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마다 새로운 삶을 지휘하는 남자 | 금난새
손미나의 INTERVIEW | 지휘자 금난새
초록색 넥타이와 대님 바지, 감색 블레이저를 말끔하게 받쳐 입은 마른 체격의 신사가 육중한 문을 열고 들어왔다. 낯익은 얼굴, 지휘자 금난새 선생님이었다. 쉽게 흉내내지 못할 특유의 눈웃음이 그를 알아본 가장 결정적인 단서였다. 검정 연미복 차림으로 무대에 선 모습을 주로 보아온 터라 경쾌한 색상의 캐주얼한 옷차림을 한 '금난새'는 새로웠다. 더구나 웬만한 사람은 소화하기 힘들다는 초록색이 그토록 잘 어울리다니! 나의 예상을 깬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사진촬영을 번거로워하실까봐 고민 중이었는데 웬걸. 배경과 포즈 등을 적극적으로 제안하면서 오히려 사진기자 선배를 리드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능숙한 모델링을 하는 와중에 한숨 섞인 넋두리가 새어 나오고 말았다. "휴... 어떤 때는 이런 순간조차 휴식 같아요. 아니,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쉬겠나..." 하긴 '금난새'라는 인물을 설명하는 단어는 더 이상 '지휘자'에 국한되지 않을 만큼 바쁘게, 1인 다역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무려 6개의 오케스트라를 이끌며 연간 150회 이상 연주회를 이끄는 '국민 지휘자'. 서울과 지방을 오가며 장래의 예술가들을 가르치는 교장선생님. 그 어떤 지원도 받지 않고 오케스트라를 창단해 성공적으로 살림을 꾸려낸 사업가. 몸이 열개라도 부족할 것 같다면서 끝없이 샘솟는 열정으로 청년 멘티들을 위한 책을 써낸 저자. 그 바쁜 틈을 비집고 그를 인터뷰할 시간을 얻게된 건 분명 행운이었다.
- 안녕하세요. 선생님. 최근 근황부터 말씀해주세요.
"바빠요. 닥치는 일들을 다 해내려고 열심히 하고 있어요. 내가 일을 만들기도 했지만 지금은 일이 나를 덮친다고 할까요? 중국 영화 같은 거 보면, 한 사람이 다수에 대적하면서 척척 이겨내잖아요?(하하) 내가 지금 딱 그런 상황이에요. 많은 일들에 도전하고 있지요. 그중에서도 모교인 서울예고 교장직을 맡고 있는데, 이 일이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어요. 처음에는 너무 바빠 고사했었는데, 한 번 수락하고 나니 대충할 수가 있어야지요. 나는 무엇보다 '내가 이 젊은이들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을 것인가'를 늘 마음에 새깁니다. 그래서 교장실을 아이들을 위한 공간으로 바꿔버렸어요. 원래 교장실은 학생들이 생각하기에 혼나러 가는 곳이잖아요?(하하) 그런데 제 방은 명패, 깃발, 사장님 의자가 있는 무시무시한 곳이 아니라 그랜드 피아노가 있고 항상 문이 열려있죠. 지나가는 아이들은 언제든 들어와서 제게 자신의 연주를 들려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지요. 수시로 아무나 연주를 하게 해서 재능이 발견되거나 굳은 의지가 있으면 실전 무대에 설 수 있는 기회를 줍니다.(실제로 그날 인터뷰 현장에서도 그런식으로 교장선생님 눈에 우연히 발탁되어 함께 무대에 서게 된 한 여학생이 콘서트 준비 중이었다) 한마디로 이런 저런 일들로 아주 바쁘게 지내고 있네요.(하하)."
과연 한국 음악계의 돈키호테라고 불릴 만하다. 교장실에서 근엄함을 걷어내고 청소년들의 꿈이 무럭무럭 자랄 수 있는 자유분방함을 심다니.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고정관념을 깨는 진취적 성향이야말로 그의 정열적인 음악 인생을 이끌어 온 것이리라. 그의 삶은 언제나 결단과 도전의 연속이었다. 서울대 음대를 졸업하고 서울예고 선생님으로 취직했지만 그는 돌연 사표를 내고 베를린 음대 지휘과에 입학했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보장된 미래'를 보기 좋게 걷어찬 것이다. 그런 확신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이었을까?
