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번 환자, 송길용 씨 [박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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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번 환자, 송길용 씨

2015.06.26


방송사에 오래 근무를 하다 보면 소위 ‘감’이라는 것이 생깁니다. 어떤 사건이 발생했을 때, 그 사건의 여파가 얼마나 크고 오래 갈 것인가를 누가 설명하지 않아도 느낌으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 5월 시작된 중동호흡기증후군 즉, 메르스(MERS) 사태를 보며 ‘적어도 6월 한 달은 메르스가 모든 뉴스의 중심이 되겠구나’하고 생각했습니다. 

배트맨 시리즈 중 걸작으로 꼽히는 다크 나이트(Dark Knight)에서, 악당 조커가 했던 명대사 중에 혼란과 두려움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내가 가스 몇 통과 총알 몇 발로 이 도시에 한 짓을 봐. 내가 무엇을 깨달았는지 알아? 모든 게 계획대로 되면 그 계획이 아주 무시무시한 것일지라도 아무도 당황해하지 않지. 내가 언론에다가 어떤 갱 멤버가 총에 맞아 죽을 거라고 하거나 군인이 탄 트럭이 통째로 터져버린다고 해도 놀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걸? 왜냐하면 그런 것들은 다 계획의 일부거든(갱이나 군인은 항상 생명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존재라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하지만 내가 어떤 노인 한 명을 죽일 거라고 말하면 모두들 아주 그냥 기겁을 하지. 혼란이 뭔지 보여줄까? 확립된 질서를 무너뜨리면 모든 게 혼란스러워지지. 나는 혼란을 대표하지. 아 그리고 혼란이라는 것은 말이야. 두려움과 같은 거야.”

메르스 사태의 초기 상황은 말 그대로 어디서 터질지 모르는 혼돈과 두려움의 연속이었습니다. 정보가 공개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두려움은 더 증폭되었습니다. 혼란 속에서 두려움을 느끼는 대중은 모든 정보를 뉴스에 의존하게 됩니다. 그리고 지난 한 달간, 어제 확진 환자가 몇 명이 늘었고, 몇 명이 사망했으며, 몇 명이 격리되었는지를 매일 아침 뉴스를 통해 확인하면서 가슴 졸이는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패턴이 반복되고 모든 정보가 공개되면서 사람들은 다시 평정심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다소 불안한 마음이 남아 있긴 해도 이제 메르스가 통제 가능해지는 것을 느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왜 진작에 모든 정보를 공개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은 강하게 남습니다. 

이렇게 강력한 뉴스가 등장하면 다른 뉴스들은 순위가 밀립니다. 그리고 언론의 아젠다 세팅(agenda setting) 기능은 일시적으로 정지합니다. 6월 둘째, 셋째 주의 시사 주간지의 주요 이슈는 메르스와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큰 파도가 몰아치는 바다에 돌멩이 하나 던져 봐야 아무런 표가 나지 않듯이 메르스 사태 앞에 다른 모든 기사는 묻히고 맙니다. 이렇게 메르스는 공룡처럼 우리의 한 달을 집어삼켰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진행 중입니다. 

다소 뜬금없지만 이 시점에 장기 실종자와 관련한 뉴스를 생각해봅니다. 메르스 사태가 발생하기 전 다수의 매체에서 장기 실종 아동에 대한 아젠다 세팅 즉, 의제설정이 이뤄지고 있었습니다. 장기 실종 아동과 관련한 다큐멘터리 방송과 각종 보도가 뒤를 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송혜희 양의 사연이 많이 소개되었습니다. 딸을 찾으려는 아버지의 안타까운 사연이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습니다. 

“실종된 송혜희를 좀 찾아주세요.” 

송혜희 양의 부친인 송길용 씨는 무려 16년 동안 꾸준히 서울 시내 곳곳에 현수막을 내걸었습니다. 현수막이 해져서 떨어지면 다시 제작해서 걸기를 반복하였습니다. 필자 역시 서울뿐만 아니라 지방에서도 같은 현수막을 본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얼마나 애가 타면 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현수막을 새로 제작해가며 내걸고 있을까를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한편, 그 많은 비용은 어떻게 감당하고 있을까? 라는 걱정과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필자가 기억하기로는 현수막이 걸려 있는 장소만도 한두 곳이 아니고 현수막을 저렇게 많이 내걸었으면 전단지도 무척 많이 제작했을 텐데 이 모든 비용을 부담하는 것을 보니 꽤 재력이 있는 부모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너무나 달랐습니다. 사랑하던 딸이 사라지고 난 후, 생업을 포기하고 딸을 찾아 전국 곳곳을 찾아 헤매면서 가세는 급속도로 기울었고 송혜희 양의 부모는 트럭에 라면과 버너만을 싣고 딸을 찾아 전국을 돌아다녔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송혜희 양의 모친은 딸의 사진이 담긴 전단지를 가슴에 안은 채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고 합니다. 단란했던 가정이 장기 실종 사고로 풍비박산이 난 것입니다. 

