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족과 외계인 [신아연]

www.freecolumn.co.kr

조선족과 외계인

2015.03.24


제가 초등학교 2학년 때 우리 가족들은 대구에서 서울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무기 징역을 살고 있는 아버지로 인해 빈한막심한 도시 빈민과 다름없는 ‘유랑 상경’이었습니다. 4남매를 먹이고 입히고 공부시켜야 하는 어머니의 노심초사 못지않게, 학교 생활의 부적응에서 오는 어린 저의 애로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가장 힘들었던 점은 무엇보다 서울 아이들 틈바구니에서 무단히 튀어나오는 ‘경상도 사투리’였습니다.

서울말씨는 뭘 물을 때 무조건 끝을 ‘니?’ 자로 한다는 정도는 아홉 살 저도 알고 있었습니다. 상냥하고 싹싹한 끝말에만 신경을 바싹 쓰던 어떤 경상도 아주머니가 정육점에서 “돼지고기 계세요?” 라고 했다는 일화도 있지만 저 역시 그 무렵의  웃지못할 기억이 있습니다. 

전학 온 지 며칠 안 된 어느 날, “지금 엄악 시간이니’?”라고 했다가 급우들로부터 놀림을 당했던 일입니다. 그때 저는 ‘'니' 자로 물었잖아? 근데 뭐가 잘못된 거지?’ 라는 어리둥절함 속에 ‘음악’을 ‘엄악’으로 잘못 발음해서 웃음거리가 된 것을 미처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그 일이 소위 ‘트라우마’로 남아 지금도 ‘ㅡ’ 와 ‘ㅓ’를 구분해서 발음하지 못하는 경상도 사람들을 보면 좌중과 함께 웃긴 해도 남다른 ‘연민’을 느낍니다. 당사자조차도 그만한 일로 무슨 ‘연민씩이나’ 할 테지만 저로선 그때 기억 때문에 그렇습니다.    

호주에서 21년 동안 살다가 한국에 다시 돌아온 지 햇수로 2년째, 내 ‘아홉 살 인생’이 불현듯 떠오르는 요즘입니다. 그때는 그런 말이 없었지만 ‘왕따의 추억’ 같은 것 말입니다. 

처음에는 어리바리한 나를 일단의 무리들이 ‘조선족’이라는 별명으로 부르더니, 그 후 “조선족 함부로 부르지 마라, 너는 한번이라도 ‘조선족스러운’ 적이 있었던 사람이냐”는 투로 비아냥거리는 치들이 생겼습니다. “어따 대고 어리바리, 조선족이 얼마나 독하고 무서운 사람들인데 네가 감히...”하면서 재리에 유난히 밝은 조선족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는 것이 제가 '조선족이 될 수 없는' 새로운 이유였습니다. 

그럼에도 ‘조선족’은 동포라는 위안이라도 되더니 급기야 최근에는 ‘외계인 같다’는 소리를 듣기에 이르렀습니다. 저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그러다 보니 황당하고 어이없고, 이상해서 밉기조차 한 모양입니다. 제 쪽에서 볼작시면 '한국 사회 적응 실패'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조선족에서 외계인이라니... 점입가경도 유만부동이지, 믿거나 말거나 ‘차도녀(차가운 도시의 여자, 쿨한 여자)’ 소리를 누군가로부터 들어본 경험이 무색하게스리.   

저를 싫어하고 미워하는 사람이 어찌 그 사람 하나뿐이겠습니까만, 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서 그치질 않고 기어이 미워하게 된다면 그것은 매우 위험한 사고이자 만약 그가 나보다 열세에 있다고 느낀다면 피해의식이 시작되는 순간입니다. 하긴 상대를 불편해 하거나 미워한다는 자체가 그에게 감정적으로 예속된 상태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이미 수동적이며 열등한 위치에 스스로를 두는 것이지만요. 

인연이 어긋나고 관계의 파국을 맞게 되는 모든 단초가 ‘오해’에서 비롯되기 마련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상대를 미워하거나 증오할 것까지는 없지 않을까요. 서로가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는 관계란 사실상 없습니다. '소통'이란 게 그렇게 쉽게 이뤄질 성질의 것이라면 구호처럼 매번 외칠 필요도 없을 테니까요. 

그럼에도 호주라는 이질 문화권에서 살다 온 사실에 대해 한 치의 배려도 없이 원체 이상하게 생겨 먹은 외계 생물 취급을 당하는 것이 저를 고통스럽게 합니다. 시드니에서 서울로, 그것도 모국이라고 찾아온 ‘중년 아지매’의 초라한 자의식이 그때 그 시절 남루했던 대구 꼬마의 촌스러움과 오버랩 되어 지난 상처를 자극하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이런 저를 심히 딱하게 여긴 지인이, 오랜 이민 생활로 인해 한국 사회 적응이 서툴러 그렇다며, 아프리카에 살다가 북극에 왔다면 당연히 옷을 껴입어야 하지 않겠냐는 비유를 들었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팬티 바람’으로 돌아다닌다면 온전히 살아내기가 어렵지 않겠냐고 덧붙이면서. 그 지인이 비유를 들기 전까지 제가 ‘팬티 바람’이라는 의식도 실상 없었는데 말입니다. 

‘다르면서’ 고분고분하지도 않으면, 그때부터는 ‘틀린 것’으로 ‘찍히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사는 것이 고달파집니다. 제 한국 생활이 점점 고달파지고 있습니다. 더 이상 아홉 살 꼬마는 아니지만 우울한 일입니다.

필자소개

신아연

이화여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1992년 7월, 호주로 떠났다. 시드니에서 호주동아일보 기자, 호주한국일보 편집국 부국장으로 일하다 2013년 8월, 한국으로 돌아와 자유기고가, 강연자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는 중앙일보, 여성중앙, 과학과 기술 등에 에세이를 연재하며, KBS 라디오에 출연 중이다.    
낸 책으로 <심심한 천국 재밌는 지옥> <아버지는 판사 아들은 주방보조>, 공저 <자식으로 산다는 것>이 있고, 2013년 봄에 <글 쓰는 여자, 밥 짓는 여자>를 출간했다. 
블로그http://blog.naver.com/shinayoun

Copyright ⓒ 2006 자유칼럼그룹.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freecolumn.co.kr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