"저한텐 오랜 꿈이 있었어요. 바로 지휘자가 되는 것이었죠. 마침 세계청소년음악연맹의 국제회의가 스톡홀름에서 열렸고, 교장 선생님을 대신해 참석했어요. 회의 일정이 끝나고는 이때구나 싶어 무작정 베를린으로 넘어갔죠. 가장 유명한 오케스트라인 베를린 필하모닉이 있는 곳으로! 그렇게 베를린 음대에 가서 라벤슈타인 교수를 찾아내 직접 이야기를 나눴죠. 그분을 만난 건 내 인생의 전환점이었어요. 이름도 모르는 동양의 어느 나라에서 온 나를 마치 친척 조카 대하듯 진심으로 걱정하고 격려해주었어요. 망설일 것 없이 베를린 음대에 바로 입학해야겠다고 결단을 내릴 수 있던 건 바로 그 때문이었어요. 라벤슈타인 교수의 학생을 대하는 태도와 눈빛, 그리고 관점. 당시 한국 음악계는 매우 경직되어 있었고 학교에서도 돈 있는 학생들한테는 잘 해주고, 돈 없는 학생들은 무시했거든요. 그런 것들에 저는 지쳐있었어요. 올바르지 못한 교육 태도에 대해서요. 그래서 '아! 나도 이런데서 배우고 싶다, 살고 싶다!'고 생각했던 거지요."
- 베를린 유학 생활은 어땠나요? 동양인으로서, 그것도 늦은 나이에 공부를 다시 시작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요.
"넉넉한 형편이 아니라 지휘 아르바이트도 틈틈이 하고, 밥값 아껴가며 공연 하나 보기도 하고 그런 생활을 했습니다. 힘들었지만 독일은 배움에 있어서만큼은 경제적인 압박이 없어서 좋았어요. 그래서 공부 자체는 힘들지 않았는데 다른 어려움이 있었지요. 제가 베를린 유학 중에 큰 형님이 돌아가신 거예요. 형은 모든 면에서 동생들한테 모범이 되는 장남이었어요. 재능이 특출 나 외국에서 순회 공연을 하기도 했고 의협심이 강해서 월남전에 자원해 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월남전에서 당한 부상으로 세상을 떠났어요. 그때 깨달았죠. 갑자기 덮쳐오는 책임감과 음악계에 대한 불만, 이 모든 것들이 무겁고 두렵지만 그래도 '나는 살아 있다'는 것. 내가 지금 처한 상황이 비록 사막처럼 불확실하지만 그래도 나는 여전히 살아있고, 끓어오르는 심장이 있다, 생명이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이요. 그래서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죠. 그 무렵인가? 하루는 베를린 올림픽 수영장에 간 적이 있어요. 많은 사람들이 햇볕 아래 누워서 일광욕을 하고 있는데, 저 멀리 한 사람이 서 있는 거예요. 근데 가까이 가서 보니까 글쎄 다리가 하나 없는 거예요. 낯모르는 남자가 오직 다리 하나로 서서 태양을 딱 올려다보고 있는데... 와 저거다 싶었어요. 그 자신감, 그리고 그런 사람을 이상하게 쳐다보지 않는 독일 사회의 관대함이랄까요. 저는 베를린에서 공부하면서 그런 삶의 에너지들을 배워온 거 같아요."
그렇다.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우리에겐 축복이다. 아무리 힘들고 고단해도 이 땅 위에 굳게 서있고 손가락 끝으로 뜨거운 에너지를 전달해 주는 심장이 있지 않은가. 그런데 요즘은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청춘들마저 무너지는 힘든 시기이다. 살아있음 자체로 빛나야 할 삶이 이유 같지 않은 이유로 무기력해지는 것이다. 돈 때문에, 주변의 시선 때문에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하는 소위 '삼포세대'에게 그는 말한다. '그냥 저질러보라'고.
