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경영의 대물림 [방석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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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 경영의 대물림

2015.02.05

- 기업인의 2세 교육


2002년 월드컵 축구대회 유치 경쟁은 한동안 한일 사이에 불처럼 뜨겁게 전개되었습니다.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 주기도 어렵게 되자 국제축구연맹(FIFA)은 1996년 5월 결국 양국 공동개최를 결정했습니다. 그해 10월 공동개최국이 된 한일 언론인들이 대한해협을 오가며 성공적 대회를 위한 세미나를 열었습니다. 

일본 측 개최 예정 도시들을 돌아보던 여정에 잠시 마쓰모토(松本)라는 작은 도시에 머물 때였습니다. 시내 큰길가에 갈대로 이은 지붕은 물론 나무기둥까지 세월의 더께로 새카맣게 변한 기념품 가게를 발견했습니다. 주인 말로는 대를 이어 그 집을 지켜온 지 100년이 훨씬 넘었다고 했습니다. 집 구경 값도 치를 겸 차 주전자 하나를 샀더니 튼튼한 종이가방에 담아 주었습니다. 종이가방에 쓰인 문구가 자못 감동적이었습니다. ‘변하기 쉬운 세태에 변하지 않는 마음을 전하고 싶어!’ 그렇게 오래도록 초옥을 지켜온 주인의 심지(心志)를 보아서도 값싼 상혼으로 비치지는 않았습니다.  

이따금 태어난 고장 같은 장소에서 3대, 4대째 이어간다는 일본의 가업 전수 이야기를 신문 방송으로 전해 듣곤 합니다. 어린 시절, 아니 불과 몇 년 전까지 단골로 드나들던 가게가 어느 날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는 우리네하고는 너무 대조적입니다. 자주 드나들던 음식점을 만날 장소로 정하고 찾아갔다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을 때의 허망함이라니.

소규모 가업 전수의 동화 같은 미담과는 달리 거부의 대물림, 대기업의 경영 승계에 대해서는 어느 사회에서나 논란이 많습니다.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가업에 대한 애정과 경영 노하우를 살려야 한다는 긍정적 의견도 있습니다. 기업을 일으켜 부를 일구고, 고용을 창출한 데 대한 보상의 의미도 있을 것입니다. 반면 과도한 부의 세습이 사회의 활력과 균형 발전을 저해한다는 부정적 견해도 있습니다. 특히 능력이 검증되지 않은 세습 경영이 오히려 기업의 장래에 위험을 초래한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선대가 피와 땀으로 일군 대표적인 대기업들이 2세, 3세 경영체제로 넘어가면서 과연 발전을 지속할 수 있을지, 아니 제대로 유지해 나가기나 할지, 세상은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지켜보곤 했습니다. 삼성그룹이 이병철 창업주에서 2세 이건희 회장의 경영체제로 넘어갈 때, 현대자동차가 정주영 정세영 형제의 손에서 2세 정몽구 회장에게로 넘어갈 때도 그랬습니다. 그러나 삼성전자를 비롯한 삼성그룹과 현대자동차그룹은 지금 나라의 재정을 떠받치는 큰 기둥으로 눈부신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단순히 2세 경영자의 운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창업을 위한 선대의 창의와 열정과 도전에 못지않은, 수성을 위한 2세들의 고민과 지혜와 노력의 결실일 것입니다.

이제는 삼성과 현대자동차 모두 3세들이 경영 일선에 나서고 있습니다. 불안해 보이기는 2세 경영 초기보다 덜하지 않습니다. 과연 그들이 그동안 정말 성실하게 경영 수업을 쌓고 그만한 능력을 갖추었는지, 많은 사람들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지켜보고 있습니다. 이미 그들 기업이 개개인의 소유물에 그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국가 경제의 기둥이요, 숱한 생활인들의 삶의  터전이요, 청운의 꿈을 안고 사회에 나선 젊은이들의 도약대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소위 ‘땅콩 회항’ 사건으로 대한항공 전 부사장 조현아 씨가 최근 법정에 섰습니다. 항공기 항로변경(활주로에서 탑승지점으로 이동), 운항 저해 및 폭행(승무원을 꾸짖고 서비스 매뉴얼을 던짐), 공무집행방해(국토부 진상조사 방해) 혐의입니다. 

