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운서인 듯, 아나운서 같은, 아나운서 아닌 그들 [박상도]

 

www.freecolumn.co.kr

아나운서인 듯, 아나운서 같은, 아나운서 아닌 그들

2015.03.25


“형, 혹시 시간 있어요? 잠깐 상담 좀 하고 싶어요.” 

“무슨 일이니?” 

“만나서 말씀드릴게요.” 

“그래, 언제든 와라.” 

2005년으로 기억합니다. 당시 YTN에서 앵커로 뉴스진행을 하던 전현무를 목동 SBS 로비에서 만났습니다. 대학교 방송반 후배로 꽤 붙임성이 좋았던 그 친구는 학창시절, 방송제의 명 사회자로 꽤 인기가 있었습니다. 게다가 공부도 무척 잘했던 친구여서 YTN에서 뉴스를 진행하는 모습이 잘 어울렸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형, 나 아나운서 시험 보려고요.” 

“엥? 너 지금 뉴스 잘하고 있잖아? 무슨 시험을 또 보려고?” 

“형, 나 예능 프로그램하고 싶어요.” 

“네가? 허 허 …” 

전현무가 사랑스러운 후배이긴 하나 공(公)과 사(私)는 구분해야 하는지라 당시 필자는 객관적인 관점에서 그 친구에게 조언을 해주었습니다. 

“현무야, 내가 에둘러서 말해줄까? 아니면 직설적으로 조언을 해줄까?” 

“형, 그냥 직설적으로 말해 주세요.” 

“너 얼굴이 너무 커. 물론 나도 얼굴이 크지만 내가 아나운서 될 때는 얼굴크기에 대해 관대했거든…” 

“그리고요 또 뭐가 있죠?” 

“너 키가 몇이니?” 

“제가 좀 작죠?” 

“아나운서를 외모만 보고 선발하지 않지만, 남·녀 각각 한 명만 뽑는다면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 아니겠니?” 

“그렇긴 하죠. 그래도 전 정말 아나운서가 되고 싶어요.” 

“그러면 네가 너의 부족한 부분, 사실 나도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아나운서 선발에 외모를 보는 것이 현실이거든, 그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너만의 매력을 보여주는데 반드시 성공해야 돼.” 

하지만 아나운서 시험을 치르면서 짧은 테스트 시간에 자신의 숨은 재능을 다 보여준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SBS에서 고배를 마신 그 친구는 KBS에서는 자신의 능력을 잘 보여주었나 봅니다. 지금은 TV를 켜면 여기저기서 전현무를 볼 수 있을 정도로 인기가 하늘을 찌르고 있지만 그가 아나운서가 되기까지는 쉽지 않은 과정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자신의 콤플렉스를 극복한 용기있는 도전정신이 있었습니다. 

