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포럼에서 우리의 미래를 본다 [정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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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포럼에서 우리의 미래를 본다

2015.05.25


요즘 ‘포럼’이란 말을 자주 만나게 됩니다. 로마 시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광장'에서 유래하여  토론의 장을 뜻하는 것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최근에 있었던 큰 포럼으로, 지난 5. 19~22 일 송도에서 개최된 ‘세계교육포럼(World Ecucation Forum 2015)’과 5. 20~22일 제주 서귀포에서 열린 ‘평화와 번영을 위한 제주포럼’을 들 수 있습니다. 후자의 포럼에는 필자도 5년째 참석하고 있는데 스위스 다보스에서 매년 1월에 열리는 ‘세계경제포럼(World Economic Forum)'을 다보스포럼으로 부르는 것처럼 제주에서 열리는 이 포럼도 그냥 ‘제주포럼’으로 부릅니다. 다보스포럼이 유럽에서 열리는 거대 글로벌 포럼이라면 아시아에서 열리는 거대 글로벌 포럼은 보아오포럼입니다. 보아오포럼은 중국의 유명 휴양지인 하이난 섬에서 매년 4월에 열립니다. 이런 큰 포럼에 비하면 매년 5월에 열리는 제주포럼은 덜 유명하지만 나름대로 영역을 키워오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사실 규모로 치면 결코 작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지난 주 열린 포럼에는 59개국에서 3천7백여 명이 참석하였다고 합니다.

다보스는 스위스의 작은 시골 마을이지만 세계경제포럼으로 인해 세계적인 유명 리조트 타운이 되었으며, 보아오 역시 포럼 행사로 인해 중국 내외에서 더욱 많이 찾는 리조트가 되고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포럼이 경관이 아름다운 제주에서 열리는 것 또한 순리(順理)인 것 같습니다. 제주포럼은 2001년에 출범하여 격년제로 개최돼 오다가 2011년부터 매년 열기로 하여 이번에 제10차 포럼을 가졌습니다. 다보스포럼과 보아오포럼에는 누가 참석했는가 하는 것 자체가 화제가 될 정도로 세계 유명 정치인, 기업인, 연예인 등이 참석하고 있지만 제주포럼은 아직 그런 수준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간 제주포럼이 진화하고 발전해온 모습을 보면 참으로 대견합니다. 약 15년 불과한 기간에 아시아는 물론이거니와 우리와 이해관계가 큰 북미와 유럽 국가들을 포함한 여타 지역에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제주포럼의 핵심 행사인 세계지도자세션(World Leaders' Session)에 정치지도자로서는 대개 두셋 정도의 인사가 참여해왔는데 이번에는 거물급 정치지도자 여섯 명과 유명 기업인들도 다수 참가하였습니다. 슈뢰더 전 독일 수상, 유도유노 전 인도네시아 대통령, 후쿠다 전 일본 총리, 하워드 전 호주 수상, 클라크 전 캐나다 수상 등이며, 중국에서는 리 샤오린 인민대외우호협회 회장이 참석하였습니다. 다보스, 보아오 등 세계적 포럼에는 현직 정치지도자들이 많이 참석하는 데 비해 제주포럼에는 전직 지도자들이 주로 참석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보기에는 전직 지도자들이 훨씬 더 값진 조언을 해주는 것으로 보입니다. 현직들은 카메라 플래시를 받으면서 인기 경쟁하듯 몇 마디 던져놓고 가지만 전직 수반들의 경우는 여유를 가지고 참가하기 때문에 자신의 성공과 실패를 바탕으로 진솔한 이야기를 해줄 수 있습니다.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이 사회를 맡았던 세계지도자 세션을 통해 여러 나라의 지도자들이 남기고 간 조언을 한마디로 요약해보면 한국이 중견국으로서 더 적극적으로 세계무대에 나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한중일의 미묘한 갈등상황을 타개하는 데에 한국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였습니다. 이들에 의하면 동북아의 평화와 협력을 위해 한국이 창의적인 리더십을 발휘해 나갈 영역이 크고 또 그렇게 할 수 있는 충분한 역량이 한국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낮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으며 이웃 나라의 움직임에 지나치게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나아가 수세적 내지는 피해자적 자세를 갖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에 반해 우리나라 바깥에서 객관적으로 우리를 바라보는 시각은 이처럼 전혀 다르다는 것을 이번 제주포럼을 통해 절실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이들은 한반도 통일과 관련해서도 한국이 창의적인 구상을 가지고 주변국을 적극적으로 설득해나가야 길이 열린다는 점을 강조하였습니다. 

세계지도자 세션 못지않게 많은 포럼 참가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것은 권영세 전 주중대사가 진행한 슈뢰더 수상과의 일대일 대담이었습니다. 독일의 통일과정과 통일 후 구동독지역과의 경제사회적 통합, 그리고 통일 후 침체한 독일 경제의 부흥에 대한 논의가 주를 이루었습니다. 전자의 두 문제는 그간 국내외에서 많이 다루었으므로 더 이야기할 필요가 없겠지만 당시 현장에서 활동했던 정치지도자의 생생한 목소리로 이에 관해 들을 수 있었다는 점에 의의가 있었다고 하겠습니다. 동서독 간 일대일 화폐 교환은 독일에 엄청난 재정적 부담이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구동독인들이 대량으로 서독지역으로 밀려들어올 것이기에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합니다. 동서독 간 등가의 화폐 교환이 통일 독일의 경제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지만 장기적으로는 그것이 독일 경제의 안정과 부흥에 기여했다는 것입니다. 즉 독일식 통일은 긴 시각으로 보면 비용보다 이득이 훨씬 컸다는 것입니다.

