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내라! 착한 드라마 [박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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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내라! 착한 드라마

2015.02.03


“야, 대발아!” 라는 대사를 기억하는 분들이 아직도 많을 겁니다. 1991년 겨울에 MBC에서 방영됐던 ‘사랑이 뭐길래’라는 드라마에서 아버지 역의 이순재 씨가 아들 역의 최민수 씨를 부를 때마다 “야, 대발아!”를 외치곤 했습니다. 공전의 히트를 쳤던 이 드라마 덕택에 ‘대발이네’라는 음식점이 생겨났는나 하면 무명가수였던 김국환 씨가 일약 스타가 되기도 했습니다. 당시 이순재 씨는 극중에서 무한 책임과 무한 권력을 행사하던 전통적인 한국 가장의 역할을 훌륭하게 소화했으나 한편으로는 여성을 비하하는 전근대적인 성격 때문에 아내 역인 김혜자 씨를 자주 구박하곤 했습니다. 물론 드라마의 마지막 부분으로 갈수록 대발이 아빠의 가부장적 권위는 많이 허물어지는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리고 대발이 아빠의 이러한 변화를 보며 많은 시청자들이 당연한 결과라며 박수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필자는 그 드라마를 보면서 ‘이제 더 이상 가정에서 부권(父權)을 얘기하기 어려운 시대가 올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필자가 고등학생이었을 때 고전(古典)을 가르쳤던 나영준 선생님께서 하셨던 이야기가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요새 드라마를 보면 한숨이 나와. 웬 드라마마다 가전제품들이 그렇게 많이 나오는지 전기밥솥에 냉장고에 세탁기며 진공청소기까지 등장하니 말이야. 마누라가 ‘저거 사달라’, ‘이것도 사달라’하는데 안 된다고 하면 ‘저 집은 우리 집보다도 작은데 있을 게 다 있는데 우리 집은 아직도 조선시대야’라면서 한탄을 하는 거야. 그래서 결국 사주면 가전제품 덕에 가사 일이 쉬워지니 마누라는 시간이 남게 되지, 그러면 또 드라마를 보면서 뭐 살까 궁리를 하는 거야. 결국 남편들은 그걸 사대느라고 뼈빠지게 일하게 되는 거지.”

하지만 고등학교 은사님의 불평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여성 중심의 사회로 많이 변해갔습니다. 물론 아직 우리 사회에 여성의 성장을 저해하는 유리 천장이 존재하기는 하나 적어도 가정에서 아내의 위치는 앞선 세대보다 훨씬 높아졌습니다. 이렇게 여성의 권한이 높아진 배경에는 대한민국 드라마의 역할이 매우 컸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이름 있는 드라마 작가들이 대부분 여성이었다는 점은 우리 사회의 성차별을 섬세한 여성의 시각에서 바라보게 해주었고 이는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으로 여성 인권의 신장이 필요하다는 공감대를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드라마는 직접적으로 세상에 대해 어떤 주장을 펴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야기 속에서 자연스럽게 메시지를 전달하게 되는데 이러한 전달 방법이 너무나 교묘하고 자연스러워 시청자들이 의식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사람들의 태도를 변화시키기도 합니다.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집안의 TV리모컨은 아내들이 장악하게 되었는데 이 또한 그러한 변화의 한 예일 것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소위 ‘막장’이라는 명칭으로 불리는 드라마가 양산되었습니다. 오전 시간대에 주부들을 대상으로 만드는 일명 솝 오페라(Soap Opera; 주부를 주 시청층으로 삼아 만드는 드라마로 비누제조회사가 스폰서를 많이 해서 붙여진 별칭)에서 시작된 도를 넘는 불륜과 악행으로 뒤범벅된 막장 드라마는 이제 거의 모든 드라마의 생존 공식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아버지 우리의 결혼을 허락해 주세요.” “안 된다. 걔는 네 동생이야. 아빠가 젊은 시절에 잠시 만난 여인이 있는데 그 여인의 딸이란다.” 그 말을 들은 엄마가 옆에서 한마디 거듭니다. “괜찮다. 아들아. 결혼하거라. 넌 네 아빠의 아들이 아니야. 네 친부는 엄마가 결혼하기 전에 사귀었던 남자란다.” 이렇게 꼬여 있는 출생의 비밀, 끝이 없는 불륜, 얽히고설킨 극중 인물의 관계, 비윤리적인 등장인물들과 그 속에서 일어나는 비정상적인 갈등들은 흔히 막장 드라마라고 하는 것들의 공통적인 구성요소입니다. 또한 막장드라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캐릭터가 과장되어 있습니다. 나빠도 그냥 나쁜 정도로는 시선을 끌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의 탈을 쓴 악마처럼 악랄해야 하고 착한 역을 맡은 인물은 그냥 착해서는 안 되고 미련할 정도로 착해서 지켜보는 시청자의 속이 타 들어갈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특이한 현상은 과거에는 악역을 맡은 배우는 인기가 추락했는데 요즘은 어찌된 일인지 선한 역할의 주인공보다 더 인기를 얻고 있다는 것입니다. 시청자가 드라마와 현실을 구분 짓기 시작하고 연기를 연기 자체로 감상하기 시작했다는 좋은 신호로도 볼 수 있지만 선과 악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세상의 풍토도 한몫을 하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한 마음이 듭니다. 따라서 지난해 대표적인 막장 드라마인 MBC의 '왔다 장보리'에서 국민 악녀라는 호칭을 얻은 연민정 역의 이유리 씨가 연말 시상식에서 대상을 받은 것은 큰 변화이면서 동시에 우리 사회가 마주하게 된 작은 도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앞으로 어떤 악역 배우가 막장 드라마에 등장해서 시청자의 호평을 받게 될지 모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악역을 연기로만 생각하며 단순히 즐기는 와중에도 역치는 계속 올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어느 정도는 선을 지키는 것이 필요한데 이제는 그 선을 넘는 것이 흥행의 기본 요건처럼 되었습니다. 드라마에서 표현의 자유를 인정하면서도 방송 심의를 통해 적절한 견제를 하는 이유는 표현의 자유가 대중의 정서에 반하거나 공공의 이익에 악영향을 줄 경우 이를 바로잡기 위한 것입니다.

