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나라 큰 인물의 긴 그림자 [방석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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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나라 큰 인물의 긴 그림자

2015.03.31


‘싱가포르 건국의 아버지’로 불려 온 리콴유(李光耀·91) 전 총리가 지난 23일 타계했습니다. 이날 오전 그의 아들이기도 한 리셴룽(李顯龍·63) 총리는 싱가포르의 공용어인 영어와 말레이시아어, 중국어로 번갈아 ‘리 셴성(李 先生·아버지 리콴유를 지칭)’을 떠나보내는 추모의 글을 읽었습니다.

고인의 빈소가 차려진 싱가포르 국회의사당에는 매일 수천m에 이르는 조문 행렬이 이어졌습니다. 29일 영결식장으로 향하는 길은 비를 무릅쓰고 나온 인파로 덮였습니다. 장례식에는 박근혜 대통령과 일본의 아베 총리를 비롯해 호주, 인도,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베트남, 태국, 미얀마, 캄보디아, 브루나이, 라오스 등 아시아 각국 지도자들이 대거 참석했습니다. 미국도 빌 클린턴 전 대통령과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 등 대표단을 파견했습니다. 장례식에 참석한 면면을 보면서 고인이 세상에 남긴 큰 발자국을 짐작하게 됩니다.

‘싱가포르’ 하면 절로 떠오르는 이름이 리콴유입니다. 그를 떼어놓고 싱가포르를 생각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생시 국민들은 그를 파파(papa)라고 불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고인을 “매우 강하고 엄격한 아버지와 같았다”고 추억합니다. 더불어 생각나는 것도 있습니다. 국민 1인당 GDP 5만 달러가 넘는 부자나라에 남아 있는 전근대적 형벌 태형(笞刑)입니다. 싱가포르 법원은 지난해 11월 지하철에 스프레이로 낙서한 외국인 청년들에게 징역과 함께 태형을 선고했습니다. 1994년에는 미국 정부의 선처 요청에도 불구하고 공공기물을 파손한 미국 10대에게 태형을 가해 국제적인 시비가 일기도 했습니다.

싱가포르는 사실 동남아시아의 덩치 큰 나라들 틈에 끼어 있는 작은 도시에 불과합니다. 독립 초기 말레이시아연방에서 쫓겨났던 나라였습니다. 리콴유는 그런 싱가포르를 아시아 물류와 금융의 중심지로 만들었습니다. 식민 지배를 받던 작은 섬나라를 세계 일류 서비스산업 국가로 우뚝 세운 것입니다.

중국 이민자의 아들인 리콴유는 2차대전 중 일본군의 주민 집단 학살에도 불구하고 우선 생존을 위해 일본어를 배우고 일본군 정보부에 취직했던 현실주의자였습니다. 런던 유학을 마치고 변호사로 활동하던 그는 1954년 실용주의 정당 '인민행동당'을 만들어 영국에서 독립한 1959년 총선에서 승리, 서른여섯 살에 싱가포르 첫 총리가 됐습니다. 

싱가포르 국민은 약 75%가 중국계, 13%가 말레이계, 나머지 12%는 인도계 등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리콴유는 자신의 혈통이자 국민 대다수인 중국계에 기울어지지 않고 식민 통치국의 영어를 과감히 제1 공용어로 선택, 종족 간 갈등을 줄이고 국가경쟁력을 강화하는 결단을 내렸습니다. 콩알만 한 나라의 생존과 발전을 위해 싱가포르에 투자하는 외국 기업에 최고의 서비스와 편의를 제공했습니다. 이런 개방 노력으로 세계 굴지의 기업과 금융기관들이 속속 싱가포르로 몰려들었습니다. 그가 취한 청렴하고 효율적인 정부, 엄격한 법치와 사회질서, 기업 친화적인 경제 정책의 결과가 바로 오늘의 싱가포르입니다. 

