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완종 전 회장의 경우 [임철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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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완종 전 회장의 경우

2015.04.15


법원의 구속영장 실질심사를 앞두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은 유서를 통해 희망한 대로 지난 13일 어머니 곁에 묻혔습니다.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8월 가난한 시골농가에서 태어나 시련과 역경을 딛고 대기업 경영자로 활동해온 분의 예기치 못한 종말입니다. 한창 꽃이 피는 이 계절에 그는 흙으로 돌아갔습니다. 

사망 전에 남긴 그의 메모로 세상이 발칵 뒤집힌 데다 언론의 취재로 새로운 사실이 속속 밝혀지고 있어 그 파장과 결말을 짐작하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그가 돈을 주었다고 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황당무계한 소설이라고 부인하고 있는데, 검찰이 수사에 나섰으니 결과를 지켜봐야 합니다. 이 검찰이 뭘 밝혀낼 수 있겠느냐고 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수사결과가 박근혜 정부에 심대한 타격이 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래 본들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이 되살아날 수 없고 억울함이 씻기지도 않을 터이니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가 목숨을 끊던 9일, 유서를 남기고 집을 나갔다는 뉴스를 보자마자 10여 차례 전화를 걸었습니다. 9시 넘어서인가 단 한 번 통화 중이라는 소리를 들은 것 외에 다른 반응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지(죽지) 말라고 녹음도 했지만 목소리는 끝내 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오후에 시신 발견 뉴스를 접하니 참 허망했습니다. 그는 다른 휴대폰(이른바 대포폰)을 2개 사용하고 있었다는데, 나는 엉뚱한 휴대폰에 전화를 걸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를 언제 어떻게 만났는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알고 지낸 지 벌써 15년은 넘은 것 같습니다. 나도 고향이 충청도여서 그가 창립한 충청포럼의 세미나나 회식에 수많은 운영위원 중 한 명으로 여러 번 참석했습니다. 정치부 기자 출신이 아닌 나는 그에게 그리 중요한 인물이 아니었겠지만 어쨌든 인간적으로 정을 주고 공을 들이는 성의는 충분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가 그렇게 비극적으로 세상을 떠난 뒤 만나는 사람마다 어쩔 수 없이 그의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나를 포함해 성 전 회장을 아는 사람들 대부분이 하는 말은 그가 가지 말아야 할 길을 갔다는 것입니다. 기업만 하지 뭐하러 정치판에 들어가 그 고생을 하고 망신과 모욕을 당한 끝에 결국은 목숨까지 잃게 됐느냐는 것이지요. 이런 말은 사실 생전에 면전에서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 사후에 이러쿵저러쿵하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지만 안타까움에서 다들 그렇게 말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남들이 그를 이해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하고 서울에 와 갖은 고생 끝에 성공한 사람의 생존방식이나 경영술은 남다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학맥도 없고 연고도 약한 사람이 기업을 운영하다 보니 다른 기업인들보다 더 권력과 정치의 힘과 필요를 느꼈을 법합니다. 그동안 그의 처지에서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지금은 그가 평소에 느꼈을 굴욕감이나 비애, 노심초사를 뒤늦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자살하던 날 집을 나와 걸어가는 모습을 CCTV로 보니 그 걸음이 땅에서 떠 있는 듯 몸이 텅 빈 것 같았고, 무엇엔가에 쫓기는 듯 불안해 보였습니다. 

그런데 기업을 하면서 권력과 정치의 힘을 절감하고 이에 기대거나 줄을 대야 할 필요성을 느끼는 사람이 어디 그분뿐이겠습니까? 우리나라는 아직 다른 걸 고려하지 않고, 정권의 교체와 변화를 눈치보지 않고 기업을 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정도 차가 있을 뿐 누구든 정치권의 주변이나 그 안에 들어 있어야 방해받거나 억울한 피해를 당하지 않고 온전하게 기업을 할 수 있습니다. 아니 그래야만 기업 보전 차원을 넘어 새로운 기회를 얻고 발전과 도약을 할 수 있습니다. 

성씨는 목숨을 끊기 전 경향신문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돈을 건넨 상대방의 이름을 거론할 때마다 ‘신뢰’를 언급했습니다. 그는 “어느 나라나 정치집단이라는 게 의리나 신뢰 속에서 정권을 창출하고 신뢰를 지키는 게 정도”라며 “우리나라도 그렇게 돼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습니다. 이런 말은 자신이 사정의 표적이 된 데다 구명 호소가 전혀 먹히지 않은 데 대한 배신감과 억울함의 표현일 것입니다. 더욱이 그는 "사정을 당할 사람이 사정하겠다고 소리를 지르고 있다"고 이완구 총리를 직접 겨냥했습니다. 검찰의 특별수사팀장이 "좌고우면하지 않고 수사하겠다"고 말했으니 과연 그렇게 할 수 있는지 주시하겠습니다. 

성씨는 “맑은 사회를 앞장서 만들어 달라”는 호소도 했습니다. 그와 똑같은 시각에서 하는 말은 아니지만 우리 사회가 맑아져야 하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기업과 기업인들이 정치권의 눈치를 보거나 줄을 대고 돈을 갖다 주지 않고도 정상적으로, 정직하게 활동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는 “나 하나가 희생이 됨으로 해서 다른 사람이 더 희생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말도 했습니다. 그의 죽음을 희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업과 정치의 불건전하고 비상식적인 접합이나 유착을 끊어야만 우리 사회는 더 발전할 수 있습니다. 목숨을 던진 그의 '최후진술'이 의미가 있게 하려면 금력과 권력을 함께 가지려 하거나 그렇게 해야만 생존할 수 있다고 믿는 풍토까지 바꿔야 합니다.  

필자소개

임철순

1974~2012년 한국일보 근무. 문화부장 사회부장 편집국장 주필 및 이사대우 논설고문을 역임했다. 
한국기자상, 삼성언론상, 위암 장지연상 수상. 
현재 이투데이 주필 겸 미래설계연구원장, 자유칼럼그룹 공동대표, 한국언론문화포럼 회장, 
한국1인가구연합 이사장.

박대문의 야생초사랑

미선나무 (물푸레나무과)  학명 Abeliophyllum distichum Nakai

보송보송 살결 고운 어린아이 피부처럼 미백색 고운 빛깔에 단아하고 향기로운 꽃! 맑고 고운 영혼이 머문 듯한 순백의 꽃 이파리에 소박한 듯 화사한 미선나무 꽃! 우리나라에서만 자라는 한국 특산식물입니다. 꽃은 개나리꽃처럼 생겼지만 미백색 또는 연분홍색의 꽃에 은은한 향이 뛰어납니다. 열매의 모양이 부채를 닮아 미선(尾扇)나무로 불립니다.

필자소개

박대문

환경부에서 공직생활을 하는 동안 과장, 국장, 청와대 환경비서관을 역임했다.
우리꽃 자생지 탐사와 사진 촬영을 취미로 삼고 있으며,
시집 『꽃벌판 저 너머로』, 『꽃 사진 한 장』, 『꽃 따라 구름 따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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