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셔먼' 발언 논란, "기자들이 틀렸다"

셔먼 美 국무부 차관 27일 카네기 재단 연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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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싸움은 말리고 흥정은 붙이라는 말이 있지만 잘못 휘말리면 낭패보기 십상이다. 마치 결판이라도 낼 듯 격렬하게 맞붙은 싸움판이라면 더욱 그렇다. 셔먼 미 국무차관이 딱 이 경우다. 


한일 두나라가 양보 없이 대립하고 있는 데 중재하겠다고 나섰다가 봉변을 당한 셈이다. 옆에서 지켜보기에 참 딱한 일이다. 그녀의 개입 동기가 세간의 오해와는 달리 악의 보다는 선의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여 지기에 더욱 안타까움을 느끼게 한다.


셔먼 차관의 이른바 과거사 발언은 미국 정부가 그동안 보여온 스탠스와는 좀 차이가 있다. 발언 내용이 아니라 접근 방식이 다르다.


미국 정부는 역사 문제 관련 한일간 갈등에는 관여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견지해왔다. 한일이 미국의 우방국이지만 서로의 입장을 중재하지도 않는다는 것이 기본 정책이다. 공개 중재를 거부하는 정책은 하루 이틀 된 것이 아니다. 50여 년 전 한일협정 회담 당시부터 확립된 원칙이다. 


60년대 초 이케다 일본 수상을 만난 케네디 대통령도 면담록의 결론으로 ‘공개 중재 금지’를 지시하고 있음을 최근 발굴된 외교문서는 보여주고 있다. 미국의 공개 언급 한마디가 자칫 잘못하면 한쪽 편들기로 받아들여져 국민감정 격화로 이어지기 십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일관계를 다루는 미국의 정책은 물밑 압박을 중시하는 정책으로 정립된 것이다.


셔먼 차관은 이런 미국의 전통적인 접근방법을 탈피해서 약간의 변화를 시도했다. ‘과거를 정리하고 미래로 나가자’는 과거의 일반론적 권유에서 한걸음 더 나갔다. 과거를 정리하지 못하는 데 대한 비판을 공개적으로 가미했다. 물밑에서 비공개로 이뤄졌던 관련국 지도자와 외교당국에 대한 압박의 일단을 공개하고 나선 것이다.


한국의 반응은 역시 화끈했다. 감정적 대응이 요동쳤다. 순식간에 감성이 요동쳤고 이성은 힘을 잃었다. 중국은 직접적 반응을 삼갔다. 일본은 아예 침묵했다. 그런데 이런 반응의 차이가 실제 발언 내용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발언에 대한 해석 때문에 나온 것은 놀라운 일이다.


셔먼 차관 발언이 국민감정을 격동시킨 것은 ‘과거를 덮자’고 했다는 일부 언론의 보도 때문이다. 일본이 잘못하고 있는 데 이를 문제 삼지 말고 넘어가자는 발언을 했다는 데 흥분하지 않을 한국 국민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셔먼 차관은 ‘과거를 덮고 가자’는 발언을 하지 않았다. 기사를 그렇게 쓴 기자들의 해석일 뿐이다. 가장 비슷한 대목은 ‘To move ahead, we have to see beyond what was to envision what might be’인데 이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과거의 것 이상을 봐야 한다’고 해석하는 것이 더 적합할 것이다. 평소에도 공개적으로 해오던 말이다.


문제가 된 또 다른 대목도 냉정한 해석과는 차이가 있다. 원문은 이렇다. ‘Of course, nationalist feelings can still be exploited, and it’s not hard for a political leader anywhere to earn cheap applause by vilifying a former enemy’인데 ‘민족주의적 감정이 악용될 수 있고 어느 정치 지도자도 과거의 적을 비난함으로써 값싼 박수를 어렵지 않게 받을 수 있다’는 대목을 한국과 중국 지도자만을 겨냥했다고 해석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극우 민족주의 감정을 이용해서 가장 큰 정치적 이득을 보는 대표적 정치인이 아베 일본 총리와 하시모토 오사카 시장 등이라는 것은 상식이다. 이 대목을 한국과 중국 지도자를 지칭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자학 행위이다. 스스로 자학하는 해석을 하는 것은 오히려 일본을 이롭게 하는 것일 뿐이다. 중국 정부나 중국 언론이 이 대목에 대해 우리처럼 반발하지 않는 것은 그렇게 해석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그렇게 볼 필요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셔먼 차관 발언은 감정을 가라앉히고 냉정을 갖고 접근하면 생각해볼 대목이 많은 명문들도 담고 있다. 밖으로 알려진 그녀에 대한 평판대로 균형 감각을 유지하면서 나름대로 해결방안을 제시하려는 진정성도 담겨져 있다.


흥분을 삭이고 전문을 읽어본다면 그녀가 결코 일본 편을 들려고 하는 게 아니라는 점도 알 수 있다. 이란 핵문제에 매달려 있는 셔먼 차관이 정신 없이 바쁜 와중에도 나름대로 동북아에 대한 애정을 갖고 정리한 것이다. 한반도의 핵심 현안인 북한 핵문제와 북한 정권의 속성에 대해서도 페리 리포트를 정리했던 셔먼 만큼 잘 아는 사람은 미국 관리 중에 없을 것이다. 만일 이란 핵문제가 정리되고 오바마 대통령이 북핵 문제도 다뤄보겠다고 내닫는다면 이 문제를 중심에 서서 다룰 사람도 셔먼 밖에는 없다. 첨부된 원문을 한번 읽어볼 것을 권한다.