"저는 결혼할 때 나와 아내, 딱 두 사람뿐이었어요. 아무도 없는 교회에서 단 둘이, 목사님 모시고 선언한 게 다예요. '돈'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못한다면 너무 슬프잖아요. 세상의 시선, 기준에 맞추지 마세요. 결혼의 최고 가치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다는 것' 그 자체예요. 저는 지금도 보세요, 반지도 없잖아요? 그때 금 한 돈짜리 반지 하나 했었나? 자세히 기억은 안 나는데(웃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고, 그 사람과 함께 하고 싶다면, 그냥 하세요. 살아 있을 때 행복해야지요. 남의 눈, 겉치레를 신경 쓰지 마세요. 그보다는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어떻게 살아야 행복할지에 대한 방향성을 잡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요?"
누구보다 행복한 인생에 대한 철학이 확고한 인간 금난새. 그러니 지휘자로서 갖고 있는 음악에 대한 주관과 철학은 두말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바로 그런 뚝심으로 세계에서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벤처 오케스트라를 만들었다. 음악계는 그 독립적인 오케스트라에 대해 모두 부정적이었지만 지금까지의 성과는 매우 고무적이다
"유로아시안 오케스트라는 제가 수원시향을 그만두면서 만든 벤처 오케스트라에요. 보통 오케스트라는 정부나 기관의 지원을 받아 운영되는데, 이 오케스트라는 그런 형식의 지원금 없이 독립적으로 운영됩니다. 안정적인 수익이 보장되지 않지만 우리가 직접 지원을 끌어오자는 게 유로아시안 오케스트라의 기본적인 방침이었죠. 정부나 기관으로부터 지원을 받는 오케스트라는 크게 발전하기 어렵습니다. 안정적인 수입원이 있으니 연주자들은 열심히 하지 않아도 되고, 그러다 보니 현실에 안주해 더 좋은 연주에 대한 열정은 식어버리고 말지요. 모든 연주자들이 개인적으로도 발전할 수 있으면서 동시에 시민들에게 더 좋은 연주를 들려줄 수 있는 방법은 직접 돈 벌기, 즉 스스로 자립하기라고 생각했어요. 우리는 다른 오케스트라가 가지 않았던 길을 간 거예요. 분명히 처음엔 리스크가 있었지만 경쟁력을 가질 수 있었고 차별화될 수 있었죠. 벌써 유로아시안 오케스트라가 만들어진 지 15년이 됐어요. 이건 우리가 아무에게도 의존하지 않고 오로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음악에 집중할 수 있다는 증거입니다. 올 9월엔 슬로바키아에 초청받아서 연주회도 합니다. 한국, 일본 등 아시아의 문화를 유럽의 그것과 접목하고자 하는 유로아시안 오케스트라의 첫 유럽 진출 무대가 될 거예요."
그는 유로아시안 오케스트라(현 뉴월드 오케스트라)의 성공 비결을 '끊임없는 에너지'로 꼽았다. 멤버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의 연주를 발전시키고자 하는 힘, 연주를 끝냈을 때 들려오는 박수 소리와 시민들의 뜨거운 호응, 이 모든 것들이 어우러져 거대한 오케스트라의 내일을 만들어 가는 에너지가 된다는 것이다.
- 선생님 말씀을 듣다보니 우리 사는 세상도 결국 오케스트라 같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에너제틱(energetic)하고도 조화롭게, 각자의 개성과 열정이 살아있으면서도 전체적인 하모니를 이루어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어내며 살아갈 수 있다면 이상적일 테니까요. 그래서 궁금한 것이 있는데요, 좋은 하모니를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이 가장 중요할까요?
