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쇼핑몰 설계자에게 당한 건가?
경제문화 Economy, Culture/경제금융 Economy Finance2015. 3. 1. 12:04
공간·방향감각을 잃고 빙빙 돌고 우연에 의한 소비
복합쇼핑몰 코엑스몰의 ‘험난한 길찾기’
안내원도 찾기 힘들어
쇼핑시간 늘이기 고의성 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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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 복합쇼핑몰에 가면 길을 잃게 마련입니다. 쇼핑몰 설계자들은 ‘쇼핑의 연쇄반응’을 일으키도록 정확한 쇼핑몰 지도나 길 안내를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몰링족은 길 잃는 것까지 즐깁니다. 물론 길 잃는 것에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도 많습니다. 쇼핑은 물론 몰도 그다지 즐기지 않는 인턴기자 이수현씨가 최근 코엑스몰에 갔다가 길을 잃었습니다. 길 잃은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_편집자 넓은 코엑스몰 내부의 상점 디자인은 비슷비슷해 방향감각을 잃기 쉬웠다. 방향을 가리키는 표지판도 명확하지 않았다. 이미 지나온 구역이 새롭게 느껴져 길을 헤맸다. 류우종 기자 2월4일 수요일 저녁, 취업한 친구가 한턱 쏜단다. 서울 삼성동 코엑스몰에 있는 아웃백스테이크하우스에 가자고 했다. 거기가 몰 구석에 있어서 조용하단다. 취업해서 팔자가 피더니 강남에서 놀 줄도 알고 내가 알던 애가 맞나 싶다. 퇴근한 뒤인 저녁 7시에 만나기로 했다. 지금 들고 다니는 다 떨어진 가방을 대신할 백팩 하나 건지고 기사도 마무리할 겸 오후 2시쯤 서울 공덕동 사무실을 나섰다. 지하철 2호선 삼성역 5번 출구에서 나와 코엑스몰 입구까지는 200m 정도. 입구 앞엔 꽤 넓은 광장이 있다. 광장에서 눈에 잘 띄는 곳에 ‘에잇세컨즈’가 입점해 있었다. 제일모직에서 출시한 토속 SPA(의류의 기획·디자인·생산·제조·유통·판매 등 전 과정을 한 업체가 관리) 브랜드다. ‘겨울 막판 50% 세일’이라는 광고에 이끌려 매장에 들어갔다. 야상 점퍼가 6만9900원이다. 살까, 말까. 그래도 7만원이란 돈은 좀 부담된다. 그런데 바지 가격이 1만9900원이다. 단벌 숙녀로 몇 달을 살았던가. 검정색 데님 바지를 하나 사고, 1만8900원짜리 후드티도 샀다. 두 벌에 총 3만9800원. 합리적인 소비를 한 것 같아 으쓱한 기분으로 입구로 들어서자 갓 스무 살일 때 왔던 8년 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의 내부가 보였다. 당시 입구 즈음에 있던 우노나 마르쉐 같은 프랜차이즈 레스토랑은 없어졌다. 꽤 어둡고 노르스름한 조명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내부가 환해졌다. 가방을 어디서 살까. 또 다른 값싸고 만만한 SPA 브랜드 ‘탑텐’이 들어와 있으려나. 매장 입구에 있는 터치스크린으로 된 키오스크(길안내 정보 단말기)로 검색해보니 탑텐이 있었다. 40여 개의 매장을 지나서 아쿠아리움 근처까지 가야 했다. 멀군. 탑텐을 향해 가는 동안 보이는 상점들은 간판과 디스플레이만 달랐다. 공장에서 찍어낸 듯 균질한 외부 디자인이어서, 뭘 봤는지 기억은커녕 내가 어디에 있는지 공간감각과 방향감각도 사라진다. 주변 건물과 지형으로 위치를 짐작할 수 있는 길거리와는 확실히 다르다. 가다보니 ‘자라홈’ 매장이 있다. 예쁜 그릇과 포근해 보이는 침구, 나른한 아로마 향이 자라홈으로 이끌었다. “라이프스타일을 팝니다.” 베이지색 양인형이 무더기로 쌓여 있다. 침구를 보고 향초를 보는데 양인형이 계속 뒤통수를 잡아챈다. 평온한 눈망울의 인형은 4만9천원이다. 저 양이 있으면, 반지하라 낮밤 구분 없이 어두침침한 내 자취방도 광명을 찾을까. 컵라면 용기나 굴러다니는 방도 변화가 필요해! ‘인턴 월급도 나오니 이 정도는 사자’라는 생각에 결국 양을 샀다. 넓은 코엑스몰 내부의 상점 디자인은 비슷비슷해 방향감각을 잃기 쉬웠다. 방향을 가리키는 표지판도 명확하지 않았다. 이미 지나온 구역이 새롭게 느껴져 길을 헤맸다. 류우종 기자 미터 단위가 표시돼 있는 건 화장실뿐 매장에서 나와 화장실을 찾았다. 곳곳에 수직으로 박혀 있는 직사각형 기둥이 표지판 역할을 한다. 기둥에는 ‘삼성역’ ‘아쿠아리움’ ‘오크우드호텔’ 그리고 ‘화장실’ 방향으로 화살표가 표시돼 있다. 