그런 사정을 잘 알기에 KBS에서 발군의 능력을 보여주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마음속으로 응원의 박수를 보내곤 했습니다. 예능 프로그램에서 개그맨 못지않은 재치와 순발력을 보여주고 안티 팬들의 야유에도 꿋꿋하게 자신의 길을 걷는 모습이 대견하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프리선언을 한 이후부터는 경계의 대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프리를 선언한 아나운서들을 바라보는 동료 아나운서들의 속마음엔 개운하지 않은 무엇인가가 남아 있습니다. 인기 아나운서가 되기까지 수많은 기회를 선점해야 하고 인기를 얻기 시작하면서 바빠진 그들을 위해 그들이 조직 속에서 당연히 해줘야 하는 힘든 업무들 즉, 주말 근무라든지 심야, 새벽 근무를 동료 아나운서들이 대신 해줘야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본인은 자신이 잘나서 인기를 얻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누군가 다른 사람의 것이 되었을 수도 있는 기회를 본인이 운 좋게 잡은 결과 인기를 얻게 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방송을 통해 인기를 얻은 것을 밑천으로 프리랜서 방송인이 되어 자본시장에서 제대로 평가받겠다는 것을 비난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두 가지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고 싶습니다. 하나는 프리랜서 아나운서라는 호칭입니다. 최근에 방송사에 입사한 지 10년도 채 되지 않은 젊은 아나운서들이 프리를 선언하고 공중파 방송사를 떠나 종편과 케이블에서 방송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을 계속 아나운서라고 부르고 있는데,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들은 전(前) 아나운서들입니다. 한국 아나운서 연합회에서 규정하는 아나운서는 KBS, SBS, MBC, EBS, CBS, 극동방송, 평화방송, OBS, 교통방송에서 근무하는 현직 아나운서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아나운서라는 옷을 벗고 자신의 이름만으로 방송시장에 자유롭게 경쟁하기 위해 퇴사를 한 사람들입니다. 아울러 그들은 아나운서들이 할 수 없는 영역, 광고나 상업적 행사의 사회를 통해 금전적 이득을 취하고 있습니다. 아나운서는 방송사 소속으로 방송의 품위를 위해 공익적 목적이 아닌 행사의 사회를 보며 금전적 이득을 보는 것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아나운서 출신 프리랜서 방송인을 아나운서로 부르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물론, 전현무처럼 아나운서라는 호칭이 오히려 어색할 정도로 연예인화 되어버린 특별한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아나운서 출신 프리랜서 방송인은 아나운서인 듯, 아나운서 아닌, 아나운서 같은 방송을 하고 있습니다. 최근 몇 년 동안 프리를 선언하고 공중파 방송사를 떠난 아나운서들이 꽤 많은데, 자본의 논리가 직업적 자부심을 앞서는 경우인 것 같아서 가슴이 아픕니다. 알려지지 않은 얘기입니다만, 몇 해 전, 공영방송의 아나운서들이 매니저까지 고용해서 행사 사회를 봐주다가 중징계를 받게 되는 상황이 생기자 프리랜서를 선언한 일이 있었습니다. 애초에 프리랜서로 전향하려고 했던 차에 일이 터지자 결정을 빨리 내렸다는 얘기도 있습니다만 어쨌든 그들에게 전통적인 아나운서의 직업윤리 의식이 부족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또 하나는 프리랜서 아나운서라고 불리는 그들이 엄밀하게 따지면 프리랜서가 아닌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최근 프리를 선언한 젊은 아나운서들 대부분은 기획사에 소속되어 방송활동을 합니다. 간단명료하게 얘기를 하자면 회사를 옮긴 것이지 프리랜서가 된 것은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그들이 방송사를 그만둔 이유는 기획사로 둥지를 옮기는 것이 자신에게 유리하기 때문입니다. 프리를 선언하는 아나운서들 대부분은 예능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사람들입니다. 예능프로그램의 최근 추세는 연예인의 집단출연입니다. MC의 역할보다는 게스트의 감칠맛 나는 연기가 더욱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능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아나운서들은 연예기획사로 회사를 옮겨 방송을 하는 것이 오히려 더 이익일 수 있습니다. 당연히 금전적인 보상도 월급을 받던 시절과는 비교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면 연예기획사에 소속된 전직 아나운서는 아나운서일까요? 연예인일까요? 

전직 아나운서뿐만 아니라 연예 기획사에 소속되어 아나운서처럼 방송을 하는 사람들 중에는 아나운서인 적이 없었던 사람들도 존재합니다. 최근에 갑자기 주목 받고 있는 스포츠 아나운서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최희, 공서영 씨는 아나운서가 아닙니다. 엄밀하게 따지면 이분들은 아나운서였던 적도 없습니다. 물론 아나운서의 개념을 방송을 진행하는 사람들이라고 정의 내린다면 광의의 개념에서는 그렇게 부를 수도 있을 겁니다만 그렇게 되면 유재석 씨도 강호동 씨도 아나운서라고 불러야 맞습니다. 필자가 이렇게 단호하게 주장하는 이유는 아나운서인 듯하나 아나운서 아닌 그들이 아나운서라는 직업을 지나치게 상업적이고 오락적으로 비치게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아나운서는 근엄한 직업이 아니라 대중에게 봉사하는 서비스 직종입니다. 하지만 아나운서들은 최선의 봉사는 대중에게 예의를 지키는 것에서 시작한다고 배웁니다. 그런데 최근 스포츠 아나운서라고 불리는 분들은 그러한 교육을 받은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필자는 방송사 아나운서로 20년이 넘게 근무를 하면서 다양한 신입 아나운서들을 보아왔습니다. 그 중 기억에 남는 후배 한 명이 있습니다. 입사 후 예능프로그램에만 집착하던 친구였는데 얼마 안 가서 퇴사를 하고 프리랜서로 방송활동을 하기 시작했으나 크게 인기를 얻지 못하고 다른 일을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러던 그가 요즘 종편 방송에 또 얼굴을 내밀고 있습니다. 종종 아나운서라는 직업을 목표가 아닌 수단으로 여기는 후배들을 보게 되는데, 이 직업을 천직으로 생각하는 필자는 이때마다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직업 선택의 자유, 양심의 자유는 헌법에 보장된 권리이긴 하지만 내게는 그 자체가 목표인 소중한 직업이 누구에게는 또 다른 목표로 가는 징검다리가 되는 모습을 보며 갑자기 화가 나고 우울해지는 것입니다. 

