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자신을 인터뷰하며 '부모님의 삶'을 이해하다!

어릴 적에는 부모님 다투는 소리가 그렇게도 싫더니...


출처 taekwonmaru.com


중고등학교 시절, 나는 집에 있는 게 너무도 싫었다. 부모님 다투는 소리에 집에 있는 게 너무 괴로웠다. 하지만 나이를 먹으면서 부모님은 내 삶을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 그 분들 나름대로의 삶이 있었다는 걸 깨닫고 있다. 특히 지난 설 연휴 때, 외할머니댁에서 외할머니와 단 둘이 지내면서 어머니에 대한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그 과정을 내가 나를 인터뷰하는 형식으로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Q. 왜 집에 있는 게 싫었나.


A: 학창시절, 집에만 가면 부모님이 다투었다. 방 안에 홀로 앉아서 늦은 밤까지 부모님 다투는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오만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내가 무슨 잘못을 한 걸까. 나도 정말 다른 친구들처럼 부모님과 여행도 가고 고민도 털어놓는 그런 사이가 되고 싶은데. 행복한 사람이 되고 싶은데.


다투는 목소리만 들으면 왜 그렇게 화가 나고 슬프던지, 그런 내 삶과 부모님이 너무 원망스러웠다. 많이 외로웠다. 시(詩)를 쓰며 홀로 견뎌냈다. 문학적인 표현이나 상징적 이미지같은 건 없었지만, 내가 하는 생각과 느끼는 감정을 시로 표현했다. 부모님 다투는 소리가 들려도 시를 쓰는 몇 시간 만큼은 ‘온전히’ 글을 쓰는 데 집중할 수 있었다. 시 쓰기는 내가 그 시절을 버텨낸 탈출구였다. 


Q. 가정불화는 성장기 때 대부분이 겪는 문제다. 그런데도 그 시절이 유독 특별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A: 외동아들이었던 나는 가난한 집과 돈 때문에 다투는 부모님이 부끄러워 혼자서만 끙끙 앓았다. 그런 얘기들을 솔직하게 털어놓아 본 적이 없다. 그래서 다른 아이들도 그들만의 힘겨운 시기가 있었는지 알지 못했고, ‘왜 부모님은 내 마음을 이해하지 못할까?’, ‘왜 나만 이렇게 슬픈 걸까?’라는 생각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아니다. 어쩌면 알고 있었다. 나는 다른 아이들이 나만큼, 나보다 힘든 삶을 겪을 수 있다는 걸 알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른 친구들의 아픔도 내 아픔만큼 아플 수 있다는 걸 받아들이는 데까지 오래 걸렸던 것 같다.



부산 용궁사에는 ‘지금 네가 받고 있는 것을 보면 너의 과거를 알 수 있다.’는 의미가 담긴 문구가 있다. 누구나 경험했을 법한 부모님과의 불화의 나날들. 스물한 살의 나에게 그 시절이 유독 특별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그 시절이 있었기에 내가 시를 쓰게 됐고, 가정과 부모님의 의미에 대해 더 깊은 고민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쓴 시다. 내가 인식하지 못했던 과거 속에서 부모님의 따뜻함을 느낄 수 있었다는 내용이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쓴 시다. 내가 인식하지 못했던 과거 속에서 부모님의 따뜻함

을 느낄 수 있었다는 내용이다.


Q. 지금은 가정을 원망하지 않나


A: 농어촌 가정에서 태어나 가난한 시절을 겪고, IMF 외환위기로 준비도 없이 닥친 실업과 비정상적인 사교육비를 견뎌내며 부모님은 나를 키우셨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부모님의 다툼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부모님이 가난 때문에 다투는 건 단순히 부모님 탓이 아니라 사회구조적인 것이다.’ 이 생각을 표현하고자 쓴 시가 ‘눈사람의 역사’인데, 이는 내가 할머니댁에 다녀온 후 더 의미 있는 시가 됐다.        


올해 설 연휴 즈음, 나는 연휴가 시작되기 며칠 전에 외할머니댁에 먼저 내려갔다. 외할머니댁은 경상남도 고성군 하일면 수양리에 있는 시골이다. 외할머니댁에 혼자 내려가는 건 처음이었다. 수능이 막 끝났던 터라 바다 근처에 있는 외할머니댁에서 내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을 갖고 싶었다. 외할머니와 단 둘이서 4일 정도 지냈는데, 겨울이라서 추웠다. 


