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출판기념회 [정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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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출판기념회

2015.08.20


유명한 강연회나 소문난 문화.예술 행사에는 사람들이 많이 몰리게 마련입니다. 이런 대중성 있는 행사 외에 개인적 친분을 바탕으로 많은 사람이 모이는 행사로는, 애경사(哀慶事)를 빼면 아마도 출판기념회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심심찮게 주목을 받아온 정치인 출판기념회는 사람들로 붐빌 뿐 아니라 돈 봉투로도 붐빕니다. 이런 눈꼴사나운 출판기념회는 이름만 출판기념회지 실은 오는 사람들이 책보다는 저자와 눈도장 찍는 일에 더 신경을 쓰는 행사입니다. 그런 출판기념회는 불러주지 않아도 하나 아쉬울 것 없지만 이번에 정말 ‘우연찮게’ 참석하게 된 한 출판기념회는 말 그대로 '특별한' 출판기념회였습니다.

남시욱(南時旭) 전 동아일보 논설실장 겸 현 고려대 석좌교수가 쓴 [6.25전쟁과 미국]이란 책의 출판기념회가 지난 8월 10일 프레스센터에서 있었습니다. 저는 저자와 같은 대학, 같은 학과라는 것 외에는 아무 연고도 없으며 다만 저자가 동아일보 출신의 저명한 기자임을 익히 알고 그의 저작들에 관심을 가져본 정도이므로 그 출판기념회에 초청을 받을 형편도 아니었고 나아가 그런 행사가 있는지조차도 몰랐습니다. 얼마 전 대학 친구와의 점심 자리에서 그 책의 출판기념회가 있을 것이란 이야기를 전해 듣고는 꼭 가봐야겠다고 마음먹었고  며칠 후 그 출판기념회에 참석하였습니다. 정식 초청을 받지 않고 갔으니 말하자면 불청객이었던 셈입니다.

저로서는 무엇보다 [6.25전쟁과 미국]이란 책 제목에 매혹되었던 것 같습니다. 6.25전쟁은 한때 ‘잊혀진 전쟁(The Forgotten War)’으로도 불렸지만, 냉전이 열전화되면서 일어난 민족적 대사변이자 세계적 대사건으로서 지금까지도 국내외적으로 큰 영향을 주고 있는 사건입니다. 게다가 참전 이래 우리의 명줄이라 할 만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 미국의 개입과 역할, 특히 당시 무대의 주인공들인 트루먼, 에치슨, 맥아더 등의 역할에 관한 이야기이니 어찌 관심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사실 정치학을 공부했다고는 하지만 우리 민족의 운명을 가른 대사건의 전말(顚末)을 단편적으로 접한 것 말고는 한 번도 진지하게 6.25를 연구해본 적이 없는 저로서는 지금 이런 저술이 나왔다는 사실 자체에 쾌재를 부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자는 “무엇보다도 독자들에게, 특히 장차 이 나라의 주인이 될 젊은 세대들이 6.25전쟁을 바르게 이해하고 이런 비극이 두 번 다시 되풀이되지 않도록 교훈을 얻는 데 조금이라도 기여하기 위해서이다”라고 책을 펴낸 동기를 밝히고 있습니다. 5백여 페이지에 이르는 이 대작은 1990년대 초 소련 붕괴 후 단행된 비밀문서의 공개가 없었더라면 나오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이전에 나온 같은 주제의 책들과는 달리, 새로 공개된 방대한 자료를 토대로 전쟁의 발발 배경과 원인, 그리고 휴전에 이르기까지의 6.25전쟁과 관련한 국제정치를 전반적으로 새롭게 쓴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6.25전쟁과 미국]은 이렇듯 새로운 사실(史實)에 기초함으로써 소위 전통이론과 수정주의의 대립을 넘는 접근을 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미.소 대결이라는 점에서 보자면 스탈린이 유럽에서 미국과의 냉전에서 밀리자 이를 만회하기 위해 김일성으로 하여금 남한을 정복하도록 허가한 것이다. 스탈린은 이를 통해 당시 세계 변방인 한반도에서 얄타체제를 깨고 소련에 유리한 새로운 극동질서를 수립하려고 했다.”고 갈파합니다.  또한 자신의 저술에 대해 “6.25전쟁 시기 미국의 한반도 정책과 전쟁수행 전략 및 이에 따른 미.소.중.영 4국간의 외교전을 살피는 데 초점을 둔 연구서”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6.25로 인해 고착된 분단의 어두운 현실에 놓여 있는 우리나라의 지도층은 물론 우리의 미래를 짊어질, 생각 있는 젊은층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라 생각됩니다.