혹시, 김동건 아나운서는 프리랜서 아닌가요? 라고 반문하는 분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프리랜서라고 다 똑같지 않습니다. 김동건 아나운서는 거의 정년이 다 되어 프리랜서 아나운서로 나섰습니다. 프리랜서가 된 이후에도 아나운서들의 대선배로서 방송 3사의 신입 아나운서가 입사를 하면 꼭 후배들과 저녁을 함께하며 격려를 해 주셨습니다. 최근에도 필자에게 이번에 SBS에 새로 입사한 신입 아나운서와 저녁을 함께하자고 연락을 하셨습니다. 방송사 아나운서들이 퇴직을 하면 아나운서클럽에 가입할 수가 있습니다. 아나운서클럽은 퇴직 아나운서들의 모임입니다. 김동건 아나운서는 올해 초까지 아나운서클럽의 회장으로서 아나운서의 위상을 높이는 데 큰 기여를 하신 분입니다. 

프리랜서가 되고 나서 아나운서라는 호칭을 계속 쓰고 싶다면 김동건 아나운서만큼은 아니더라도 아나운서로서 직업적 자부심과 소속감을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나운서 클럽은 퇴직 아나운서라면 소정의 회비를 납부하면 가입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젊은 나이에 연예기획사에 소속되어 상업적 방송을 하는 아나운서 출신 방송인들이 아나운서 클럽의 회원이 되길 바랄지는 미지수입니다. 

오래전에 서태지와 아이들이 짧은 가수활동을 마치고 꽤 성대하게 은퇴식을 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은퇴식을 한 성균관대학교의 유림회관 일대는 취재열기로 주변 도로가 온통 마비될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요란한 은퇴식을 바라본 원로 연예인이 “연예계 활동 몇 년하고 무슨 은퇴라는 말을 하냐? 조퇴지.”라고 비꼬았던 기억이 납니다. 아나운서로 방송 몇 년 하고 나서 은퇴도 아닌 조퇴를 하고 아나운서라는 호칭을 계속 쓰는 것에 필자는 찬성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나운서는 자격증 시험을 통해 얻게 되는 신분이 아닙니다. 모든 직업이 마찬가지겠지만 아나운서 역시 끊임없이 공부하고 노력해야 하는 직업이고 그 과정 속에는 동료와 선후배간의 직업적, 인간적 유대가 있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명품 조연으로 TV드라마와 영화에서 두루 사랑받고 있는 배우 최일화 씨가 대학로에서 ‘혜화’라는 극단을 운영하며 자신이 번 돈을 무명 연극인들에게 쓰는 이유를 묻자 “운이 좋아서 기회가 닿은 거고 다른 배우들의 기회를 빼앗아 올라온 거나 마찬가지이다. 그 사람들을 밟고 일어선 거니 그들에게 되돌려줘야 하는 게 당연하다.”라고 대답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의 방송환경은 자본의 논리가 공공재인 방송의 영역에까지 깊숙이 침투해 있습니다. 거대 연예 기획사는 방송사 프로그램의 캐스팅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 지 이미 오래됐습니다. 인기를 얻으면 프리랜서 선언을 하고 기획사로 옮겨가는 젊은 아나운서들에게 의리 없다고 비난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아나운서’라는 호칭은 내려놓고 가 주기를 부탁합니다.  

필자소개

박상도

SBS 아나운서. 보성고ㆍ 연세대 사회학과 졸. 미 샌프란시스코주립대 언론정보학과 대학원 졸. 
현재 SBS TV 토요일 아침 '모닝와이드' 담당.

박대문의 야생초사랑

주목 (주목과) Taxus cuspidata

흔히 주목을 두고 살아 천 년, 죽어 천 년이라 말합니다. 보잘것없는 작은 씨앗이 발아하여 천 년의 긴 세월을 생명체로 지내다가 죽어서도 단단한 목질 덕분에 썩지 않고 천 년을 견딘다고 하는 나무입니다. 봄이 시작되자마자 일찌감치 주목이 꽃을 피웠습니다. 그토록 장수하는 주목(朱木)이 꽃을 피웠습니다만, 누구의 주목(注目)도 받지 못한 채 있는 둥 마는 둥 시들고 맙니다.

필자소개

박대문

환경부에서 공직생활을 하는 동안 과장, 국장, 청와대 환경비서관을 역임했다.
우리꽃 자생지 탐사와 사진 촬영을 취미로 삼고 있으며,
시집 『꽃벌판 저 너머로』, 『꽃 사진 한 장』, 『꽃 따라 구름 따라』가 있다.

Copyright ⓒ 2006 자유칼럼그룹.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freecolumn.co.kr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