최근에 ‘착한 드라마’를 표방한 주말드라마가 방영되기 시작했습니다. 출생의 비밀도 없고 불륜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작년부터 SBS의 주말 시간에 편성하기 시작한 착한 드라마는 사회적 공기(公器)로서 책임을 다하고자 하는 방송사의 건강한 시도입니다. 최근에 방영되고 있는 착한 드라마의 제목은 ‘내 마음 반짝반짝’입니다. 서민의 딸로 태어난 세 자매가 가진 자들의 횡포 속에서 집안을 일으키고 자신의 성공을 위해 살아가는 성장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드라마로서는 매우 낮은 2~3%대의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어서 안타까운 상황입니다. 시청자의 외면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착한 드라마에 출연하고 있는 한 배우가 인터뷰에서 "막장드라마가 잘 되고 착한 드라마가 외면 받는 현실은 분명 제작하는 사람들과 시청자가 같이 풀어야 할 문제입니다."라고 얘기한 것은 현 시점에서 매우 큰 의미가 있습니다.

착한 드라마에는 쇼킹한 내용이 등장하지 않습니다만 평범하고 소탈한 일상을 통해 사람 냄새를 느끼게 해줍니다. 드라마를 보며 자연스럽게 지친 일상을 위로 받고 세상을 따뜻하게 바라보게 해줍니다. 마치 어머니가 갓 지은 따듯한 밥은 유별난 반찬이 없어도 맛있게 먹을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서울 변두리에서 낙지집을 연 사장이 장안의 유명한 낙지집의 비결이 궁금해서 이렇게도 요리를 해보고 저렇게도 요리를 해봐도 그 맛을 흉내 낼 수 없자 체념하듯 합성조미료를 한 국자 움푹 넣어서 요리를 했더니 그 유명하다는 낙지집과 똑같은 맛이 나더라는 얘기가 있습니다. 사먹는 요리가 맛있는 이유는 간이 세고 맛이 강렬하고 자극적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삼시세끼 밖에서 사먹는 사람이 건강을 유지했다는 얘기를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방송에 소개되는 장수하는 어르신을 보면 외식을 즐기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장안의 유명한 맛집을 많이 알고 있는 필자가 나이가 들면서 가장 최고의 음식이라고 여기게 된것은 바로 아내가 차려준 밥상입니다. 왜냐하면 아내가 차려준 밥상은 특별하지는 않아도 내 건강을 챙겨준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착한 드라마, '내 마음 반짝 반짝'이 잘되기를 바라는 이유는 필자가 몸담고 있는 SBS에서 방영하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어수선한 시대에 중심을 잡으려고 애쓰는 건강한 시도가 결실을 맺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모처럼 건강한 시도가 좌절을 맛보지 않고 계속 생명을 이어가 막장에 익숙해진 드라마의 제작과 시청 풍토에 큰 울림을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착한 드라마의 성공을 기원합니다. 

필자소개

박상도

SBS 아나운서. 보성고ㆍ 연세대 사회학과 졸. 미 샌프란시스코주립대 언론정보학과 대학원 졸. 
현재 SBS TV 토요일 아침 '모닝와이드'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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