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70년/구일본군위안부①】성폭행 대책•성병 예방 위해 ‘위안소’ 설치…아시아에서 남태평양까지


주한일본대사관 앞의 ‘평화의 소녀상 출처 koreareporter.org


* 동영상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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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중에 일본군은 아시아와 남태평양 각지에 ‘위안소’를 설치, 일본군 장병을 상대하기 위해 많은 여성들을 ‘종군 위안부’로 보냈다. 전후 일본 정부는, 속임수 등 본인의 의사에 반해 여성을 모집한 사례가 다수 있었다고 인정했다. 전투와는 다른 전쟁터의 단면. 이에 관여한 전 군인은 “죄책감을 갖고 있다”고 털어 놓았고, 피해 여성은 지금도 비통한 기억에 고통을 받고 있다.


일본군이 위안소 개설에 착수한 것은 1932년 상하이(上海) 사변 때부터인 것으로 여겨진다. 현지에서 강간 사건이 빈발하자 육군의 고급 참모는 일기에 “적극적인 시설 설치 승인을 통한 병사들의 성문제 해결책을 배려해 이의 실현에 착수한다”고 기술했다.


일본 육군이 사용한 콘돔 ‘도쓰게키이치반’(突撃一番, 

아래)과 성병예방약 ‘세히코(星秘膏)’(‘여성들의 전쟁과 

평화 자료관(wam)’ 소장)【교도통신】2015/08/31


1937년 7월에 일•중 전쟁이 발발하자 위안소 설치도 본격화됐다. 성병 예방도 목적 중 하나였던 것으로 보인다. 육군의 위안부 제도 창설자인 오카무라 야스지(岡村寧次) 대장은 “각 병단(兵団)은 거의 대부분 위안부단을 수행해 예하 병단 부대 내 하나의 분대가 된 형국”이라고 회상록에 기술했다.


1937년 9월, 육군은 ‘야전 주보(酒保) 규정’을 개정했다. 주보는 야전군에 설치된 물품 판매소로 개정 설명서에서는 주보에 부속 시설로 ‘위안 시설’ 설치가 가능하다고 명기했다.


1941년 12월에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자 위안소는 필리핀과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 전역과 솔로몬 제도 등 남태평양에까지 확대됐다.


군이 선정한 민간 업자가 운영하면서 여성 모집을 담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여성은 일본인과 당시 식민지였던 조선(한)반도, 타이완(台湾) 출신자 이외에 중국 등 현지 여성들이었다. 증언 등에 따르면 (1)다른 직업을 소개한다는 말에 속아 끌려왔다 (2)일본군에게 납치당했다 (3)원래 매춘업에 종사했다는 등의 경우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성의 총 인원수에 관한 공식 기록은 없으며, 일본인 연구자 사이에서도 2만 명~20만 명이라는 견해로 나뉘어 있다.【교도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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