미터 단위가 표시돼 있는 건 화장실뿐이다. 20m 거리에 있단다. 나머지 길 안내도 거리를 표시해주면 시간을 계획하거나 동선을 짜기 좋을 텐데. 급한 일을 해결하고 나오니 방향감각을 잃었다. 주변이 비슷하다보니 왔던 길이 오른쪽인지 왼쪽인지 모르겠다. 아까 본 키오스크에서의 탑텐 위치도 기억나지 않는다. 어느 쪽으로 왔지? 자라홈 매장도 보이지 않는다. 이쪽으로 가면 아쿠아리움인가? 이쪽으로 가면 되돌아가는 길인가? 사방은 온통 하얗고 가게들도 다 똑같으니 눈여겨보지 않고 지나온 길이 새로울 뿐이다. 다시 길 안내 키오스크를 찾았다. 이번엔 키오스크 대신 ‘물어보세요’ 어깨띠를 두른 사람이 보였다. “조금만 더 가다보면 에스컬레이터가 있으니 그 근처로 가보세요.” 몇m, 몇 분 정도를 더 가라는 거야? 따져묻고 싶었지만 괜히 촌스러운 것 같기도 해서 “다른 사람들도 길을 많이 물어보나요? 길 찾기가 어렵네요”라고 말을 건넸다. “평일에 70명 정도는 길을 물어봐요. 점심시간에는 더 많이 물어봐요.” 나만 헤매는 게 아니었다. 다시 가려 해도 갈 길이 구만리 탑텐으로 가는 지표는 이제 아쿠아리움이 아니라 에스컬레이터다. 에스컬레이터까지 가는 동안 나도 모르게 다시 문구 매장에 들어갔다. 펜이 잘 나오지 않으니 사야겠다. 몰에 오니 바닥난 물건들이 자꾸 떠오른다. 매장 한쪽에 이어폰도 잔뜩 진열돼 있다. 맞다, 이어폰 오른쪽이 잘 안 들리지? 1만9500원짜리 이어폰을 샀다. 패션스트리트를 빙빙 돌다보니 신세계백화점 식품관. 식품관에서 백화점 1층으로 올라가, 백화점에서 타임스퀘어로 이어지는 통로를 찾느라 공간을 계속 맴돌았다. 괜히 명품관에서 위화감만 잔뜩 느끼고 다시 밖으로 나와 타임스퀘어 입구를 찾아 들어갔다. 쇼핑몰은 원래 그런건가. 약간 머리가 아프다. 다리도 아프다. 가방이고 뭐고 쉬어야겠다. 주변을 둘러보니 프랜차이즈 커피숍이 보였다. 커피숍은 도처에 널려 있다. 노트북을 사용하고 휴대전화도 충전하려면 이곳이 가장 편하다. 콘센트도 많고. 길찾기는 어렵지만 필요한 건 구석구석에 다 있다. 시계를 보니 벌써 오후 5시다. 그러고 보니 상점 어디에도 시계가 없다. 혼자 곰실곰실 돌아다녔는데 시간이 이렇게 빨리 지나가다니. 가방은 구경도 못했다. 나에게 필요한 건 가방이 아니었나. 쉬면서 복합쇼핑몰 길찾기를 검색하다 서울시립대 황산주(41)씨가 쓴 석사 논문 ‘대형 쇼핑몰의 길찾기 시스템에 관한 연구’를 봤다. “복합쇼핑몰은 소비자들의 동선을 복잡하게 해서 연쇄반응을 일으킨다. 영화를 보러 온 소비자에게 옷가게, 서점, 식당가 등으로 자연스럽게 발길을 이끌어 구매를 유도한다. 거리도 단위를 표기하는 것보다 앞, 왼쪽, 오른쪽에 뭐가 있다 정도로만 표시해야 우연에 의한 구매가 일어난다.” 결국 난 쇼핑몰 설계자에게 당한 건가. 아까 산 양인형의 표정이 서늘하게 느껴진다. 환불할까 싶은데, 다시 자라홈까지 갈 길이 구만리다. 이제 슬슬 약속 장소로 가야 할 것 같다. 만나기로 한 식당은 오크우드호텔 쪽에 있다고 했는데 들어온 지 3시간 가까이 오크우드호텔 그림자도 못 봤다. 다시 누군가에게 물어야겠다. 벌써 세 번째다. 아까 안내데스크에서 물어보니 키오스크는 200m 간격마다 있단다. 그나마 코엑스몰에는 키오스크가 많다. 얼마 전 영등포 타임스퀘어에 갔을 때는, 지하철역에서 타임스퀘어와 연결되는 통로를 찾지 못해 입구를 찾는 데만 30분쯤 헤맸다. 타임스퀘어 2층 서점에서 친구를 만나기로 했는데 지하철에서 들어간 입구에는 ‘패션스트리트’가 있었다. 패션스트리트를 빙빙 돌다보니 신세계백화점 식품관. 식품관에서 백화점 1층으로 올라가, 백화점에서 타임스퀘어로 이어지는 통로를 찾느라 공간을 계속 맴돌았다. 괜히 명품관에서 위화감만 잔뜩 느끼고 다시 밖으로 나와 타임스퀘어 입구를 찾아 들어갔다. 쇼핑몰은 원래 그런가. 넓은 코엑스몰 내부의 상점 디자인은 비슷비슷해 방향감각을 잃기 쉬웠다. 방향을 가리키는 표지판도 명확하지 않았다. 이미 지나온 구역이 새롭게 느껴져 길을 헤맸다. 류우종 기자 길찾기는 또 시작됐다 참, 호텔로 가야지. 어렵게 도착한 호텔은 몰과는 또 다른 분위기다. 이 안으로 들어가야 하나. 호텔 앞에 서 있는 남자분께 또 물었다. “저 아웃백 가려면 여기로 들어가야 하나요?” “네, 지하 2층 호텔 아케이드로 가시면 됩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2층으로 가면 끝날 줄 알았지만, 지하 2층에서 길찾기는 또 시작됐다. 밥 한번 얻어먹기 힘들구나. 한겨레21이수현 인턴기자 alshgogh0@gmail.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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