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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노루와 마주하다
2015.07.08
작년 여름, 아마도 이맘때였을 것입니다. 이 난(欄)에서 노루 이야기를 한 번 한 적이 있지요. 노루에게 시달리던 어린 매화나무들을 지킨다고, 담을 넘어 침입한 노루들을 쫓곤 하던 어느 날 어미 노루 한 마리가 동네 농장을 지키는 견공들에 의해 추적을 받았습니다. 노루는 익숙한 루트를 따라 저희 집 돌담을 넘어 넓은 마당으로 들어왔지만 종당에는 개들의 끈질긴 공격에 맥없이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노루는 이상하게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채 녹색의 잔디 위에서 장렬하게 산화(散華)했습니다. 풀밭에 누운 자태가 우아하게 보이기까지 하였습니다. 어미는 '생과 사'를 결정짓는 마지막 순간에 새끼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을 생각했을까요, 무표정인 듯하면서도 슬퍼 보였습니다. 노루와의 전쟁에서 정말 보고 싶지 않은 결말이었습니다. 그후로부터 노루가 우리 매실 밭을 침범하는 것을 보질 못했습니다. 식구들이 어디선가에 숨어서 어미의 죽음을 지켜보았거나 아니면 그들 나름의 육감이었거나 간에 노루는 한동안 마당에 얼씬도 하지 않았답니다. 적극적인 포획으로 인한 개체수 감소도 그 한 요인이었을 것입니다.사실 노루가 너무 눈에 띄지 않아도 마음이 그리 흔쾌하진 않습니다. 그때도 말했지만, 길 가다가 노루를 만나면 왠지 운수가 좋을 거라고 생각하는 버릇이 생겨서일 것입니다. 노루가 아예 나타나지 않으면 운수를 기대해 볼 수도 없는 게 되니까요. 또 매화나무들이 그새 제법 컸기 때문에 아주 큰 놈이 아니면 나무를 통째로 거덜을 낼 수는 없을 터라 노루에 대한 걱정이 전보다 훨씬 줄어들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조용한 일상에서 뭔가 새로운 사건(?)을 기대하는 마음에서 '노루들아, 올 테면 오라!'는 심정이었습니다.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노루가 출현했습니다. 지난 일요일이었지요. 새벽 산책 차 잔디 길을 밟아 언덕으로 올라갔는데 몇 발짝이나 뗐을까, 갑자기 풀섶에서 푸드득 하는 소리가 났습니다. 고개를 쳐들어 보니 큰 꿩 한 마리가 무거운 몸짓으로 돌담 위로 날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창졸 간이라 까투리였는지 장끼였는지도 분간할 수 없었습니다. 꿩이야 숲 속 도처에 있으니 그리 대단한 일은 아니지만 다만 근래 본 꿩 중에서는 제일로 큰 놈이 아니었나 싶습니다.가벼운 놀라움 속 꿩과의 조우가 채 끝나기도 전에 위에서 부시시 하는 소리가 또 들렸습니다. 구부러진 길이라 아래선 잘 보이지 않는 저 위 구석으로부터 예쁜 노루 한 마리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녀석은 이렇게 들킬 줄을 몰랐던지, 별로 경계하는 기색도 없이 슬그머니 나와서 저를 마주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저도 워낙 오랜만에 노루를 보았기에 그 자리에 서서 녀석을 가만히 지켜보았습니다.금세 정신을 차린 듯, 노루는 퇴로를 찾아 이리저리 살피다가 노루 망에 틈새가 보이지 않자 다시 풀숲에 숨어서 방해자를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저도 이 작고 귀여운 놈을 한참 쳐다보면서 우선 스마트폰으로 두어 장 찍었습니다. 그리고는 다른 데로 사라졌으려니 하고 폰을 주머니에 넣고 접근했더니 그제서야 나갈 구멍을 찾은 노루는 부리나케 그곳을 빠져나갔습니다.
