것입니다. 소소한 신변의 변화에서부터 생이 죽음으로 화하는 궁극적 양태의 변화에 이르기까지 다만 의연히 받아들일 수 있다면 매 순간 평화롭고 자유로울 수 있을 것입니다. 자연이 그러하듯이요. 이미 가을에게 천지를 내어준 여름과, 또 얼마 지나지 않아 겨울 앞에서 선뜻 물러갈 가을을 생각해 보면 우리 삶의 어떠한 변화도 자연의 이치를 따라 여여히 수용해야 한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천지에 거풍의 계절, 가을이 왔습니다. 무엇보다 변화된 자신의 처지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우울한 것들을 보송보송 말리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자유칼럼그룹은 특정한 주의나 입장을 표방하지 않습니다.
필자소개
신아연
이화여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1992년 7월, 호주로 떠났다. 시드니에서 호주동아일보 기자, 호주한국일보 편집국 부국장으로 일하다 2013년 8월, 한국으로 돌아와 자유기고가, 강연자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는 중앙일보, 여성중앙, 과학과 기술 등에 에세이를 연재하며, KBS 라디오에 출연 중이다. 낸 책으로 <심심한 천국 재밌는 지옥> <아버지는 판사 아들은 주방보조>, 공저 <자식으로 산다는 것>이 있고, 2013년 봄에 <글 쓰는 여자, 밥 짓는 여자>를 출간했다. 블로그http://blog.naver.com/shinayo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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