하지만 송길용 씨는 딸을 찾는 일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기초생활수급자로 전락했지만 지원금 60만 원 중 40만 원을 전단과 현수막 제작에 쓰고 있다고 합니다. 그동안 나눠준 전단은 무려 200만 장, 제작한 현수막은 4,000여 장이나 된다고 합니다. 휴대전화 번호도 016으로 시작되는 번호를 아직도 쓰고 있는데 혹시나 딸이 이 번호로 전화를 걸어올 것 같기 때문이랍니다. 

송길용 씨의 사례는 단란했던 가정이 위기에 놓였을 때, 그 위기를 극복하는 데 우리 사회가 어떤 도움을 줘야 하는지를 깨우쳐주고 있습니다. 사라진 가족을 찾는 것이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일이지만 만에 하나 실종이 장기화하는 경우, 남은 가족이 일상을 유지할 수 있게 사회적 배려를 해야 한다는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특히, 기초생활수급자인 아버지가 지원금을 쪼개서 전단지와 현수막을 제작한다는 얘기에 같은 시대를 사는 우리 모두는 부끄러움을 느껴야 합니다. 

웬만한 지자체나 정부 부처의 조직을 들여다보면 산하 단체와 관련 단체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름을 들어 본 것 같은 단체도 있고 전혀 들어본 적 없는 생소한 단체는 더 많습니다. 어쨌든 이 단체들마다 기관장이 있으며 이들의 월급은 국민이 내는 세금으로 충당합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만수산에 드렁칡이 얽히고설킨 것처럼 온갖 이익집단들이 난립해서 나랏돈은 먼저 먹는 놈이 임자라는 말을 앞다퉈 실천하고 있습니다. 아파트 단지 주차장의 전등을 LED등으로 바꾸는 데 지자체가 수천만 원을 지원해 주는 나라, 회원 수가 많은 단체가 세미나를 한다고 손을 벌리면 수천만 원씩 척척 지원을 해주는 나라, 인기 연예인을 홍보대사로 기용하며 모델료로 수천만, 수억 원을 쓰는 나라가 우리나라입니다. 자기 돈도 아니면서 다음 선거의 표가 되고 자신의 치적을 알리는 곳에는 돈을 펑펑 씁니다. 그리고 정작 도움이 절실한 곳에는 인색합니다. 

메르스 사태가 있기 전, 장기 실종자 문제에 대한 깊은 성찰이 진행 중이었습니다. 실종자를 찾는 문제뿐만이 아니라 내 자식이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도 모르고 평생을 고통 속에 살아야 하는 장기 실종자 가족에게 우리 사회가 어떤 도움을 줘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도 함께하는 중이었습니다. 이런 와중에 메르스 사태가 발생한 것입니다. 의식이 족해야 예절을 알듯이 사회가 평안해야 어려운 곳을 돌아보게 되는 법입니다. 장기 실종자와 그 가족에 대한 사회적 안전망을 좀더 촘촘히 구축해서 우리 사회가 한 단계 성숙해질 수 있는 기회를 메르스가 앗아가는 것은 아닌지 필자는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 놀라운 뉴스를 접하게 됐습니다. 바로 송길용 씨가 메르스에 감염되었다가 완치되었다는 소식입니다. 

송 씨는 실종된 딸을 찾기 위해 전국을 누비다 뇌경색과 허리 통증 증세가 심해져 지난달 20일부터 일주일간 평택성모병원에 입원했다가 메르스에 감염되어 39번 환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치료를 받던 도중 송씨는 ‘메르스란 병으로 사랑하는 딸을 만나보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나면…’이라는 생각에 눈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는 꺾이지 않았습니다. 고열과 폐를 찌르는 고통 속에서도 결국 딸을 찾아야겠다는 의지로 버텼고 지난 18일 완치 판정을 받았다고 합니다. 지금쯤 송길용 씨는 헤어진 딸을 찾기 위해 어쩌면 메르스보다 더 외롭고 두려운 여정을 다시 시작하고 있을 겁니다.

사랑하는 딸이 어느 날 갑자기 집에 돌아오지 못하고, 아내는 우울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생업을 포기하고 딸을 찾으러 다니다가 지병을 얻어 입원한 병원이 하필이면 메르스가 창궐한 바로 그 병원이어서 메르스에 감염되어 외로이 투병을 해야 했던 송길용 씨. 해도해도 너무한다 싶을 정도로 가혹한 운명이라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송길용 씨는 우리에게 오히려 희망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메르스는 절대로 치료가 어려운 병이 아니다. 누구든지 이겨낼 수 있다”며 밝게 웃는 모습을 보여준 것입니다.

지금 당장은 메르스를 극복해야 하는 것이 시급합니다만, 가까운 미래의 어느 날 우리가 송길용 씨에게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가 함께 찾아드리겠습니다. 장기 실종자 가족이 외롭고 힘든 길을 더 이상 혼자 가게 하지는 않겠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 봅니다.

필자소개

박상도

SBS 아나운서. 보성고ㆍ 연세대 사회학과 졸. 미 샌프란시스코주립대 언론정보학과 대학원 졸. 
현재 SBS TV 토요일 아침 '모닝와이드'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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