슈뢰더 수상에 의하면 가장 아쉬웠던 점은, 대외적인 문제 등 긴박한 상황에 대처해야 하는 상황에서 통일 초기에 과감한 구조개혁을 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슈뢰더 수상이 집권 후 어젠다 2010을 내세워 구조개혁을 실행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사민당이나 그 지지층인 노조의 반대를 무릅쓰면서, 즉 다음 선거에서 패배할 위험까지 안고서 추진하였다고 합니다. 주 내용은 노동시장의 유연성 확보와 연금 및 사회보장의 전면 개혁이었습니다. 그는 인기 없는 정책으로 비록 선거에서 졌지만 이런 과감한 구조개혁을 하였기 때문에 독일의 경제가 지금처럼 탄탄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는 위기에서 지도자가 당리당략에 빠지지 않고 국익을 염두에 두고 나라와 사회에 옳은 방향으로 정책을 추진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바로 정치지도자의 최대 덕목인 신념과 용기를 가리키는 사례라 하겠습니다. 

또한 독일의 경제가 강한 것은 제조업이 여전히 경제의 밑바탕이 되고 있으며 그 중심에는 몇 개의 대기업이 아니라 수많은 중소기업들이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독일의 중소기업은 우리처럼 대기업의 협력업체가 아니라 독자적인 기술력과 마케팅 능력으로 독립적으로 생존하는 강소 기업들이라 합니다. 또한 노동조합이 기업의 의사결정에 함께 참여하기 때문에 생산 판매 등 전반적 과정이  민주적으로 진행되며 그렇기 때문에 기업이 더욱 탄탄하게 운영되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의 대기업 중심 기업생태와 비교하여 많은 교훈을 주는 대목입니다. 중소기업이 주류를 이루는 이런 독일의 기업 생태를 저는 ‘기업의 민주주의’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나아가 진정한 경제민주화는 복지확대로 성취되는 게 아니라 중소기업이 경제의 중심에 설 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우리나라에 대한 깊은 시사점 때문에 제주포럼 이야기를 슈뢰더 수상을 비롯한 정치지도자 세션에 맞추게 되었지만 사실은 그 외에도 중요한 내용이 많았습니다. 홍석우 전 지경부장관이 진행한 다음카카오 이석우 공동대표와 리야(Lee Ya) 중국 봉황넷(Phoenix New Media) 회장과의 대담 또한 IT 산업분야의 미래를 진단하는 중요한 세션이었습니다. 그리고 종합포럼으로 불리는 제주포럼이 매년 다루는 동북아의 화해와 평화협력체제 구축 문제도 참가자들의 많은 관심을 모았습니다. 또 하나 새로운 것은, 이번 포럼에서 평화에 관한 토론 외에도 제주도와 월드컬처오픈(WCO)이 협업을 통해 ‘더불어 행복한 세계’를 만들어가기 위해 공동의 노력을 경주한다는 제주 문화비전 선포였습니다. 이는 제주를 세계적인 문화 허브로 꾸며 국가적으로 또 세계적으로 대중의 창의적인 문화활동을 장려하고 지원하겟다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습니다. 평화의 섬 제주를 문화의 섬 제주로 높여가자는 취지로 보였습니다. 문화융성, 문화의 세기 등 시대의 핵심 키워드에 비추어 매우 시의적절한 움직임으로 평가됩니다. 

그 외에 특기할 사항은 우리나라의 국제회의 운영 능력과 우리나라 사람들의 회의참여 역량입니다. 물론 우리 발표자나 참가자들의 수준도 높아졌지만 과거에 영어가 딸려 국제회의에서 의견을 적극 개진하지 못하던 시절과는 격세지감이 있을 정도로 의사진행이 원활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영어를 쓸 때는 써야 했지만 우리말만으로도 의사진행에 전혀 무리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각국(영어, 독일어, 스페인어, 중국어, 일어 등)의 말을 우리말로 또 우리말을 각국의 말로 통역할 수 있는 인적 자원이 크게 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겠습니다. 이제는 언어 때문에 자기 의견을 적극 개진하지 못했다는 말을 할 수가 없게끔 통역 서비스가 잘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원봉사자들을 포함한 통역, 회의진행 등 우리 젊은이들의 능력과 활약을 가늠해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였으며 이를 통해 앞으로 그들이 중심이 되는 우리의 미래를 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종합적으로 보면, 많은 지도자들이 우리나라를 찾는다는 것 자체가 우리나라가 매력적인 나라, 뭔가 배워올 수 있는 나라, 미래를 이끌고 갈 나라라는 인식이 커지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고 하겠습니다. 이런 포럼을 통해서 우리도 아시아를 넘어 세계 정치 외교 문화의 중심이 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딱딱한 정치 외교 경제 세션 외에도 제주포럼의 막간에서 만날 수 있는 우리의 문화, 예술 표현이 돋보였으며 이런 훌륭한 공연을 창조해내는 중견 예술가와 젊은층의 재능과 열정에 적이 놀랐습니다. 겉보기에 돈만 많이 쓰는 실속 없는 거대한 행사처럼 보이기도 하는 포럼에 이처럼 많은 내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적지 않은 교훈이었습니다. 제주포럼이 앞으로 다보스와 보아오에 뒤지지 않을 '내용 있는 알짜 포럼'으로 더욱 크게 발전할 것을 기대해봅니다. 

필자소개

정달호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후 줄곧 외교관으로 일했으며 주 파나마, 이집트대사를 역임했다. 은퇴 후 제주에 일자리를 얻는 바람에 절로 귀촌을 하게 되었고, 현재 제주평화연구원 객원연구위원으로 있으면서 한라산 자락에 텃밭과 꽃나무들을 가꾸며 자연의 품에서 생활의 즐거움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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