"모든 연주자가 지휘자가 되는 것이죠. 돈을 벌기 위해서, 혹은 지휘봉에 따라 수동적으로 음악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혼신의 힘을 다해서 이 연주를 해내겠다고 하는 주인 의식이요. 내가 꼭 이 오케스트라에, 이 사회에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면서요. 그래서 저는 항상 연주자들에게 'You are the conductor(당신이 지휘자예요)!'라고 끊임없이 주문해요. 오케스트라가 뛰어난 음악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멤버 한 사람도 빠져서는 안 되는 것처럼 사회 구성원 모두가 이 사회를 구성하는데 꼭 필요한 사람이라는 걸 기억한다면 좋을 것 같아요."
'주인의식'을 힘주어 말하는 금난새 선생님의 표정이 사뭇 진지했다. 연주자에게 있어 그러한 주인 의식은 결국 음악적 생명력과 직결되는 문제일 것이다. 가느다란 흰 막대 끝에서 만들어 지는 것은 음악이라기 보다는 생명. 그렇게 열정적으로 생명을 불어 넣은 덕에 그의 오케스트라는 태평양을 건너 멀리 미국에서도 흥미로운 프로젝트를 이어가고 있다.
"예전에는 사람들이 '뉴욕'하면 음악을 배우러 가는 곳이라고만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제는 그곳을 우리가 정복하러 가야 할 때가 온 거죠. 태평양의 수많은 섬, 생명의 신비로움이 있는 남극을 조사하고 태극기를 꽂으러 가는 것처럼! 수세기 전 남미를 정복한 콜럼버스처럼! 우리 음악계를 알리고, 나의 꿈을 이루기 위한 거점을 만들고 싶어서 2012년부터 시작했어요. 아직은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조금 더 무르익으면 가치가 발휘되지 않을까요. 나는 이 뮤직 페스티벌이 곧 뉴욕 맨해튼을 대표하는 페스티벌이 될 거라고 믿어요. 문화와 비즈니스가 융합된 페스티벌을 지향하기 때문에 반기문 UN 총장님 등 유명 인사도 매년 오시면서 관심을 가져주시고, 많은 기업들도 후원을 해주고 있죠. 1년에 한 번씩 개최되는데, 올해는 5월에 16일부터 24일까지 열립니다. 아, 이 새로운 뮤직 페스티벌에 아리아나 허핑턴 회장을 초대하고 싶군요!(웃음)"
끊임없이 새로운 꿈을 꾸는 지휘자 금난새의 버킷리스트에는 아직도 얼마나 많은 일들이 남아 있을까. 그의 신간 <모든 가능성을 지휘하라>를 보면 그는 여전히 20대 청년 같다. 주체할 수 없이 넘쳐나는 에너지와 뜨거운 심장을 지닌 영원한 청춘 금난새는 인생의 후배들이 이 책을 통해 무엇을 얻기를 바라는 걸까.
"우선 젊은 사람들에게는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었어요. 패자부활전이라는 말도 있잖아요. 실패도 에너지가 될 수 있어요. 아니, 실패가 오히려 더 도약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하지요. 누구나 성공을 원하지만 성공은 그렇게 쉽게, 빨리 오지 않아요. 다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알고 그것을 향해 꾸준히 달려가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어요. 또, 리더들에게는 '뛰어난 사람'이 되기보다 '평범한 사람'이 되라고 말해주고 싶었죠. 교장이지만 학생들의 눈높이에서 세상을 보고, 지휘자이지만 연주자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 그것이 바로 제가 전하고 싶은 삶의 태도입니다."
인터뷰를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금난새 선생이 슬로바키아 라디오 심포니 오케스트라 상임지휘자가 됐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다. 지휘자, 교육자, 예술 총감독에 저자까지 다양한 이름을 가진 그. 어느 한 곳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한계를 뛰어 넘고 틀을 깨고 있으며 더 넓은 곳, 미지의 세계를 향해 전진하고 있는 지휘자 '금난새'에게 한국 음악계의 돈키호테라는 별명과 함께 세계 음악계의 콜럼버스라는 별명까지 추가되는 건 시간 문제인 듯하다.
손미나 허핑턴포스트 편집인
"from past to fu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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