셔먼 차관의 발언을 곱씹어 보고자 한다면 오히려 일본에게 주는 메시지를 주목해 봐야 한다. 일본에 대해 ‘과거를 반성하라’는 등의 자극적 언급을 하지 않은 것을 미국의 정책 변화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원래 진짜 외교는 물밑에서 이뤄진다. 정말 기분 나쁠 얘기, 관철해야 할 얘기는 결코 밖으로 들어내지 않는다. 아베 총리의 미국 방문을 앞두고 미일 양국의 밀고 당기기는 심각한 수준이다. 밖으로 좋은 말을 하는 것은 물밑에서 그만큼 압박이 심하다는 반증에 다름 아니다. 친한 나라사이에서는 현안에 대한 갈등이 클수록 회담장 밖에 나와서는 얼굴에 미소를 짓는 것이 외교이다.


아베 일본 총리 미국 방문(2012년 2월)


미국은 아베 총리의 방미를 협의하면서 TPP, 방위협력지침, 국제무대 협력 등 못지않게 과거사 문제도 핵심 사안으로 챙기고 있다. 아베 총리를 국빈방문이라는 명칭을 구태여 사용하면서까지 미국에서 맞이하는 것은 종전 70주년을 기념해서 과거를 다시 한번 정리하고 미래를 도모하자는 결의를 하는 게 주 목적이기 때문이다.


한국 정부가 관심을 갖는 무라야마 담화나 고노 담화 계승은 과거에 전쟁을 치른 적국의 입장에서 미국이 앞장서서 이끌어 내야 할 과제다. 일본이 고삐 풀린 군사대국이 돼서 과거의 군국주의 시대로 돌아간다면 가장 두려움을 느낄 나라는 바로 미국이다.


군국주의 일본이 가장 먼저 취할 조치는 승전국 미국이 패전국 일본에 대해 취한 전후 질서를 원천 무효화하고 명예회복을 다짐하는 것이 될 게 명확하기 때문이다.



셔먼 차관 발언에 대해 한국 쪽의 반응이 격앙되자 미국은 즉각 해명을 내놨다. 셔먼 차관 발언을 일부 한국 언론이나 정치인들이 해석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내용을 국무부 브리핑과 보충 자료로 내놨다. 이런 신속한 대응은 사전에 준비가 돼 있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이다. 사전 준비라는 것은 다름 아니라 미국이 일본을 상대로 물밑에서 압박해왔던 내용을 말한다. 미국은 해명 자료로 내놨던 내용을 일본을 상대로 물밑에서 압박해오다 한국이 전혀 다른 얘기를 하자 반박하기 위해 보란 듯이 내놓은 것이라 할 것이다.


일본의 과거사 대응과 관련해서는 미국의 기본 정책이 확고하게 마련돼 있다는 것이다. 만일 일각의 우려처럼 과거사에 대한 미국의 정책에 변화가 있거나 변화를 시도하기로 전략을 바꾼 것이라면 그런 정도의 공식 해명이 신속하게 나오기는 어렵다. 미국의 입장에서는 그럴 필요도 없는 것이다.


한국 국민들이 일본에 요구하는 과거사 관련 사안에 대해 미국 정부 입장을 우려하는 것은 기우에 불과하다. 가장 중요한 군대위안부 문제의 경우 오바마 대통령이 이미 결론을 내놨다. 용납될 수 없는 여성에 대한 끔찍한 전시 성폭력이라는 오바마 대통령의 언급은 최소한 현 정부가 지속되는 동안에는 어느 미국 정부 관리도 이의를 달 수 없는 금과옥조 같은 지침이다.


미 의회도 이미 2007년 미 하원 결의안 HR121을 통해 위안부 문제에 대한 확고한 지침을 정해놨다. 무라야마 담화나 고노 담화를 통해 표현된 식민 지배, 침략행위에 대한 반성과 사과는 미국이 스스로 확립한 전후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도 필요한 대목이다.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미국이 직접 당사자가 되는 사안이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또 다른 사안인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도 미국과 싸운 전범들이 합사된 시설인 만큼 미국의 경계감은 더욱 크다고 할 것이다. 그래서 한국 정부가 지난 시기 그다지 공을 들이지 않았어도 아베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이후 미국의 일본에 대한 견제는 파열음이 심각한 정도로 강고해졌던 것이다.


한국 정부의 대미 외교 부실을 탓해야 할 대목은 과거사 관련이 아니다. 과거사는 미국이 직결된 사안이기 때문에 자국의 국익을 위해서 알아서 챙긴다. 진정 걱정해야 할 대목은 한미양국 지도자간에 간극이 점점 벌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대화할 기회는 많았다고 하지만 마음을 열고 하는 대화, 서로 부탁을 들어주는 대화가 긴요해 보인다. 겉보기에는 점잖고 공손해 보이는 대접이 계속돼도 실속이 없는 형식적 대화로는 난제들을 풀기 위해 힘을 모으기 어렵다.


한국 정부는 백악관이 일본 아베 총리와 중국 시진핑 국가주석을 미국에 초청하면서 한국을 제외하기로 했다고 통보했는지를 통렬하게 자성해봐야 한다. 발표 하루 전에 초청대상이 아니라는 통보를 받고 그나마 한국을 끼워 넣을 수 있었던 것은 한국 방문에 나서던 실세의 도움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다. 블린켄 부장관한테 매번 한국 방문에 나서달라고 요구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리퍼트 대사한데 백악관에 전화 좀 해달라고 매번 부탁하는 것은 국가의 위신 문제라고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도 셔먼의 용기 있는 시도가 폭력적으로 제지당한 상황은 시간이 지날수록 아쉬움을 남길 것임에 분명하다

kbs 이강덕 기자 kdlee@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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