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효자의 참회(懺悔) [황경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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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효자의 참회(懺悔)

2015.09.08


아이들 휴가에 얹혀, 지난달 제주도를 방문했습니다. 중국인 관광객 폭주로 오염이 심하다는 언론 보도로 걱정이 많았으나, 10여 년 만에 찾은 제주는 여전히 볼거리가 많아 실망보다는 탄성을 더 많이 자아내게 했습니다. 

출장이나 개인 관광으로 대여섯 번 찾은 적이 있는 제주도였으나, 특히 사흘 동안의 짧은 이번 여행 내내 저를 괴롭힌 가슴 아픈 사연이 있었습니다. 휴가를 즐기고 있는 아이들에게 그 괴로움을 내색하지 않고 있다가, 집으로 돌아온 뒤 제주도 여행의 기억에 남는 이야기들을 가족 카페에 올리면서 처음으로 그 사연도 털어놓았습니다. 

1960년대 초, 구강암 치료를 받고 계시던 선친이, 하루는 병원에 갔다 오시는 길에 점심시간에 맞추어 사무실에 들렀습니다. 근처 식당에서 식사 후,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아버지는 제주도를 한번 구경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지금처럼 교통이 편리한 제주도는 아니었지만, 아버지가 제주도 관광을 하시는 것은 경제적으로 별 큰 부담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암 치료 중인 노인을 혼자 보낼 수는 없어 적당한 시기에 휴가를 내어 모시고 갈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허 정(許政) 과도정부에 이은 장 면(張勉) 정권이 몰고 온 정치 불안정은, 외신 기자로 일하던 저에게 휴가의 기회를 주지 않았습니다. 1961년 5월의 군사 혁명은 국내정세를 계속 긴장시켜, 휴가를 받을 기회는 더욱 멀어졌습니다. 그런 혼란 속에, 아버지는 끝내 돌아가셨습니다.

효경(孝經)을 비롯한 여러 선인들의 말씀에, 효는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 하는 것이고, 부모님의 수명(壽命)은 자식들의 효를 기다리지 않는다는 가르침이 수없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범상인(凡常人)은 이를 알면서도 나중에 후회할 일을 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한 해 한 번씩 돌아오는 기제사나 명절 차례상 마련에 많은 정성을 쏟는 것은 우리의 이런 뉘우침을 조금이라도 경감(輕減)하려는 자기기만(自己欺瞞)에 지나지 않는다고 매번 후회하고 있습니다. 

저의 선친은 자녀들 교육에 많은 관심을 쏟았습니다. 일본 후쿠오카(福岡)의 탄광촌 초등학교에서 3학년으로 올라가기 전 봄방학에 저는 아버지 손에 끌려 외갓집이 있는 경남 남해로 와, 그곳 초등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한글을 전연 모르니 당연히 1학년부터 다시 시작했습니다. 

우리말을 배워야 한다는 아버지 엄명에 어린 저는 부모를 떠나, 한학자인 외조부 밑에서 천자문도 익혔습니다. 3년 후, 일본에서 완전 귀국하신 아버지는 저의 교육에 더욱 많은 시간을 쏟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아이들보다 2년 더 공부를 한 저는 졸업 때까지 내내 수석이고 반장이었습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자주 학교를 찾아오신 아버지는 학교 시설 정비에 꽤 많은 기부도 하였습니다. 

중학교 입학식에서 일본 아이들을 제치고 신입생 대표로 입학 선서를 했을 때, 아버지는 일본 초등학교에서 제가 당한 민족차별을 설욕했다고 기뻐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1945년 3월, 일본군에 징집당하여 학업 도중에 입대하였을 때, 부모님들의 비통한 심정은 어떠하였을까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아픕니다. 패전의 기세가 짙은 당시, 신병의 입대는 곧 죽음이라는 등식(等式)이 조선 동포 모두의 마음속에 있었습니다.

광복을 맞이하여 복학을 준비 중인 저에게, 좌우대립으로 혼란이 극심한 서울에는 절대 못 보낸다는 선친의 엄명에 고향을 떠나지 못한 것은, 일제강압 말년에 심려를 많이 끼친 부모님을 더 이상 상심시키지 않으려는 저의 짧은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학병(學兵)을 피하여 지리산(智異山)으로 도피하라는 친구의 권유를 거절한 것도, 두 차례 찾아온 미국 유학의 기회를 포기한 것도 다 부모님에 대한 걱정을 앞세운 저의 짧은 생각이었습니다. 장남이니 부모님을 꼭 모시고 살아야 한다는 강박감에, 시골에 계시던 60대 후반의 부모님을 복잡한 서울로 오시게 한 것도 지금 생각하면 크게 후회되는 불효막심한 결단이었습니다. 

1950년대 중반에, 서울에 있는 미국대사관에 근무하던 저는 명절 때 고향집을 찾을 기회가 많지 않은 것에 죄책감을 많이 느꼈습니다. 연육교가 아직 없었던 당시의 남해에 가는 교통편은 아주 불편하여, 1년에 한 번 고향 찾는 것도 어려운 형편이었습니다. 자기 중심으로 생각하여 무리하게 노부모를 서울로 모시는 어려운 결단을 한 것입니다. 

오랜 고민 끝에, 부모님은 정든 고향 땅과 집을 정리하고 복잡한 도시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외향적이고 한량 기질이 많으신 아버지는 차츰 도시의 편리성과 시골과는 비할 수 없는 문화 혜택에 잘 적응하시는 모양이었으나, 어머니는 아들과 합가한 10년 후 뇌졸중으로 돌아가실 때까지, 고향의 너그러운 인정과 자연 환경을 항상 마음속으로 그리워하셨습니다. 

결과적으로 지금 생각해 보면, 노령을 무릅쓴 이 도시 이주는 부모님께 결코 상책이 아니었던 것이 분명한 것 같아, 나이 들수록 후회를 하고 있습니다. 지금처럼 교통과 전화 등 문명이기가 발달해 있었더라면, 그렇게  무리하게  고향을 떠나시게 하는 일은 결코 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할 때마다 이 마음의 상처가 새로 돋는 것 같습니다. 

부모님께 효도한다는 것은 이렇게 어려우며, 두고두고 후회의 씨를 남기게 하는 수가 있습니다.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 저지른 불효가 아흔둘(92)이 되는 오늘날까지 저를 괴롭히고 있습니다.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자유칼럼그룹은 특정한 주의나 입장을 표방하지 않습니다.

필자소개

황경춘

일본 주오(中央)대 법과 중퇴
AP통신 서울지국 특파원, 지국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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