싱가포르의 1인당 GDP는 리콴유의 총리 재직 31년 사이 미화 428달러(약 47만 원, 1960년)에서 12,766달러(약 1,400만 원, 1990년)로 30배 가까이 뛰어올랐습니다. 총리직에서 물러난 후에는 1990년 2대 고촉통(吳作棟, 74) 총리의 선임장관으로, 2004년 현 3대 리셴룽 총리의 고문장관으로 정부를 뒷받침했습니다. 타계할 때까지 50여 년간 사실상 싱가포르를 이끌고 지켜온 셈입니다. 리콴유의 싱가포르 건국 역사를 들여다보면 “그때 그 인물이 아니었어도” 라는 가정은 참 무책임하고도 허풍스러운 상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나라와의 인연도 남다릅니다. 총리 재임 시 세 차례, 퇴임 후 세 차례 한국을 찾았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해 이후 역대 대통령들과 모두 만나 생각을 나누고 조언을 주고받았습니다. 그는 특히 ‘노사 협력’ ‘투명 경영’ ‘국민적 신뢰 회복’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그런 바탕 위에서만 더 큰 발전을 이룰 수 있다고 조언하기도 했습니다. 1978년에는 덩샤오핑(鄧小平)과도 회담, 중국의 개혁·개방, 그리고 오늘날의 눈부신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어쩌면 이들은 이렇게 국가 경영에 대한 고민과 생각을 주고받으며, 또 경쟁하며 알게 모르게 서로에게 영향을 주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싱가포르가 이룬 오늘날의 번영에도 불구하고 리콴유의 철권통치와 아들의 권력 승계에 대한 서방 언론의 비판은 신랄합니다. 뉴욕타임스는 “정치 지도자의 업적을 경제적 성취만으로 평가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런 비판은 열강의 식민 지배와 침탈에서 세계가 놀랄 만큼 눈부신 고속성장을 보인 싱가포르, 한국, 중국에 공통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리콴유는 생전에 “국민이 원하는 게 뭔지 물어봐라. 표현의 자유? 아니다. 집, 의료품, 직업, 학교다”라고 말했습니다. 나라마다 처한 특수한 환경과 여건을 모르는 비판의 부당성을 지적한 것 같습니다. 같은 출발점에서 서 있었으나 아직까지도 빈곤과 사회혼란 속에서 헤매고 있는 나라들을 돌아보면 그의 지적에 어느 정도 공감하게 됩니다. 

1990년대 홍콩, 대만과 함께 ‘아시아의 네 마리 용(龍)’으로 경쟁하던 나라들 가운데 우리는 아직도 1인당 GDP 3만 달러의 벽을 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싱가포르는 56,284달러(약 6,200만 원, 2014년 기준)로 미국을 능가하는 알부자가 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콴유가 이룬 강소국 싱가포르의 장래가 밝다고만 말할 수는 없습니다.

고속성장에 숙명적으로 뒤따르는 부의 불균형, 빈부 격차의 해소가 싱가포르에서도 지난한 과제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지난해 빈부 격차를 나타내는 지니계수가 0.464를 기록,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평균(2011년 기준 0.32, 한국은 0.31)보다 훨씬 나쁜 상황에 있습니다. 인구의 약 10%는 최저생계비에 못 미치는 수입으로 생활한다고 합니다. 전체 인구 546만 명 가운데 150만 명에 달하는 해외 유입 인구, 저출산과 노동력 부족 문제도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주목거리들입니다. 

리셴룽 총리는 케임브리지대를 우등으로 졸업하고 하버드대에서 석사 학위를 받은 수재입니다. 그러나 실력과는 상관없이 대를 이은 집권에는 적잖은 저항감이 느껴집니다. 그의 부인은 국영 투자회사인 테마섹 홀딩스의 최고경영자입니다. 막내동생은 창이 국제공항을 운영하는 싱가포르 민항항공청(CAAS) 의장입니다. 리콴유가 떠난 싱가포르에서 한 가족의 정·재계 고위직 독점에 반발이 없으리라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이제 싱가포르에서는 위인의 위업을 이어나가는 것 못지않게 그가 남긴 긴 그림자를 걷어내는 일이 중요해 보입니다. 또 불협화음의 도가니 속 우리의 내일은 어떠해야 하는지, 한때 치열한 성장 경쟁의 라이벌이던 싱가포르의 앞날을 지켜보며 무엇을 취하고 무엇을 버려야 할지, 곰곰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필자소개

방석순

스포츠서울 편집국 부국장, 경영기획실장, 2002월드컵조직위원회 홍보실장 역임. 올림픽, 월드컵축구 등 국제경기 현장 취재. 스포츠와 미디어, 체육청소년 문제가 주관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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