참 아쉬운 순간이었습니다.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넣지 않고 그대로 손에 들고 있다가 노루가 망 틈새로 몸을 구겨 빠져나가는 모습을 잡았더라면 기가 막힌 그림이 나왔을 텐데 하고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순간적인 실책을 후회했지만 지나간 일을 어쩌겠습니까. 그래도 풀숲에 숨어서 저를 빤히 쳐다보는 모습이라도 잡았으니 다행이지요. 노루가 숨어 있는 모습이 마치 숨은 그림 찾기처럼 보입니다.노루와의 아쉬운 헤어짐이 있고 나서 이틀이 지났습니다. 노루 망 바닥에 난 틈새를 큰 돌로 눌러 막았으니 이제 노루는 다시 들어오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혹시나 그 노루를 다시 볼지도 모른다는, 기대 아닌 기대도 있어서 오후 늦게 다시 그 장소로 갔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때 만난 바로 그 노루가 다시 들어와서 매화나무 순을 뜯어먹고 있었습니다. 기척을 느낀 순간 노루는 풀숲서 화들짝 튀어나왔습니다. 놀란 그 모습이 귀여워서기도 했지만 일부러 쫓으려고 하지도 않았는데 황망지간에 퇴로를 못 찾은 노루는 아래쪽 바위 뒤로 사라졌습니다. 노루의 2차 침투 경로를 자세히 살펴보니 그제 막은 노루 망 틈새 옆에 또 다른 틈새가 있어 다시 큰 돌을 찾아 눌러서 막았습니다. 아래 마당으로 내려갔거니 하고 저도 마당으로 내려갔는데 녀석은 풀숲 아래 내리막 바위 언저리에 있다가 위로 황급히 올라갔습니다. 다시 위로 올라갔더니 녀석은 여태 퇴로를 찾지 못해 아래로 또 내려갔습니다. 도망칠 때의 노루는 정말 빠릅니다. 언덕을 올라가든 내려가든 사람이 노루의 걸음을 따를 순 없을 것입다. 지형이 아무리 험난해도 노루는 잘만 타고 다닙니다. 이번에는 언덕을 따라 아예 마당으로 내려가더라고요. 내려가서 두루 살펴보았는데도 노루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상황이 끝났다 싶었지만 다시 올라가서 노루가 거기에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마도 직업적인 버릇의 탓으로, 저 유명한 “믿어라 그러나 확인해라!(Trust, but verify!)”라는 레이건(Ronald Reagan) 대통령의 금언(dictum)에 충실하고자 했던 모양입니다. 현장에 다시 올라가본즉, 영리하기로 이름 난 노루는 역시나 숨어서 매화나무 순을 따먹고 있었습니다.
여기까지 오고 보니 저도 더 이상 노루를 귀엽게만 봐줄 수 없었습니다. 노루가 딱히 미운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매화나무도 지켜야 했으니까요. 나아가 마당의 주인인 제가 노루에게 이렇게 속을 수만은 없다는 생각이었지요. 급히 다가갔더니 노루는 아까처럼 아래로 도망을 쳤습니다. 다시 내려가서 사방 살펴보았지만 어디로 사라졌는지 노루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젠 정말 '상황 끝'이라고 스스로 선언하였습니다.그후 며칠이 지나도록 노루는 다시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나름대로 마음을 정하였습니다. ‘좋다. 올 테면 와라! 너희들이 여린 순을 따먹어도 이제 키가 웬만큼 된 매화나무들이 죽지는 않을 것이다. 먹을 만큼 먹어라. 그것도 너희들의 복이요 권리가 아니겠느냐. 자연이 준 온갖 것들에 임자가 어디 따로 있다더냐.’ 하고 말입니다. 닷새가 지난 오늘까지 노루는 오지 않고 있습니다.그런데 오늘 아침 시내로 가기 위해 숲길을 지났습니다. 오전 11시, 대낮인 데도 작은 노루 한 마리가 길을 건너가면서 이쪽을 빤히 쳐다보았습니다. 노루를 만났으니 속으로 쾌재(快哉)를 부르면서, ‘노루야, 우리 집으로 오너라. 이젠 더 못살게 굴지 않을 테니까.’ 하고 속으로 뇌었습니다. 오후 시내에 나가 시간을 보내는 가운데 기대하지 않던 좋은 일들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어떤 문인으로부터 자기 책을 두 권이나 보내 주겠다는 약속을 받은 것도 그 중 하나랍니다. 아침 길에서 마주친 그 노루가 가져다 준 운(運)인가 하고 생각해 봅니다.
필자소개
정달호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후 줄곧 외교관으로 일했으며 주 파나마, 이집트대사를 역임했다. 은퇴 후 제주에 일자리를 얻는 바람에 절로 귀촌을 하게 되었고, 현재 제주평화연구원 객원연구위원으로 있으면서 한라산 자락에 텃밭과 꽃나무들을 가꾸며 자연의 품에서 생활의 즐거움을 찾는다.
박대문의 야생초사랑
참통발 (통발과) (Utricularia tenuicaulis Miki)
화려한 연꽃과 수련이 7월의 태양 아래 어른거리는 물비늘 사이에서 곱게 피어나는데 내버린 그물처럼 시커멓게 엉켜있는 물속 이끼에서도 점점이 노란 꽃이 피어나고 있습니다. 식충식물인 참통발입니다. 무릇 생물은 지구에 탄생한 이래 기나긴 세월을 살아오는 동안 변화하는 숱한 환경에 적응해야만 했습니다.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이라는 치열한 삶의 투쟁이 바로 오늘의 살아있음이기 때문입니다.
박대문
환경부에서 공직생활을 하는 동안 과장, 국장, 청와대 환경비서관을 역임했다.우리꽃 자생지 탐사와 사진 촬영을 취미로 삼고 있으며,시집 『꽃벌판 저 너머로』, 『꽃 사진 한 장』, 『꽃 따라 구름 따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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