‘회항’이라는 말 자체가 과장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검찰은 이례적으로 도망갈 위험도 별로 없어 보이는 여성 피의자를 구속하는 강수까지 두었습니다. 여러 증거자료를 이미 확보했음에도 불구하고 혐의 사실 은폐 시도 때문이랍니다. 저지른 죄에 비해 검찰 대응이 과하다는 느낌도 없지 않습니다. 최근 가장 무서운 게 여론이라고들 하지요. 아마도 일반 시민들이 표출해낸 분노의 무게가 혐의를 더욱 무겁게 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요즘 사회 정의와는 별개로 여론에 휘둘리기는 정치인이나 법조계나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 걸 노리고 두셋만 모이면 모임을 결성하고 깃발을 흔드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재판부는 지난달 30일 2차 공판에 조양호 회장을 증인으로 불렀습니다. 사건을 폭로한 박 모 사무장이 계속 근무할 수 있는지, 그룹 차원의 입장을 듣겠다는 것입니다. 그에 대한 위험이 예상되면 조 전 부사장에게도 무거운 벌을 줄 모양입니다. 물론 조 회장은 "사무장이 불이익 당하지 않도록 약속한다"고 다짐했습니다. 사건 피해자의 요구도 없이 재판부가 직접 관련이 없는 기업주로부터 신분 보장을 받아주는 예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찌 보면 여론에 편승한 재벌의 길들이기, 아니면 판사의 폼 잡기로도 비칩니다.  

자사 항공기에 탑승한 항공사 부사장의 자격을 단순 고객이라고 한정하는 데는 무리가 있습니다. 그러니 조 전 부사장의 언행을 넓게 해석하면 직무와 연관된 것이었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한심스럽게도 직무 범위와 절차를 벗어난 주인 행세. 권한을 넘어선 우월의식, 기본상식조차 망각한 즉흥적인 감정의 발동이 일을 그르치고 말았습니다. 피해자들의 심적 고통은 물론 국적기의 이미지를 실추시킨 책임이 결코 작지 않습니다. 공판에서 그녀는 자녀들에게 돌아가게 해 달라고 인정에 호소하면서도 승무원들에 대한 탓을 그치지 않았습니다.

지금처럼 치열한 글로벌 경쟁 속에서 조양호 회장은 부친과 숙부가 일으키고 키워온 한진그룹을 그래도 비교적 성공적으로 지켜가고 있다는 평을 들어왔습니다. 2018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와 대회 개최 준비 등 사회적 기여도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경영에 투입된 2세들의 어처구니없는 최근 언동이 많은 사람들을 실망케 하고 있습니다. 저렇게 철없고 능력도 지혜도 모자라는 자식들에게 회사 경영 일선을 맡기다니, 그 아버지 역시 한심스럽기는 마찬가지라는 생각마저 듭니다.

창업주의 혜안과 열정, 경영 노력으로 한때 우리 사회를 풍미하던 한 신문사가 2세 경영의 실패로 도산하고, 해체되는 모습을 지금 안타깝게 지켜보고 있습니다. 저 자신 일시 몸담았던 곳이기에 더욱 참담한 기분입니다. 주고받은 쪽이 모두 능력의 객관적 평가를 외면한 채 사정(私情)과 사욕에 매몰되었던 탓은 아닌지, 단순한 재물의 대물림보다 기업 경영의 대물림이 더욱 조심스러워 보입니다. 기업의 2세 경영이 얼마나 신중한 결단이어야 하는지, 기업인의 2세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지, 생각하게 됩니다. 

필자소개

방석순

스포츠서울 편집국 부국장, 경영기획실장, 2002월드컵조직위원회 홍보실장 역임. 올림픽, 월드컵축구 등 국제경기 현장 취재. 스포츠와 미디어, 체육청소년 문제가 주관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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