출판기념회 행사장에는 동아일보 인사를 비롯한 전.현직 유명 언론인들과 총리.장관을 지낸 인사들, 총리급 또는 그 이상으로 통하는 분들, 그리고 정계, 외교계, 학계의 원로들이 좌석 앞 몇 줄을 가득 채우고 있었습니다. 대한민국 인물 열전을 보는 느낌만으로도 대단한 행사였지만 이 행사가 특별했던 또 하나의 이유는, 회식 시간을 뺀 본 행사에만 두어 시간이 소요되었다는 점입니다. 행사를 주최한 동우회(東友會) 회장의 인사말과 김학준, 김동길, 박봉식 등 저명인사 총 5명의 서평과 축사에 이어 6.25 시낭송이 있었고, 그리고 미국 트루먼도서관의 디바인(Michael Divine) 관장까지 나와서 축사를 한, 길고 긴 출판기념회였습니다. 그런데도 행사가 전혀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클라이맥스는 저자인 남시욱 교수의 말씀이었습니다. 팔십이 몇 해 남지 않은 노 교수이자 전직 언론인인 저자는 출판의 변(辯)으로 여러 가지를 내세웠지만 저에게 가장 남는 말은 ‘기자 시절부터 쓰고 싶은 생각이 있었던 책’이라고 한 대목입니다. 저는 그 한마디로서 이 책의 내용과 깊이를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유능한 기자가 쓴 훌륭한 기사만 해도 사초(史草)로서 손색이 없는데 그런 기자가 생애의 작업으로 펴낸 책이라면 어찌 깊은 내용이 없겠나 하고 말입니다. 평생을 육하(六何)원칙 속에서 살아온 분이 6.25라는 대사건을 학자적 자세로 다루었다면 ‘믿고 읽어도 될’ 책의 범주에 들고도 남을 것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어떤 연사의 재치 있는 지적처럼, "저널리즘의 요체인 생략(omission)과 아카데미즘의 요체인 부연(elaboration)"을 균형 있게 배합하여 쓴 책이라면 그 학문적 연구의 깊이와 함께 독자에 대한 강한 전달력을 짐작할 만하다고 하겠습니다.

책의 출판기념회가 특별했던 만큼 저자 또한 대단하고 특별한 분이라 생각됩니다. 남시욱 저자는 성공한 언론인으로서만도 세인의 존경을 받아 왔는데 틈틈이 공부하여 석사를 하고 나서 은퇴 후 다시 모교에 들어가 박사 학위까지 마쳤으니 그 학구의 열이 참으로 대단하다 아니 할 수 없습니다. 기자로 출발하여 학자로 끝을 맺는 분이 더러 있지만 보통 사람이라면 50, 60대에서 경력을 끝내고 나머지는 무난한 사회생활로 마치는 게 정석인데 저자의 경우 노익장을 과시하면서 만학의 길을 걸어 성공을 이룬 케이스라 하겠습니다. 외교관 출신으로 대학자가 된 영국의 카( E. H. Carr,1892~1982)나 미국의 케난(George Kennan,1904~2005)을 떠올리게 합니다.

마지막으로 저자가 방점을 둔 책의 결론 한 부분만 인용하겠습니다. “동서냉전이 없었다면 미국은 참전하지 않았을 것이며 미국이 참전하지 않았다면 그 후 실제로 전개된 모습의 6.25전쟁은 없었을 것이다. 트루먼과 애치슨이 김일성의 배후에서 스탈린이 북한군을 무장시키고 작전계획을 짰다는 사실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참전을 망설였다면 전쟁은 아마도 몇 주 이상 끌지 못했을 것이다. 대한민국은 사실상 지구에서 소멸했을 가능성이 크다.”  해방 후의 한국 현대사에서 6.25만큼 중요한 고비가 없었는 데도 항간에서 6.25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사례가 적지 않다는 것은 심히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저는 이 책이 이런 상황을 불식시키는 데도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합니다. 

저는 제주에 살아서 멀리 휴가를 떠날 일도 없지만 뜻밖에 조우한 이 노작(勞作)의 덕으로 무더위를 잊을 수 있었습니다. 책이 출간된 것은 훨씬 앞서 5월 25일이었는데, 전쟁 발발일인 6월 25일에 맞추어 출판기념회를 가지려던 당초의 계획이 메르스사태로 지연되다가 8월 초순에야 이뤄질 수 있었다고 합니다. 저로서는 찜통더위의 한가운데서 이 책을 만나 오히려 다행이었다고 할까요, 어쨌든 이 책으로 인해 우리 현대사의 중요 부분에 대한 궁금증이 많이 풀려 참으로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동문 대선배이신 저자에게 깊은 감사를 드리고자 합니다. 

필자소개

정달호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후 줄곧 외교관으로 일했으며 주 파나마, 이집트대사를 역임했다. 은퇴 후 제주에 일자리를 얻는 바람에 절로 귀촌을 하게 되었고, 현재 제주평화연구원 객원연구위원으로 있으면서 한라산 자락에 텃밭과 꽃나무들을 가꾸며 자연의 품에서 생활의 즐거움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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