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장 선생'과 메르스 [신아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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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장 선생'과 메르스

2015.06.23


‘메르스 사태’를 보면서 1998년에 제작된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의 영화 <간장 선생>이 떠올랐습니다. <간장 선생>은 1945년 원폭 투하를 두 달 앞둔, 패망 직전 히로시마의 작은 어촌을 배경으로 한 영화입니다.  

주인공 아카기는 환자를 위해서라면 죽을 때까지 달린다는 좌우명을 가진, 투철한 사명감으로 똘똘 뭉친 의사이지만 어이없게도 돌팔이 소리를 듣습니다. 이유는 환자마다 무조건 간염이라고 진단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국기 게양대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일장기를 달고 있는 사람에게 “너무 무리하지 마, 그러다 간염 걸려.” 이렇게 말할 정도입니다.  '간장 선생'이라는 그의 닉네임도 그렇게 해서 생겼습니다. 

내용 자체는 코믹하지만 다양한 은유와 함축적 상징을 바탕으로 설정하고 있습니다. 간장 선생이 환자들에게 죄다 간염 진단을 내리는 것도 일본의 제국주의 망상을 은유적, 상징적으로 드러내고자 하는 장치인 것입니다. 말하자면 일본이 ‘간뗑이가 붓지 않고서야’ 어찌 그런 야욕을 드러낼 수 있냐는 거지요. 그런 집단적 망상이 곧 일본의 질병이라는 은유적 증거를 “일본인들은 모두 간염 환자야.”라고 혼자 중얼거리는 것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연합군 포로가 자신을 고문하는 일본군을 향해 ‘간염 같은 놈’이라고 내뱉는 것과, 히로시마 원폭의 버섯구름을 보고 비대해진 간 덩어리를 연상하는 간장 선생의 시선 등이 우리 식의 욕인 ‘염병할 놈’을 상기시킵니다. 요즘이라면 ‘메르스 걸릴 놈’이라고 해야겠지요. 

한마디로 영화 속에서 간염이 만연한 일본이 메르스가 창궐한 지금의 우리나라를 상징하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그렇다면 지극한 애민에 애국심까지 겸비한 간장 선생에게 무능한 돌팔이라는 낙인을 찍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다름 아니라 '잘 먹고 잘 쉬라'는 그가 내린 처방 탓입니다. 

간염에 대한 처방으로 ‘무조건 잘 먹고 잘 쉬어야 한다’는 것이 왜 문제냐구요? 간염에 대한 처방으로 이보다 더 명확한 것이 없음에도, 간염 치료의 정석을 말하건만, 간장 선생이 돌팔이로 몰리다 못해 당국으로부터 요시찰 인물이 된 연유가 무엇이냐구요?

알다시피 당시는 전시입니다. 그것도 패망을 눈앞에 둔, 싸움을 건 당사국으로서 발악의 시기입니다. 잘 먹고 잘 쉬기는커녕 연명하기에도 식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때에 그러한 처방은 사태 파악이 안 되는 한가함을 넘어 위험하기까지 한 약방문일 밖에요. 

간장 선생의 간염에 대한 처방이 우리 정부의 메르스에 대한 처방과 흡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른 건 몰라도 ‘사람 많은 곳에 가지 말라’는 말이 그렇습니다. 현실과 동떨어져도 너무나 동떨어진 소리 아닌가요? 

질병 치료란 의학적 조건 말고도 사회적 조건과도 맞물려 있기 마련입니다. 몰라서 못 하는 게 아니라 알고도 할 수 없는 치료가 있다는 뜻입니다. 의학적으로는 명확한 처방이라도 사회적 여건상  하나마나한 소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당장 출퇴근 시간대의 지하철을 타보십시오. 평상시에도 옆 사람과 코와 입이 닿을세라, 호흡이 엉킬세라 고개를 외로 꼬아야 하는 상황에서, 메르스를 예방하려면 사람 많은 곳을 피하라 하니, 메르스에 걸리기 전에 먼저 굶어 죽게 생겼지 않습니까. 미친 전쟁 중에 잘 먹고 잘 쉬기나, 생업 전선에서 사람 많은 곳을 피하기나,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둘 다 사회적, 현실적 조건상 불가능에 가까우니까요.  

영화 속 아카기는 “한 다리가 이상이 있으면, 다른 한 다리로 달려야 하며, 두 다리 모두 이상이 있으면, 두 팔로라도 달려야 한다!"는 자신의 좌우명을 중얼거리며 오늘도 미친 듯이 달려갑니다. 

하지만 아카기는 간염이 만연하게 된 원인에 대해서만큼은 명확히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 원인은 곧 패권주의에 눈이 먼 정권이라고 은유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정부는 메르스가 왜 온 나라를 휩쓸게 되었는지 이유를 모르는 것 같습니다. 

<간장 선생>에서 국민과 주변국가를 전쟁의 핍박으로 몰고 간 군국주의 정권이 간염을 퍼뜨렸듯이, 무능하고 안일하고 자기 보신에만 급급한 현 정권이 메르스를 잡지 못했다는 것을 자신들은 모르는 것 같습니다. 간장 선생이 이번에는 “한국인은 모두 메르스 환자야.”라고 진단을 내리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자유칼럼그룹은 특정한 주의나 입장을 표방하지 않습니다.

필자소개

신아연

이화여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1992년 7월, 호주로 떠났다. 시드니에서 호주동아일보 기자, 호주한국일보 편집국 부국장으로 일하다 2013년 8월, 한국으로 돌아와 자유기고가, 강연자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는 중앙일보, 여성중앙, 과학과 기술 등에 에세이를 연재하며, KBS 라디오에 출연 중이다.    
낸 책으로 <심심한 천국 재밌는 지옥> <아버지는 판사 아들은 주방보조>, 공저 <자식으로 산다는 것>이 있고, 2013년 봄에 <글 쓰는 여자, 밥 짓는 여자>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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