게다가 외할머니는 주무시는 방 외에는 보일러를 모두 꺼놓으셨다. 방을 나갈 때면 발이 시려서 양말을 신고 다녔다. 급기야 감기몸살이 나서 이틀 동안 끙끙 앓았다. 움직일 수가 없었다. 괜히 온 건가 싶기도 했다. 감기몸살이 다 나으니 이것저것 먹고 싶은 게 많아졌다. 하지만 시골 마을에는 슈퍼마켓조차도 없고 온통 바다와 논뿐이었다. 


▲할머니와 함께 다녀 온 고성군 상족암.

할머니와 함께 다녀온 고성군 상족암 


“네 엄마가 너 키운다고 고생 많이 했다. 할머니가 엄마한테 도와준 것도 없는데. 그러니까 엄마 아빠한테 잘해라.” 


외할머니는 밥을 먹을 때면 엄마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해주셨다. 엄마는 도시락 들고 1시간 동안 4km 떨어져 있는 학교를 걸어 다녔다고 한다. 야간자율학습도 빼먹지 않았단다. 하지만 대학에 가고 싶어도 남자가 아니면 집안의 반대가 심했던 시절이었다.  


“네 엄마가 대학에 가겠다고 그렇게 떼를 썼는데, 내가 그것 때문에 네 할아버지한테 얼마나 혼났는지 모른다. 기꺼이 네 엄마는 삼촌한테 돈을 빌려서 대학에 갔다.”   


가난과 숱한 고생 속에서 엄마도 한 번쯤 엄마의 부모님을 원망한 적이 있진 않았을까. 문득, 10년 뒤의 내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그 시절에 엄마도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나서 나같은 아들을 두고 지금과 같은 가정을 이루게 될 걸 상상이나 했을까. 세월은 어느새 엄마의 피부를 할퀴어 주름을 패고 있다. 이런 생각을 하다보니 나도 모르게 엄마에 대한 고마움이 느껴졌다. 


▲할머니댁에 걸려있는 내 어릴 적 사진

할머니댁에 걸려있는 내 어릴 적 사진


“셋째 딸, 우영이 아들”


내 몸이 다 낫자 할머니는 동네를 다니며 할머니 몇 분에게 나를 소개했다. 내가 아주 어렸을 적 모습만 기억하는 동네 할머니께서는 그 시절의 나를 떠올리며 “정말 많이 컸다.”며 미소를 지으셨다.  


“주호야, 네 엄마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 차도 사고 집도 사고 이렇게 너 같은 아들도 키워냈지 않느냐.” 


할머니와 단 둘이서 보낸 시골은 마치 내 어린 시절을 기록하고 전시해놓은 박물관 같았다. 현재 내 삶이 아닌, 내 어린 시절만을 기억하시는 동네 할머니들에게 나는 몸만 훌쩍 자란 ‘셋째 딸, 우영이 아들’이었다. 박물관 안내원이 되신 할머니는 밥상에 앉으면 또 다시 엄마가 나를 어떻게 키웠는지 이야기하셨다. 그러고는 꼭 이렇게 말을 끝맺으셨다.  


“주호야, 엄마 아빠한테 잘 하고 있지? 공부 열심히 해야 된다. 혼자만 잘 먹고 잘 살지 말고, 돈 많이 벌면 어려운 사람들 꼭 도와주고.”


Q. 가정의 달인 5월 마지막으로 가족에게 하고 싶은 말은.


A: “가족사진 한 번 찍자.” 


몇 달 전부터 아빠가 했던 말이다. 


우리 가족은 한 번도 가족사진을 찍은 적이 없다. 부모님과 나의 모습은 오로지 내 어린 시절 일기와 시 속에만 담겨 있을 뿐 사진으로 담겨있는 것은 없다. 5월 말이나 방학 때 집에 내려가게 된다면 가족사진 꼭 찍자고 해야겠다. 


10대는 대입준비, 20대는 취업준비, 30대는 결혼준비, 40대는 자녀양육 등의 이유로 각자 힘든 삶을 살고 있다. 5월에는 그 누구의 곁도 아닌 가족의 품에서 어떤 아픔이든 극복할 수 있는 따뜻한 가정의 달이 되었으면 좋겠다.


다정다감 정책기자단|박주호renoma9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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